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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일 안식일

일몰오후 527

 

기억절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연구 범위 : 2:14~26, 3:27~28, 2:14, 고후 4:2, 4:1~5, 2:1~21.

 

그는 성공적인 의사이자 출석 신도 수백 명의 잘나가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교회의 큰 사업에 필요한 중요한 기부자였으며 그의 관대함은 다른 이들의 헌신을 이끌었다. 그 의사는 훌륭한 설교자이기도 했다. 목회자가 부재중일 때 그가 설교를 맡으면 모든 사람이 신학적으로 심오하고 감동적이며 영적인 기별을 기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드러났다. 어느 안식일에 그가 교회를 결석한 것은 많은 사람의 생각처럼 휴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콘도에서 기분 전환용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의 침실에 수십 개의 음란 비디오 영상과 잡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충격에 휩싸였고, 특히 그를 본받고 싶은 인물로 존경했던 젊은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물론 우리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만 이 의사의 행위는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요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믿음과 신앙생활 속에 나타나야 할 행위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야고보가 상술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핵심 진리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직하고 구원의 믿음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의지함에서 비롯되는 확신을 경험한다.

행하기 :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믿음과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과 기적을 받아들인다.

 

A.

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행위(실천)와 연결되어야 합니까?

생명은 활동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라합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진정한 믿음은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동하는 믿음의 예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성경말씀이 인격화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B.

2:19에서 말하는 마귀의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지식은 있으나 그 믿음의 지식이 인식으로만 있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순종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는 그 행위로 구원을 받거나 의롭게 되는 공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순종은 산 믿음의 열매로 열리는 것이다.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려면 우리에게 어떤 순종이 필요한지 이야기해 봅시다.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이 인격화하게 될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말과 행실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은 행실로 증명됩니다.

 

 

첫째 날() 죽은 믿음

112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1. 우리는 위의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15~17을 읽고 롬 3:27~28, 2:8~9과 비교해 보라.

[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3: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고 구원받은 증거는 믿음의 행위로 드러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두 설명을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같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 2:15~16은 이런 종류의 유사 믿음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제시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서의 순종은 관계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하나님은 형제와 자매를 돕도록 우리에게 수단을 제공하시는데 우리가 그냥 평안히 가라 하나님이 주시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필요는 끝이 없고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위 한 사람의 힘이라는 원칙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다.

그래서 한 번에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사실 그것은 대체로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었다. 5:22~34에서 죽어가는 딸을 둔 아비가 예수님께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때 한 여인이 그분께 다가와 옷자락을 만졌다. 치유가 이루어져야 예수님도 계속 길을 가고 그 여인도 행복하게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예수님은 그녀에게 육체적인 치유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아셨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가 자신이 받은 것처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시려고 멈춰서 그녀에게 시간을 할애하셨다. 그런 다음에야 그분은 우리가 약 2:16에서 볼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평안히 가라”(5:34). 야고보서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인사였다.

도움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행사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믿음은 점차 약해지고 서서히 죽어간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런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라고 더욱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믿음이 살아있다면 행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있는데 어떤 좋은 결과가 있겠는가? 14절 끝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고 쓸모없는 이런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원문의 표현은 번역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는 우리가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한다.

 

<부가설명> 성경에 행함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로는 단어가 있다. 야고보서에 말하는 행함은 에르곤이다. 이것은 노력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된다. 믿음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노력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고 십일조를 내려고 하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다 믿음이 역사하는 행위라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고전13:13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같은 말을 살전1:3에도 기록했는데, 거기에는 설명이 붙어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믿음에는 역사(役事)가 따른다는 것이다. 역사(役事)라고 번역한 말이 에르곤이다. 믿음에는 반드시 믿음이 드러내는 역사, 곧 노력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고 소망에는 이내가 있는 것이다. 역사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인내가 없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사상이 포함된 말씀이다. 야고보도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행함(노력,에르곤)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믿음이 노력(역사, 에르곤)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깊이 새겨진 말씀이다.

 

교훈 : 행함으로 믿음을 실천할 기회를 놓치면 믿음은 약화되고 사라진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서 구원과 거리가 멀다.

 

 

둘째 날() 구원하는 믿음

11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2:18).

 

1. 2:18을 읽어 보라. 야고보의 요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는가?

 

: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요점이다. 믿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동력이기 때문에 말씀의 의미대로 생활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가상의 반대자를 등장시키는 평범한 수사적 기교를 사용한다. 이 경우에 반대자는 우리가 믿음이든 행함이든 하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 둘을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밝히려는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응하는 행함이 없다면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

아무런 믿음이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 즉 구원하는 믿음의 특징적인 요소는 선한 행위이다. 역으로 행함도 믿음에서 비롯돼야 선한 행위이다.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은 다른 한쪽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동전처럼 한쪽은 앞면이고 다른 한쪽은 뒷면이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행함이 따른다.

 

2. 2:10, 살전 1:3, 딤전 5:25, 2:14에서 행함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살펴보라. 선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딤전5: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 구속하고 깨끗케 하신 것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과 선행은 불가분의 것인데, 구원을 받기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지음을 받은 다음에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선행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선행이었다(2:16 참고). 실제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으니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정말 율법을 준수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10). 순종은 오직 성령의 선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부가설명> 2:14이나 엡2:10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아무도 오해할 수 없도록 가르쳐주는 구절이다. 2:10은 우리를 지으신 것은 선한 일을 위한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음을 받기 전에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딛2:14도 같은 말이다. 구속한 것은 선한일의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구속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친백성도 아니고 선한 일에 열심할 수도 없다. 순서상으로 무엇이 먼저인지를 오해할 수 없도록 분명히 가르치는 말씀이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행해야 한다는 말은 행함으로 지음을 받게 되고 행함으로 구속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음을 받기 전에 없는데 행할 수 없고 구속을 받기 전에 죽은 상태인데 행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과 행함, 구원과 행함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괜찮다. 구속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재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면 선한일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갈라디아 2:20의 바울의 간증이며 빌2:13의 간증이다. 이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성령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교훈 : 믿음 없는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존재할 수 없다. 진실한 의미에서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셋째 날() 마귀의 믿음

114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

 

행함이 없다면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할 남은 방법은 정통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가 옳은 것을 믿고 있다면 믿음이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1. 고후 4:2, 딤전 2:4, 5:19~20, 벧전 1:22, 요일 3:18~19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고후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바라신다. 진리를 떠나면 죄인이 되고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며 진리에 속할 때에만 주님 앞에 굳세게 된다.

 

물론 진리에 대한 지적 정보도 나름의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지식만으로는 한 사람이 구원의 믿음을 가졌는지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2. 2:19은 진실한 믿음에 대한 거짓 개념을 어떻게 경고하는가?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고 떤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 계신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있지만 그것이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6:4은 구약에서 믿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진실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6:4). ‘쉐마로 알려진 이 성경절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이 근원적인 진리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마귀들도 이 진리를 믿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떤다. 예수님과 대면하여 그들의 포로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3:11, 5:7).

우리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적 믿음은 쓸모가 없다. 실제로 그것은 거짓 교리와 거짓말로 우리를 기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마귀들이 가진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것처럼 마귀들은 그들의 포로가 부정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을 버리지 않으려는 욕망을 발판으로 기만을 믿도록 선동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믿음은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마귀의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마귀를 구원하지 않을 것처럼 우리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의 믿음문제를 공부할 때에 인식과 이해와 인격화에 대하여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어떤 지식과 학문은 지식으로만 있어도 괜찮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을 머리에 지식으로만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지식이다. 종교논쟁을 할 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믿음이다. 그는 시험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성경지식을 동원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성경지식을 동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인격화해야 한다. 비록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해박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성경사상이 인격화할 때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인격화환 성경말씀이다. 말씀이 인격화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죽은 사람은 송장인 것과 같다. 그는 일시적으로 사람의 모양을 유지하지만 곧 부패한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그냥 물질일 뿐이다. 그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송장믿음이라는 말이다. 곧 부패하고 만다. 성경말씀이 인격화한 믿음은 믿음자체가 그 사람의 행위요 생활이다. 이것이 산 믿음이다.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 표현할 수 있다. 1:14은 말씀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한 것을 뜻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기록된 말씀 성경말씀이 그리스도인으로 육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말씀의 인격화요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실상이다.

 

교훈 : 마귀도 하나님에 대한 지적 믿음은 있다. 삶과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이다.

 

넷째 날() 아브라함의 믿음

115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

 

1. 2:21~24을 읽고 롬 4:1~5, 22~24과 비교해 보라. 이 말씀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칭의는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

[2:21~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4:1~5, 22~24]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고 그렇게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은 행함으로 드러내었다고 가르친다. 행함은 그가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말씀이다.

 

흥미롭게도 야고보와 바울 모두 창 15:6을 인용하지만 각자 다른 결론에 도달한 듯이 보인다. 야고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반면 롬 4:2에서 바울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을 명백하게 부인한 것 같다(24절과 비교).

그러나 로마서 4장 전후의 문맥은 의롭게 되기 위한 할례의 필요성 여부와 관련이 있다. 즉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3:28~30). 바울은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칭의의 기초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먼저 믿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후에 내적 믿음의 외적 징표로 할례를 받았다(4:9~11). 그러나 할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행위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4:12)만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이 정말 많이 다른가? 바울은 더 나아가 야고보가 사용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4:17~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시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4:17)시기 때문이다(11:17~19과 비교). 바울은 또한 구원하는 믿음을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4:21)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확신하며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이다. 이런 순종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이다.

야고보 또한 그런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 많은 사람이 믿음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 둘을 분리시킨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5:6)이다. 선한 행위는 단지 믿음의 외적 징표일 뿐 아니라 믿음의 발산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그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것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믿음이었다. 야고보에 따르면 믿음은 순종에 의해 완전해진다.

 

<부가설명>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구약의 의식적 율법들을 부지런히 행해도 그것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그중에는 할례도 포함되었다. 할례를 행하는 그 행함 자체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표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인데, 이제 와서 그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 예수를 믿지 않고 율법의 일을 행하여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율법과 믿음을 다 배반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성취된 율법의 실상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말씀이 인격화된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은 생활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야고보와 바울이 다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행함이라고 제시한 예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다른 예이다.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은 바울이 말하는 그런 율법의 행위가 아니다. 또 라합이 정탐꾼을 접대한 것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수행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의 행위가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말씀이 바로 우리의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산 믿음이다.

 

교훈 : 야고보가 강조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바울이 거부한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믿음의 순종이었다.

 

 

다섯째 날() 라합의 믿음

116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5).

 

1. 2:1~21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사례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맥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1~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6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3 (12절에 포함되어 있음) 14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17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21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영접함으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증거하였다. 이것이 라합의 믿음의 행위였다. 그것은 율법 조문을 행하는 율법 준수와 다른 차원의 행함이다.

 

11:31에 따르면 여리고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했다고 설명한다. 여리고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과 아모리 족속에게서 거둔 승리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바알브올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이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들을 혐오하신다는 사실을 여리고 백성에게 가르쳤다. “이 모든 사건을 여리고 거민들이 잘 알고 있었고 라합의 확신에 동참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에 순종하기를 거절했다”(부조와 선지자, 492).

라합은 그녀의 부정직함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구원을 받았다. 그는 참 하나님을 믿었으며 여호수아가 파송한 정탐꾼들을 숨겨줌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행사했다. 또 다른 조건이 있었다. 그녀는 정탐꾼들의 지시에 순종하여 붉은 줄을 창문 밖에 걸어 두어야 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구원의 날에 집 문기둥에 뿌린 피를 연상케 한다(12:21~24). 비록 라합의 삶은 완전과 거리가 멀었지만 믿음으로 즐거이 나아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결과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받게 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2. 2:26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어떻게 요약하는가?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즉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호흡하지 않는 몸이 시체에 불과한 것처럼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믿음이 없이 행하려는 순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은 행실”(6:1)만 더할 뿐이다.

 

<부가설명> 라합의 경우는 기록된 율법을 준행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경우도 동일하다. 아브라함 때에는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은 아직 문자적으로 없었다. 바울이 지적하는 대표적인 것은 할례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기 전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 후에 그는 할례의 언약에 들어갔으며 그 후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부활시킬 것을 믿었다고 기록하였다.(11:17~19) 그의 행함은 그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행위였다. 라합도 정탐꾼을 영접하고 이스라엘 진으로 돌려보내고 여리고 왕에게 고발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인 것을 미는 믿음을 행함으로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증거된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움직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교훈 : 여리고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도 멸망했지만 그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고 순종으로 표현한 라합은 불완전한 삶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17

 

자아를 완전히 거둬 내면 그대는 새롭고 풍성한 경험을 얻을 수 있으며, 십자가 아래에 무릎을 꿇으면 자신의 불완전함을 식별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보면 자아는 무가치함에 묻힌다.

식별력 있는 눈에 그리스도는 매력적인 사랑의 완성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과 생각 속에 새겨지고, 품성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마음에 각인되고 생애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부족할지라도 예수님께 나오라.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기도하라.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붙잡고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그대가 배우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그대를 가르치실 것이고, 따르고자 한다면 그분은 그대를 생명수의 근원으로 인도하실 것이다”(Testimonies to Southern Africa, 2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야고보서 2장을 읽어 보십시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만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기별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활동하는 것이라는 기별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활동하는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이들은 야고보가 바울의 신학을 참고하지 않고 믿음과 행위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야고보서를 야고보의 사고방식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에는 어떤 오류가 있습니까? 특히 이 경우에 다른 성경절이 믿음과 행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가톨릭 변론가들은 개혁주의로부터 로마교회를 방어하기 위해 야고보서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주어진 모든 성경절을 바탕으로 교리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고보의 사고방식도 바울과 같은 사고방식이다. 이유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저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동일하다. 이런 사실을 확신하는 중에 성경 전체의 일관된 사상으로 교리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사고방식, 바울의 사고방식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믿음과 행위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주 교과에 비추어볼 때, 그대는 이 말에 동의합니까? 교과반에서 토의해 보십시오.

100% 믿음이고, 100% 행함이다. 왜냐하면 100% 생명을 가진 자는 그 생명의 활동도 100%가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또는 신약 성경에) 이스마엘과 관련하여 실패한 아브라함의 믿음 또는 라합의 거짓말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을 받기 전의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생활하도록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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