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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23

 

기억절 :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11:7).

 

연구 범위 : 8:1~22, 40:12~14, 11:1~20, 6:5~8, 벧후 3:5~7

 

고통의 문제는 계속 우리를 질리게 한다. 착한 사람들이 심각한 비극을 겪는가 하면 악인들은 징벌 없는 생을 누린다. 몇 년 전에 왜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왔다. 이 책도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였지만,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그들의 고뇌를 글로 옮겼지만 정답에 이르지 못했다.(도덕론과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부가설명 자)

욥기의 주제도 같다. 우리는 이 책에서 왜 욥처럼 착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유를 계속 탐색한다. 물론 욥기에도 인간적인 관점으로 고통을 바라보는 내용들이 많다. 그렇다고 인간의 관점이 중심은 아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문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본다. 그것이 욥기가 다른 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욥을 방문한 친구들의 연설을 더 들어보려고 한다. 고통의 문제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처럼 그들의 실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이 징벌하신 예와 욥의 상황을 비교한다.

느끼기 : 사랑과 공의로 인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한다.

행하기 :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건전한 균형을 추구한다.

 

A.

그대는 빌닷과 소발의 요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재앙은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욥은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없는 인과응보만을 행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과 징벌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예를 보여줍니까?

홍수와 소돔고모라 사건이다.

죄가 자체적으로 형벌을 가져온다는 주장의 허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우리가 빌닷과 소발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할까요?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다. 이것을 거절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신다. 결과는 고통과 멸망이 되는 것이다.

 

결론 : 욥이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는 동안 빌닷과 소발은 더욱 거친 어조로 그들의 요점을 분명히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직접적인 하나님의 징벌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벌하실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줄이는 것입니다.

 

 

첫째 날() 116일 계속되는 책망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8:3).

 

엘리바스의 연설을 들은 것만으로 충분한데 욥은 다시 빌닷의 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의 주장 역시 엘리바스의 것과 비슷했다. 단지 그는 엘리바스보다 더 잔인하고 거칠었다. 자녀를 잃은 사람에게 가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8:4).

역설적이지 않은가? 욥기 1장을 보면 욥은 자녀들이 혹시 죄를 지었을까봐 그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다(1:5). 우리는 제사를 드리는 욥의 행위와 빌닷의 모두(冒頭) 발언에서 은혜를 아는 신앙과 냉정하고 가차없는 율법주의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빌닷이 하나님의 성품을 방어한답시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1. 8:1~22을 읽어 보라. 빌닷의 논점은 무엇이며, 그의 말은 얼마나 진실인가? 직접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드러난 정서만 볼지라도 그대는 그의 말에서 어떤 오류를 찾을 수 있는가?

[8:1~22]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컨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14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21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 이 주장도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논리이다. 욥이 당하는 재앙은 욥이 재앙 받을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순전한 상태로 돌아오라고 한다.

 

누가 과연 그가 한 많은 말 중에서 잘못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8:9). 이 말은 정말 옳은 말이며 성경적이기도 하다(4:14 참고). 아니면 세상과 속된 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거미줄보다 약한 것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그의 경고에 무슨 오류가 있는가?(8:14)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는 성경적인 사상이 아닌가?

아마도 가장 큰 문제점은 빌닷이 하나님의 성품 중 한 측면만을 제시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율법과 정의와 순종에만 초점을 맞춘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은혜와 용서와 대속만을 강조한다. 어느 쪽이든지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는 여기서 그와 비슷한 문제점을 보고 있다.

 

<부가설명> 빌닷의 말을 하나님의 성품의 공의 쪽만 강조한 것으로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빌닷은 진실로 하나님의 공의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죄에 대하여 반드시 형벌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도 도덕적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선악의 잣대로 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시오 생명자체이시다.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계시한다. 이 사랑은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들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빌닷이나 엘리바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이 생각하는 도덕적 범위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아담과 그 후손의 죽음을 대신 당하셔서 사망을 폐하셨다.(딤후1:10 참고)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인데 십자가로 그 공의가 집행되었다. 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썩어질 씨로 태어난 그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이 경우에 따라 재앙에 빠지는 것이다. 욥도 그가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난 존재인데 사단의 공격이 이르자 고통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고통에서 구하시려고 하신다. 다만 때를 기다리시면 욥이나 그의 친구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교훈 : 빌닷은 엘리바스보다 더 거친 언어로 욥을 책망했다. 그는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성품을 잘못 나타내는 오류를 범했다.

 

 

둘째 날() 117일 그대의 죄과보다 덜한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11:7~9).

 

1. 위의 말씀은 어떤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가?(40:12~14 참고) 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는가?

[40:12~14]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상태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창조주 여호와 앞에서 겸손해야 하면 그분을 헤아리려는 생각을 버리고 말씀에 굴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방대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로티는 우리가 절대 진실과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니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2,600년의 서양 철학의 역사가 이러한 포기 선언으로 막을 내린다니 놀랍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의 본질에 대하여 흑암에 머물 수밖에 없다면 아무리 노력한들 그 누가 이 세상을 만드신 위대한 창조주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로티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지금 성경에서 읽은 진리를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이 심오한 말씀은 욥을 방문한 친구 소발의 연설 중에 나온다. 그는 욥에게 반대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불완전한 논증의 일부로 사용했다.

 

2. 11:1~20을 읽어 보라. 소발의 말에서 옳은 것은 무엇인가? 전반적인 주장에서 틀린 것은 무엇인가?

[11:1~20]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4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6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15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20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

 

: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말은 옳다. 그러나 욥을 정죄하는 말은 숙고해야 한다.

 

욥처럼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와서 자업자득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심지어 이것은 네 죄과에 비하면 가볍다.’는 투로 말한다. 더 심각한 것은 소발이 앞의 두 친구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선하심을 옹호하려는 시도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교훈 : 소발은 인간의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런 옳은 인식과 달리 욥에게 죄를 버리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조언을 주었다.

 

 

셋째 날() 118일 하나님의 보응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7).

 

욥의 세 친구들은 확실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욥에게 전한 말이 상황에 맞지 않았지만 그들은 몇 가지 핵심적인 진리를 표현하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적인 사상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며, 악인에게는 죄로 말미암아 징벌이 임하고 선인에게는 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지만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을 때에 욥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은 홍수 이후로부터 출애굽 이전의 어느 시대에 살았을 것이다.

 

1. 6:5~8을 읽어 보라. 비록 욥의 친구들이 노아 홍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대는 그 이야기가 그들의 신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주장으로 알 수 있다.

 

노아 홍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하나님은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을 직접 징벌하신다. 그러나 창 6:8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도 은혜의 개념이 나타난다. 엘렌 G. 화잇도 그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방주를 만드는 모든 망치질 소리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예언의 신 1, 70). 그럼에도 우리는 홍수 이야기 속에서 욥의 친구들이 그에게 하려는 말의 실례를 본다.

 

2. 응보의 심판이라는 개념은 창 13:13, 18:20~32, 19:24~25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13: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8:20~32]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 소돔고모라를 심판하신 사실에서 하나님이 심판에 친히 개입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이러한 사건들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건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죄인들을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고, 그 죄가 그들을 멸망시키게 하셨다. 노아 홍수에서 하나님은 직접적인 심판의 집행자이셨다. 그분은 죄악과 악인들에 대한 심판자와 파괴자의 역할을 하셨다.

 

<부가설명>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에는 심판의 의미가 들어 있다. 시편 9:16여호와께서는 그 행하시는 심판으로 자신을 알리시며, 악인은 스스로 행한 일에 걸려든다.”(바른성경)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셔서 자기를 알리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피조물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을 때 창조주이시며 자존하시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여호와께서 창조해주신 존재를 회수하신다. 이유는 그가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와 상관없이 자기도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여호와께서 창조해 준 그것을 회수하고도 그들이 존재하면 여호와와 상관없이도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피조물은 여호와께서 창조해주지 않았으면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고 여호와가 자존자이시며 창조주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심판으로 자기를 알리신다고 계시한 것이다. 홍수도 소돔고모라도 이 원리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회수당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심판도 이 원리가 적용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세 친구들의 변론은 진리의 한 측면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은 때로 직접 심판을 집행하시며 형벌을 내리신다.

 

 

넷째 날() 119일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신다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6:24~25).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죽고 난 뒤 오랜 세월 동안 성경에는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진 복과 더불어 악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의 예들이 많이 기록되었다.

 

1. 6:24~25에는 순종에 대한 어떤 큰 약속이 있는가?

[6:24,25]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 항상 복을 누리게 하는 약속이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그분이 직접적인 복과 번영을 주신다는 약속이 흔하게 나온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서 경건하고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말한다. 신명기의 말씀이 그 예이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벌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도 많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도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2. 16:1~33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응보의 형벌이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반역과 그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셔서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산채로 삼켰다. 땅이 입을 벌려 반역자를 삼키는 일은 그 전에 없던 새 일이었다.(16:30)

 

반역자들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볼 때, 이 사건은 죄가 자체적으로 형벌을 가지고 온다는 개념과 관계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죄와 반역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직접적인 보응을 맞이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6:30). 여기서 행하사라고 번역된 말은 창 1:1창조하시니라라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유래했다. 하나님은 반역자들에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라셨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형벌은 그 성질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 같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신다.(1:3) 이 붙드시는 손길을 거두시면 만물은 유지할 수 없다. 다 파괴되고 멸절하게 된다. 예수께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5:17)라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이 붙드시는 손기를 거두시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고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31:16~18)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64:6,7)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3:42,43)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지구를 붙드는 손기를 거두시면 삽시간에 멸망이 이르게 된다. 이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형벌하신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심판의 성질이 아니겠는가.

 

교훈 : 성경은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복 또는 심판을 언급한다. 대표적인 예로 고라의 무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받았다.

 

 

다섯째 날() 1110일 둘째 사망

 

마지막 때에 나타날 둘째 사망”(20:14) 즉 악인들의 멸망은 응분의 심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증거이다. 우리는 이 죽음을 아담의 후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죽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의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죽음이다(고전 15:26). 구약 시대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둘째 사망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벌이다.

 

1. 벧후 3:5~7을 읽어 보라.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는 어떠한가?

[벧후3:5~7]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 옛 노아 때에 물이 세상에 넘침으로 멸망한 것 같이 이제는 불사루어 멸망할 것이다.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 땅이 깨진다.깨어진 땅의 모든 틈에서 맹렬한 화염이 터져 나온다. 모든 바위가 불이 된다. 풀무불처럼 불타는 날이 마침내 왔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것들이 타 버린다(4:1; 벧후 3:10 참조). 땅의 표면은 마치 용해된 하나의 덩어리, 곧 하나의 거대한 끓는 불못처럼 된다. 이때는 경건치 않은 자들의 형벌과 멸망의 때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34:8)”(각 시대의 대쟁투, 672~673).

죄가 징벌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직접 죄와 죄인들을 벌하실 때가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은 맞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욥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고통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다. 우리는 대쟁투에 개입되어 있고 원수는 우리를 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신다. 우리가 겪는 시련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리고 그러한 시련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오직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고통이 끝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부가설명> 둘째 사망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죽음이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구주의 약속으로 인하여 육체의 생명을 유예 받아서 역사가 이루어지고 죄의 역사가 세상에 이어지게 되었다. 지금 세상 역사는 사망의 역사이다. 다른 말로 사망의 역사이다. 땅은 죽은 사람들의 뼈로 채워지고 그 뼈들 위에 또 죽을 인간들이 사망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가 있는 기간 동안 생명으로 세상에 오셔서 아담에게 선고된 그 죽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어 복음으로 전파하는 그 복음을 듣고(딤후1:10) 예수께 나오면 아담에게 선고된 그 죽음은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안에서 드러난 부활의 생명 영생의 생명으로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산 자의 땅에서 영생한다.(12:27, 27:13 참고)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이 생명을 거절하면 그들은 불가불 그 생명과 존재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반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와 자비에 모순되도록 죄인을 죄 있는 그대로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죄를 범함으로 스스로 간직할 자격이 없음을 입증한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취하신다.”(각 시대의 대쟁투, 544). 그 생명을 반납 받아 취하실 때 모든 악인은 그 존재를 상실한다. 그 상실하는 과정이 불 못이다. 불로 소멸된다. 그래서 악과 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함께 완전히 소멸하고 사망이 소멸한다.(고전15:26) 그 후로 생명만 온 우주에 충일하게 될 것이다. 아멘.

 

교훈 : 둘째 사망은 최종적이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여섯째 날() 11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이야기 속의 인물의 입장에 서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동기와 행동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만큼 현실 뒤에서 펼쳐지는 쟁투를 보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우리도 엘리바스, 빌닷, 소발처럼 욥의 고통에 대해서 쉽게 실수를 범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판결을 내릴 자격이 없었다. “큰 재화가 흉악한 죄나 큰 범죄에 대한 확실한 표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품성을 저울질함으로써 종종 실수한다. 우리는 보수하시는 심판의 때에 살고 있지 않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어 재난은 누구에게나 다 임한다.욥은 쓰라린 고통을 당하였고, 그의 친구들은 그의 고통이 그의 죄의 결과라는 것을 시인하게 하려 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정죄 하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를 큰 죄인의 입장에 있다고 하였지만 주께서는 그의 신실한 종에 대한 그들의 판단을 책망하셨다”(화잇주석, 4:7~9). 우리는 전반적인 고통의 문제를 다룰 때에 주의해야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원인과 결과가 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운 어떤 사람이 폐암에 걸렸다면 그 원인이 너무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나 평생 담배를 피웠지만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즉 엘리바스, 빌닷, 소발처럼 우리는 고통이 왜 찾아오는지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보이는 고통에 반응하여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이점에서 욥의 세 친구는 전혀 옳지 못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비록 현재의 상황이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우리는 보응의 형벌이라는 진실을 통해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마침내 생명의 영원한 승리를 드러내실 것이다. 죄와 사망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더 잘 동정할 수 있습니까? 혹 우리가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처럼 아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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