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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5분 04

기억절: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14:6~13, 24~46, 18~19장, 31:1~7, 삼하 1:5~12, 왕하 6:8~17.

특혜를 누리는 자녀로서 요나단은 모든 것을 제 것이라고 믿는 버릇없고, 욕심 많은, 이기적인 소년일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의 아들이 아닌가?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공중 연설에도 능했고, 가장 훌륭한 전사이자 군대 지휘관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위대”했다.

그러나 하늘은 “위대함”에 대한 다른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나단은 세상이 생각하는 위대함을 뒤로 하고, 대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함”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요나단의 삶을 통하여 하늘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해야 함을 깨닫는다. 무엇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요나단의 이야기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출생과 신분과 부와 재능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그의 이야기는 말해 준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삼상 1:6

| 학습 목표 |

⊙ 깨닫기 :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같이 종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들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시는지 이해한다.

⊙ 느끼기 : 요나단이 신뢰할 수 없는 아버지 사울과 기름부음을 받은 친구 다윗에게 보여준 충직한 태도를 본받는다.

⊙ 행하기 : 어떤 치욕과 고난을 당할지라도 종의 지도력을 실천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종의 지도력

A. 요나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감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조력하는 역할을 부여하셨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맡긴 임무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어떤 면에서 요다단의 반응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위대하였는가?

02. 느끼기: 왕의 아들과 친구

A. 요나단은 멸망해 가는 아버지와 자신이 차지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게 될 친구를 동시에 조력하였다.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하나님과 아버지 그리고 친구에 대한 그의 이타적인 사랑을 어떻게 나타냈는가?

03. 행하기: 고난당하는 종

A. 그리스도는 대표적인 고난당하는 종이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요나단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라는 부르심을 받게 되는가?

B. 섬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와 행동으로 반응하게 되는가?

요 점: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를 동시에 조력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심지어 전쟁터에서 아버지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요나단은 섬기는 지도자로서 이타적인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일요일(10월 17일) 최고의 우정

부모와 형제자매, 친족 간의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법적으로 규정된 관계를 부여받는다.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배우자까지 선택해 준다.

그러나 우정은 법적으로 규정된 대부분의 인간관계와 같지 않다. 우리는 친구를 선택할 수 있다. 우정은 국경을 넘기도 한다. 우정은 다른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 5:16은 우정이 결혼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친구사이가 매우 끈끈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우정은 완전히 자발적인 관계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우정도 율법의 자구(字句)를 충족시키기보다 자신을 내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삼상 18:1은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묘사하면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의 성경절들은 어떤 종류의 우정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까? 출 33:11, 욥 16:20, 잠 17:17, 27:9, 전 4:10, 요 15:13~15.

[삼상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욥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요15:13~1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답: 진실한 우정은 서로에게 솔직하며(출 33:11), 슬픔을 함께 나누며(욥 16:20), 변절하지 않고(잠 17:17), 진심으로 충고하며(잠 27:9), 좌절한 친구를 붙잡아 주고(전 4:10),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는 것이다(요 15:13~15).

아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머니가 죽고, 대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내가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력히 결속된 이런 관계는 지극히 숭고하면서 보편적인 것으로써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한다. 심지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동물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정은 본능 그 이상이다. 진실한 우정은 대화를 통해 배양된다. 친구는 즐거운 순간뿐 아니라, 모든 어려운 순간들을 함께 하고 돕는다. 우리는 충고와 격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친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간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었다. 삼상 20장에서 요나단은 우정이란 단지 말하는 것 이상임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기꺼이 도움을 준다. 요나단은 자주 그의 아버지 사울 앞에서 다윗을 위해 중재하였다(삼상 19:4).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다윗을 찾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를 만나 여호와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삼상 23:6).

친구로 사람을 가늠함

“누구나 친구를 찾거나 사귈 것이다. 선한 쪽이든 악한 쪽이든, 친구 사이에 서로 끼치는 영향의 강도는 우정의 깊이에 정비례한다. 모든 사람들이 친구를 가지며, 피차 영향을 끼치고 받게 될 것이다.”(증언보감 1권, 585)

<부가설명> 진정한 친구는 마음을 나누는 사이이다. 부모와 형제들과도 마음을 나누지 못할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정말 친구와는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성경에 친구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필로스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성경에 아가페가 가장 많이 쓰였다. 아가페는 대상의 가치와 상관없이 그 대상을 살리려는 정신과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필리아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나타낸다. 친구는 바로 서로에게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요나단과 다윗이 바로 그런 관계였다. 또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렇게 가치 있게 여기셨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신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죽어주실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은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분이시다. 순교자들은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진정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구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분의 친구다운 사상과 생활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교훈: 진실한 우정이란 아무 조건 없이 고락을 함께 나누고, 친구의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월요일 10월 18일 위대한 승리

이스라엘은 매우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블레셋인들이 연합하여 병거와 군사들을 몰고 왔는데 그 수효가 바다모래처럼 많아 보였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무기도 변변치 못했다. 블레셋인들이 철기 산업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에, 사울과 요나단만 겨우 철제 검과 방패를 쥘 수 있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구나 연장을 고치거나 날을 세우기 위해서는 블레셋 대장장이에게 가야했다(삼상 13:19~ 22). 막대기와 도끼, 물매를 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되어 있는 블레셋 대군을 맞이하고 있는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군대가 상상이 되는가? 사울의 군대는 어쩌면 가장 높은 탈영률을 기록했는지도 모른다.

1. 영적 싸움에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길 때, 형국이 어떻게 극적으로 전환될지 생각해 보십시오(왕하 6:8~17 참조). 이 기사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까?

[왕하6:8~17]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12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13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답: 군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매우 불리했지만, 영적인 싸움에서 하나님의 군대는 아람의 군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생각을 사로잡은 두려움이 요나단에게는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과 신뢰심이 없음을 한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무엇인가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요나단은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이 직면한 문제보다 하나님께서 더 크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나단은 자신을 구원자나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 든 자를 사용하시자 그들에게 믿을 수 없는 큰 승리가 주어졌다.

2. 적의 전초기지에 오르기 전에 요나단은 어떤 단계를 거쳤습니까? 삼상 14:6~13.

[삼상14:6~13]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가로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를 대하여 가로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13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답: 요나단은 독단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보다는 부하와 함께 의견을 나눴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징표를 구하였다.

때로 믿음과 추측 사이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직관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와 나누고 조언을 구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조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징표를 제안하였고,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대로 기꺼이 가거나 멈추고자 했다. 마침내 전진하라는 징표가 보이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도전에 뛰어들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요나단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병기 든 자에게 원수의 진을 은밀히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 그들은 저희 조상의 인도자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함으로써 저희가 어떻게 진격해 나가야 할지를 결정케 해주는 표징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표적들을 인정하였고, 블레셋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알았다.”(부조와 선지자, 623)

<부가설명> 요나단의 경험은 영적 싸움의 승리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는 모형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두른 대적들은 바다의 모래와 같다. 붉은 용은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계12:7)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방어용이다.(엡6:12~18)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전신갑주에는 공격용 무기인 활이 없다. 그러나 사단은 활을 가지고 불화살을 쏘아댄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들을 대적하고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신 그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승리를 지켜나가야 한다. 확고한 믿음과 성경의 증거와 예언의 신이신 성령의 인도로 이 승리를 넉넉히 지킨다. 바울은 넉넉히 이긴다고 하였다.(롬8:37) 우리도 요나단과 같이 믿음으로 행하고 행함으로 승리를 만끽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승리는 무기를 가진 다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것이다.

화요일(10월 19일) 부모와 자녀 사이

1. 삼상 19:1~7을 읽으십시오. 그대는 사울과 요나단과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요나단은 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어떤 고민에 빠졌습니까?

[삼상19:1~7]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답: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했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변호함으로써 아버지와 친구를 모두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요나단이 어렸을 때 사울이 어떤 아버지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후에 그가 존경할 수 없는 인물이었음을 알고 있다. 사울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기복이 심하며, 질투심이 많고, 비이성적이며, 때로는 안절부절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출 20:12의 명령을 잘 실천하였다.

2. 삼상 14:24~46을 읽으십시오. 원한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요나단은 아버지를 더 이상 공경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단점 때문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요나단의 됨됨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삼상14:24~46]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25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26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으나 27 요나단은 그 아비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그 손을 돌이켜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28 때에 백성 중 하나가 고하여 가로되 당신의 부친이 맹세로 백성에게 엄히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29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고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 있는 채 먹었더니 33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 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34 또 가로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각기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잡아 먹되 피 있는 채 먹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36 사울이 가로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가로대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가로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38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편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편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컨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42 사울이 가로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가로되 너의 행한 것을 내게 고하라 요나단이 고하여 가로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가로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하여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답: 사울의 오판으로 이스라엘은 더 큰 승리를 챙기지 못했을 뿐더러, 아버지의 성급한 맹세와 왕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요나단은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런 처사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요나단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함으로써 겸손히 아버지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단순히 선물이나 감사 카드를 드리는 그 이상이다. 요나단은 위기 때에도 아버지 곁을 지켰고, 아버지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가 질병에 걸리거나 직장을 잃는 위기의 때에 우리도 그들 곁을 지킴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마음과 물질로 부모를 지원해야 할 성경적 의무가 있다(딤전 5:8).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마지못해 하는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다. 요나단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드리기도 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해서 우리 자신의 판단을 억제하고, 부모의 실수를 옹호해 주거나, 부모의 의견에 무작정 따르거나, 악한 것도 용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품을 가졌든지 그들에게 특별한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부모를 공경한다

“그대가 진정으로 변화되었다면, 그대가 예수님의 자녀라면 그대의 부모를 공경할 것이다. 그대는 부모들이 명령하는 것만을 행할 뿐 아니라 부모들을 도와줄 기회를 잡으려고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행할 때에 그대는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295~296)

<부가설명> 오늘날은 부모를 거역하는 시대이다.(딤후3:2) 신문에는 자주 부모를 죽인 자식들의 이야기가 보도된다. 감히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다. 이런 상태를 미리 보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사명으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이키게 하는 것이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나아가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 되심과 인류가 그분의 자녀됨을 깨닫도록 인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 세상은 인간 부모와 자녀 사이가 극도로 괴리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인류가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버린 당연한 결과이다. 진화론을 사람을 맹수와 같이 되게 하였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을 교육해도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 정신은 윤리와 도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계시한 사망이 된 사람들의 썩어져가는 구습이 극대화 된 모습이다.

재림성도들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엘리야의 사명에 포함된 것이다. 나아가서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세상을 강권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요나단이 끝까지 아버지 곁을 지켰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특별한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수요일(10월 20일) 이인자의 위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부모를 탓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주된 경향이다. 물론 지나치게 무거운 정서적 짐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실까지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런 불행한 경향이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부모를 원망할 뿐 아니라, 때로는 형제자매, 스승, 여건을 탓한다. 자신이 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아닌 다른 데에서 찾으려 한다.

상황이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굴복하게 되며, 때로는 그것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나단의 생애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통해 여전히 일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나단에게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었는지 모른다. 사울이 신실한 왕이었다면 요나단이 왕위를 잇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요나단은 부모를 탓할 마음이 없었다. 대신 요나단에게는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 후회와 한탄으로 생을 소모하기보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아마도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다윗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이런 믿음과 신뢰심을 유지하였다.

1. 자신을 대신하여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요나단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삼상 23:17. 다음의 성경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요나단을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사 14:13~14, 왕상 1:5, 막 10:35~37.

[삼상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사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왕상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막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답: 요다난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임을 깨닫고 그 사실 때문에 번민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권력을 탐하던 자들과 달랐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비난과 반대를 당하여도 자존감을 잃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신분이 보장됨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이다. 삼상 14장에서 블레셋 군대를 무찌른 사건을 통하여 요나단은 하나님과 극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갖게 되었다.

다윗가의 후대 이야기는 반역과 내분으로 장식되어 있다.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둘 다 아버지 다윗에게서 왕좌를 물려받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권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요나단의 태도는 이렇게 “나”를 앞세우는 정신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기꺼이 이인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와 친구 다윗 사이에서 조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 애썼다.

참된 우정의 시금석

“다윗이 가는 길에는 밝은 곳들이 거의 없었다. 이때에 그의 피신처를 알고 찾아온 요나단의 예기치 않은 방문은 그를 매우 기쁘게 하였다. 이 두 친구가 서로 교제하면서 지낸 순간들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들은 저희가 당한 여러 가지 경험을 말했으며 요나단은 다윗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고 말하였다. 저희가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이로운 처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쫓겨다니는 도피자는 큰 용기를 얻었다.”(부조와 선지자, 660)

<부가설명> 요나단의 생활 태도는 전적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신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삶이 요나단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랬기에 그는 세상의 권력이나 지배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선택과 인도를 하실 것을 믿고 맡긴 것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이다. 이것을 깨달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것을 최선 최대의 생활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교훈: 요나단은 주변 인물이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았고 믿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였다.

목요일(10월 21일) 세상이 공평하지 않을 때에

1. 삼상 31:1 ~7과 삼하 1:5~12을 읽으십시오. 요나단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삼상31:1~7]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7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삼하1:5~12] 다윗이 자기에게 고하는 소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 그에게 고하는 소년이 가로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 따르는데 7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답: 요나단은 블레셋 연합군을 맞이하여 길보아 산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사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선이 이기며, 뭐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배웠다. 또 선한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 살며, 악인은 불행하게 살다 단명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상 선인이라고 꼭 잘 되고, 악인이라고 항상 잘못 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옳은 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분의 자녀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시며 보호하시지만, 그렇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2. 신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성경의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창 39:10~20, 욥 1~2장.

[창39:10~2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욥1장, 2장] 공부하는 분들이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답: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다 행복하고 안락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큰 환난과 시험을 겪고, 반대와 핍박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였고, 영원한 가치에 소망을 두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진실하고 신실한 친구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다윗과 사울 사이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으며, 왕위에 오를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였다. 전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한 나라의 군대 전체를 내쫓으셨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군대와 다시 마주쳤다. 아마도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기적을 행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삼상 31:2).

그러나 침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한 인물들 가운데 들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잦은 고난에 시달렸고, 명예로운 지위를 잃었으며, 때론 그들의 임지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우리 눈에 그들의 삶과 희생이 어쩌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동기를 얻었고, 그분의 동행하심으로 인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인생을 살았다. 그들의 위대함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해와 기대를 초월한 것이었다.

우리 생각에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이 많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잘못을 바로 잡고, 납득할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될 날이 꼭 올 것이다.

저 건너편의 소망

“사단은 하나님의 사자의 지상 생애를 단축시키도록 허용은 받았지만 그 파괴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골 3:3)어진 저 생명은 어찌할 수 없었다. 사단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슬픔을 가져다 준 것을 매우 기뻐하였으나 요한을 정복하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죽음 그 자체는 다만 요한을 영원히 시험의 권세의 피안(彼岸)에 두게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224)

<부가설명> 이 세상은 어두움의 세상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이 어두운 대로 있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원의 봉사가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인가. 바울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릿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머물 뿐이다. 잠시 머물 동안 존절함으로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생활해야 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소망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은 데려가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날 그 자리에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요 소망이다. 요나단은 이런 사실을 일찌 깨달은 것 같다. 우리도 이런 사실을 깨닫고 바울의 말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어두움의 권세가 고통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욥의 인내로 살아가야 한다.

교훈: 의인은 간혹 세상 무대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지지만 하늘에서는 빛나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금요일(10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자기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의 기록에 구약에 한 사람, 신약에 한 사람의 이름 곧 요나단과 침례 요한의 이름이 있다. 세자(世子)로 태어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에서 자기가 제외된 것을 알고는 경쟁자에게 친구로서 가장 친절하게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였고, 자기 아버지의 세력이 쇠하여 가는 음울한 시기 내내 그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결국 그 옆에서 죽었다. 요나단의 이름은 하늘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으며, 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이타적인 사랑의 존재와 힘에 대한 증인으로 서 있다. 침례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나타나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큰 무리가 그를 좇았다. 그러나 그가 증거해 왔던 분께서 등장하시자 모든 것이 일변하였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며, 요한의 일은 신속히 그 종말을 고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동요되지 않았다.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하였다.”(교육, 156~15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믿음과 추측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표적을 구하게 됩니까?

* 믿음은 약속에 근거한다. 약속에 없는 것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이 추측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약속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성경 전체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수행하면 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2. 어떤 문화에서는 나서지 않는 태도를 미덕으로 여기는 반면 어떤 문화에서는 그런 자세를 바람직하지 않게 취급합니다. 요나단은 스스로 이인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는 너무 소극적인 태도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소극적이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그래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롬12:3)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을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기도와 말씀 연구로 깨닫고 그것을 주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로 수행하는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옳다.

3. 그리스도인들도 병에 걸리고,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이들과 사별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질문하는 비그리스도인 친구에게 신앙의 유익을 설명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아마 특이한 생활 경험을 할 것이다. 풀무 불 속의 세 친구나 사자굴 안의 다니엘이나, 끓는 기름 가마에서 멀쩡하게 살아나온 요한이나, 이런 경험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처하여 사는 환경과 문화와 정치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 같이 노출되어 있고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소망 중에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세상의 고난을 즐거움으로 지낼 줄 안다.(롬5:3,4)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이다.

4. 히 11:32~40을 읽고 요나단의 생애에 대하여 토론하십시오. 그대가 암담한 상황에 있거나 그런 전망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씀에서 어떤 도움을 얻습니까?

*[히11:32~40]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들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신앙의 용사들이다.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위하여 히브리서의 신앙의 용사들의 삶을 본받으려고 한다.

5.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인도 아버지를 공경해야 합니까? 육체적으로 학대를 가한 부모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떻게 따라야 합니까?

*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서 부모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고 그길로 이끌도록 마음을 써야 할 것이 아닐까?

6. 세상에서 추구하는 위대함과 하나님이 보시는 위대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세상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평가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치관에 의하여 평가하신다. 세상의 가치관은 윤리와 도덕과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정도 등을 참작하겠지만, 하나님의 가치관은 영생의 가치관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사망의 세계의 가치관이지만 하나님의 가치관은 생명의 세계의 가치관이다.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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