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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일 안식일

일몰오후 633

 

기억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11:25).

 

연구 범위 : 11:11, 1:1~4, 8:54~55, 5:28~29, 5:22, 29, 11:38~44.

 

인간은 죽음에 대한 내재적인 반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일종의 침입자이며 원래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예수님은 사별을 당한 이들에게 깊은 동정을 보이셨다. 외아들을 무덤으로 옮기는 나인성의 과부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7:13)셨다. 12세의 딸을 방금 전에 잃고 비통에 잠긴 아버지를 위로하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36)고 하셨다. 죽음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그분의 동정 어린 심령은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물 그 이상의 일을 하신다. 죽음과 부활을 겪으면서 죽음을 정복하셨으므로 그분은 사망의 열쇠를 쥐고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영생으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단연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주어진 최고의 약속이다. 만약 죽음이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살아온 생애와 성취한 일들은 다 헛될 뿐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인식한다.

느끼기 : 오늘과 내일 신자들의 삶 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다.

행하기 :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능력에 최대한 의지하는 삶을 산다.

 

A.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영혼불멸과 부활 중에 무엇이 더 과학적으로 현실성이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보편화 되어 있는 영혼불멸설은 그냥 당연시하기 때문에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다. 성경의 사상으로는 당연히 부활이 과학적으로 현실성이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상태와 죽음은 일반인들의 상식과 어떻게 다릅니까?

성경은 사람의 상태가 이미 사망의 상태라고 가르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일차 사람이 죽는 것을 자는 것이라고 계시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떻게 모순됩니까?

성경은 결코 영혼불멸설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부활과 영생을 확신한다면 지금 그대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받아들일 것이다.

 

B.

과학은 생명 복제를 시도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제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사망의 존재를 복제하기 때문에 결코 부활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현세에서 죽는 것은 자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 가르친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의미는 어떻게 퇴색된다고 생각합니까?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대가 꼭 영생의 부활에 참여해야 할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확증하셨고 창조주께서 사람을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요 참된 경배라고 증언할 것이다.

 

결론 :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도 영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닌 여타의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될 뿐입니다.

 

 

첫째날() 죽은 자들의 상태

91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구약성경의 기자들은 인간이 분리되지 않는 생명체라고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대개 영, , 육으로 번역된 여러 히브리어는 다양한 시각에서 전인적인 인간을 묘사하는 각각의 표현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 보조를 맞추어 성경은 죽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 가운데 자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기에 적절한 대표적인 표현이다(3:11~13, 14:12, 13:3, 51:39, 12:2). 죽음은 생명의 총체적 종말이다. 죽음은 생각, 감정, 일 그리고 어떤 종류의 관계도 없는 무의식의 상태이다(9:5~6, 10, 115:17, 146:4).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인간론은 특히 영혼불멸이라는 이교적인 이원론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그 사상은 세상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1.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셨는가?(11:11)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잔다고 설명하셨다.

 

이 말씀과 여러 다른 말씀이 설명하고 있는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께서 영혼불멸을 믿으셨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십자가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어디에 쉼표를 찍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바뀐다. (가장 오래된 신약 성경 원문에는 구두점이 없다.) 쉼표가 네가뒤에 찍히면(개역개정의 경우 이르노니뒤에 찍히면) 대부분의 번역 성경이 의미하는 대로 예수님이 그 강도와 함께 그날 낙원에 간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쉼표가 오늘뒤에 찍히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강도에게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뜻이 된다(‘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라는 뜻으로 읽히게 되기 때문).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의 보증을 강조했지 강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시간을 강조했던 것이 아니다.

앞뒤 문맥이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처음부터 강도는 죽자마자 하늘로 옮겨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께서 그분의 나라에 이르실 때 기억해 달라고 하였다. 더욱이 예수님은 삼 일 후에 자신이 아직 낙원에 오르지 못했음을 확인해 주셨다(20:17). 따라서 이 말씀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부가설명> 인간의 구조(構造)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복잡하게 이해하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 배후에는 창조주를 대적하는 사단이 있다. 사단은 창조주 외의 어떤 존재도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총력전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그의 사상을 구현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조주만이 영원한 생명이고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계시한다. 그 창조주는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뜻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 스스로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일 수 없고 창조할 수 없다. 창조주께서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창조주에게 연결되어서만 유지된다. 창조주를 떠나면 어떤 피조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사단도 그렇다. 사단은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단이 없어진다고 분명히 계시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2:14) 예수님은 마귀를 없이하실 것이다. 그런데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사망이 된 사람들의 영혼은 지옥 불에서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으면서 영생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그런데 소위 교회가 그 사상을 강단에서 가르치고 주장하고 있다. 교회가 바로 사단의 하수인이 되어서 여호와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으로도 영생한다고 주장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마귀의 주장을 선전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

 

교훈 : 성경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며 사람의 죽음을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하는 수면의 상태로 설명한다.

 

 

둘째날() 부활의 소망

915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8:54~55).

 

세상을 창조하실 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2:7)었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생기(생명의 호흡)를 유지시켜 주시는 한 그것들은 생존한다. 그러나 그분이 숨을 거두시면 그것들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104:29, 12:7). 이는 하나님의 자의적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빚어지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 안에도 희망이 생겼다.

 

1. 1: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죽은 자들을 일으킬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생명 자체시라고 계시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부활시킬 능력이 그분에게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14:6).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능력이 있다(5:21). 그러므로 그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

 

2. 부활은 어떻게 일어나는가?(8:54~55 참고)

[8:54,55]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 떠났던 호흡이 돌아와서 죽은 사람에게 생기, 곧 살리는 기운으로 역사(役事)할 때에 일어나게 된다.

 

성경에 따르면 부활의 과정은 죽는 과정의 반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돌아오면 생명이 회복된다. 누가가 야이로의 딸이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도 이와 같았다. 12세의 딸이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은 그 집에 가셔서 곡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가 잔다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8:54~55)났다. 예수님이 거룩한 명령을 내리시자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생명의 원리가 소녀에게 돌아왔다. 누가가 사용한 프뉴마라는 그리스어는 바람’, ‘호흡그리고 을 뜻한다. 성경이 그것을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 그것은 절대 몸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의식적인 실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가설명> 생명은 창조주에게 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신데, 이 말은 생명 자체라는 말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을 생명이라고 계시하고 생명의 원천이라고 계시한다.(42:8, 36:9)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생명은 여호와께로부터 온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든지 일시적인 생명이든지 근원은 같다. 이 생명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실 때 전달된다. 아담에게 생가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생명을 전달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거두시면 생명체는 생명을 잃고 생명 없는 물체가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시체, 사체 또는 주검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그것을 흙으로 돌아간다고 계시한다.(3:19, 104:29) 성경은 사람에게 죽지 않는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계시한 곳은 없다.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계시한다. 창조주로부터 영생의 생명을 받은 사람 자체가 산 영(생령)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영생의 생명을 잃었을 때 사람은 육체의 생명만 허락받아(6:3, 17:11) 일정기간 생존하고 반드시 죽는다.(9:27) 그 기간을 수명이라고 한다. 죽는다는 것은 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104:29) 사람은 생명을 잃은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사람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창조한 상태를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영혼불멸설에 결코 속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단의 최대 걸작 속임수이다.

 

교훈 : 구약과 신약은 살아있는 인간 또는 부활하는 인간에게 부여되는 생기가 어떤 의식적인 실체가 아니라 생명의 호흡임을 가르친다.

 

 

셋째날() 부활과 심판

916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부활은 소수에게 일어나는 일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듣고 부활로 나올 때가 오리라고 말씀하셨다(5:28~29). 신자든 비신자든, 의인과 죄인 그리고 구원받은 자와 멸망할 자들이 모두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24:15)고 선언했다.

 

1. 마침내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부활하더라도 그들이 맞이할 영원한 운명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이 맞이할 운명은 무엇인가?(5:28~29)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영생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전 인류적인 부활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이 영원한 기쁨과 축복의 삶으로 인도된다는 뜻은 아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12:2).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삶을 심판하여 이 땅에 살았던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12:14, 2:1~11).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고는 각 개인의 죽음 직후가 아니라 오직 부활 이후에 집행된다. 그때까지 구원받은 자들과 멸망당할 자들이 모두 흙 속에서 무의식 상태로 잔다. 따라서 부활은 그 자체로는 어떤 상이나 벌이 아니다. 그것은 영생 또는 영벌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이 행동의 도덕적 질을 기초로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행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셨다(3:16).

그렇다면 왜 행위가 고려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진실한 것인지 아닌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여전히 허물과 죄”(2:1) 가운데 죽어 있는지 아니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6:11)지 증명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도덕적 선악에 대하여 물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의 구절 요한5:29은 부활할 때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사람에 대하여 분명히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님은 형벌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지 않으시고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셨다. 또 예수님은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3:18 참고) 그런데 신학은 참된 그리스도인도 도덕적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대로 받는다고 기록된 말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후5:10)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벧전4:5)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는데,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선악간이라는 표현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필자는 심판에 대한 성경의 기록 사상과 조직신학이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심판에 대한 사상이 일치하는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생각할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교훈 : 마지막 때에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이가 두 종류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각자의 행위는 그들의 진정한 믿음을 증명할 것이다.

 

 

넷째날()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917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3:33).

 

예수님은 두 개의 그리스어 하데스게헨나를 사용하셔서 악인들의 죽음과 형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옥이라는 말에는 이미 대중적인 개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미를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영역을 의미하는 가장 흔한 히브리어 스올에 해당한다. 두 단어는 단순히 무덤또는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장소를 의미하며 상벌을 암시하는 내용은 없다. 그런데 하데스가 형벌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가 하나 있다.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이다.

 

1. 16:19~31을 읽어 보라.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제시하려는 교훈은 무엇인가?(특히 27~31절 참고) 이 비유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즉시 천국 또는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이 비유는 구원의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는 기간뿐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구원의 기회가 결코 없다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죽은 사람의 상태에 있지 않다. 이 비유에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비성경적인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비유는 우리의 운명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내리는 결정에 달려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이생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빛을 거절한다면 우리에게 사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에 이를 뿐이다. 사실 이 비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은 이것을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도록 계획하셨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도록 의도적인 어색함이 곳곳에 존재한다.

 

2. 예수님은 지옥에 대하여 어떤 경고를 반포하셨는가?(5:22, 29~30, 23:33)

[5:22, 29,3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사지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결단으로 지옥의 판결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셨다.

 

여러 번역 성경을 보면 지옥이라는 단어가 예수님의 입술에서 11번이나 언급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분은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헬라어 게헨나를 사용하셨다.

구약에 따르면 예루살렘 남쪽의 이 협곡에서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이 몰렉에게 자녀를 불사르는 혐오스러운 이방 의식을 행하였다(대하 28:3, 33:6). 후에 경건한 왕 요시아는 그 같은 행위를 금지시켰다(왕하 23:10). 거기서 자행되었던 죄악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곳이 죽임의 골짜기로 불릴 것이라고 예언하였다(7:32~33, 19:6).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그 골짜기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최후의 심판과 형벌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다른 성경절에는 설명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형벌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어떤 상세한 설명 없이 그 단어를 단지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따라서 지옥은 절대 영벌의 공간이 아니다.

 

<부가설명>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사후 세계에 대하여 가르친 비유가 아니다. 이 비유에는 영혼이라는 말도, 지옥이라는 말도 없다. 죽은 후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갔고 부자는 음부에 갔다고 했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와 같이 음부라는 표현도 지옥이 아니다. 그것은 사후 소멸되는 악인들의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결과에 대한 것을 예시한 표현이다. 사람이 죽자마자 그 영혼이 지옥이나 천국에 간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리고 중심적으로는 인간의 구원의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뿐이라는 것과 그것은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이적보다 기록된 말씀으로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옥은 최후에 악인이 소멸되는 불 못을 표현하는 말이다. 악인들은 종국에 불 못에 들어가서 영원히 소멸하여 재가 되게 하는 그 불에 불타서 재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옥은 이것을 나타내는데, 23:33의 지옥의 판결을 피하라하더냐고 하신 것은 최후에 악인들에게 내려질 판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르게 깨달아서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가 아니라 무덤 또는 유다 역사에서 비롯된 지명과 관련이 있다.

 

 

다섯째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

918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5:21).

 

1. 나사로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인 이유는 무엇인가?(11:38~44)

[11:38~44]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 상태에서 다시 살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앞서 죽은 자 두 명을 일으키셨지만, 이보다 극적이지는 않았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 이는 무덤 곁에서 마르다가 증언했던 사실이다. 대낮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다수의 존경 받는 증인들 앞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 증거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사로의 부활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죽은 자를 일으키고 자신이 뜻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실 권세가 있었을 뿐 아니라(5:21)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었다(10:17~18). 그분의 부활은 이런 사실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였다.

 

2.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에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고전 15:17~20)

[고전15:17~20]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은 후에 부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은 구원의 확실한 결과이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

 

죽음의 결박을 깨뜨린 그리스도의 권세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은 그분 안에 잠자고 있는 자들의 첫째 열매로서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예수님은 죽음의 열쇠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의 보증이 된다(1:17~18).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죄로 인해 잃어버린 생명이 우리 구주 안에서 회복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이 원하는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생명을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 계신 까닭이다. 그분은 불멸을 주실 권리를 부여받으셨다. 그분은 인간을 위하여 버리신 그 생명을 다시 취하셔서 인간에게 주신다”(시대의 소망, 786~787).

 

<부가설명> 부활은 성경종교의 핵심이다. 부활이 없으면 성경은 거짓말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십자가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증거의 초첨이 예수님의 부활임을 확실히 드러낸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선택할 때에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1:21,22)이라고 말했다. 십자가는 사망을 폐하신 것이고 부활은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딤후1:10)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죽은 자의 소망이라고 선언했다.(23:6)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참여하려한다고 소망을 간절히 표현하였다.(3:11)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이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속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만 하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에 있는 것이다.(고전15:17) 속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속죄된 확실한 증명도 부활이다. 이 땅에서 열심히 교회생활하고 스스로믿음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날 의인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면 속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성경의 종교는 생명의 종교요 진정한 속죄의 종교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네. 그 부활에 나도 참여할 것이니 감사만만이네.

 

교훈 :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죽은 자를 살릴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통해 모든 믿는 자를 위한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

 

 

여섯째날()

919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524~536 “나사로야 나오라”, 779~787 “주께서 살아나시고를 읽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자는 성도들을 불러일으킨다. 주님은 의인들의 무덤을 보시고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드시고,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여, 일어나라!’고 외치신다. 이 땅의 어느 곳에서나 죽은 자들이 그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다.그들은 사망의 감옥에서 나와 불멸의 영광을 입고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고 외친다. 그리고 산 의인들과 부활한 성도들은 음성을 합하여 오랫동안 승리의 즐거운 함성을 올릴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4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우리 모두는 죽음의 현실성 그리고 그것의 표면적인 궁극성과 무차별성에 시달립니다. 많은 사람의 생각처럼 신이 없다면 영생, 부활도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만간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다 죽고 그들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현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 같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답을 제시합니까?

부활은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강력히 증명한다. 오직 예수 안에서먼 인생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영광되게 된다.

 

영혼불멸 사상 속에는 어떤 위험이 내재되어 있습니까? 사탄이 이 같은 비성경적인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사상은 종말의 때에 나타날 종교 현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죽음을 부활이 있기 전까지의 수면 상태로 이해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기대 속에는 어떤 기만이 잠재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불멸 사상은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없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죽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단의 주장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오늘날 강신술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생명의 구주를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수면 상태로 있다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성경의 진리와 상관없는 오류이다. 구원과 부활 이 모두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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