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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일몰:오후 5시 18분

기억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하 2:17~23, 3:23~27, 11:15~25, 20:7~11, 왕상 1장.

요압의 이야기는 정치와 권모술수와 왜곡된 충성과 질투와 완고함의 이야기이다. 당시는 강력한 중앙 정부나 잘 정비된 퇴직 제도에 의해 생존이 보장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신속하게 사라졌다.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다져간 다윗의 용사이자 관리자였던 요압의 때가 그랬다. 부족 사이의 경쟁과 불화로 특징 지워졌던 사사기 이후에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은 것은 왕의 등장이었다. 왕권은 사울로 시작해서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면서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성경은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부족적 사고가 삼사십 년 안에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요압의 생애는 전쟁과 불화와 심지어 종족학살로 얼룩져 있다. 우리에게 요압이 연루되었던 그런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의 이야기로부터 우리 안에 있는 일그러진 품성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주 우리는 다윗의 부족한 용사 요압이라는 부정적인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품성의 단점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 예수님을 찾게 될 것이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잠 21:2

| 학습 목표 |

⊙ 깨닫기 : 다윗의 군사령관으로서 자격을 갖춘 요압의 장점과 그의 리더십에 손상을 준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한다.

⊙ 느끼기 : 세속적인 방법과 속임수, 질투와 음모는 정의를 성취하기 위해 적절치 않은 방법임을 인식한다.

⊙ 행하기 : 일들이 공평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에 완전히 의지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선과 악의 힘

A. 군대장관으로서 요압은 다윗을 보좌하는 무리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요압은 평생에 다윗을 위해 어떤 선한 일들을 행했는가?

B. 요압의 시기심과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어떻게 그의 재능을 가로막고 마침내 다윗의 신임을 잃게 만들었는가?

02. 느끼기: 가족과 부족에 대한 충성심

A.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요압의 가족에 대한 충성심은 존엄함과 정의의 원칙에서 얼마나 크게 벗어났는가?

B.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그는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

03. 행하기: 믿음의 시험

A.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대신 우리의 방식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생각을 따를 때가 얼마나 많은가?

B. 정의를 위하여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을 하나님께 헌신할 필요가 있는가?

요 점: 군대장관으로서 요압은 수십 년 다윗을 섬겼으며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준 때도 많았다. 그러나 직접 원수를 갚고 시기심에 불타 꺼낸 칼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왔다.

일요일 11월 14일 가족의 문제

요압이 다윗의 친척이었고(대상 2:13~17 참고), 다윗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그의 품성을 처음으로 엿볼 수 있는 곳은 사무엘하 2장이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 유다는 급히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사울 왕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던 아브넬은 살아있었다.

아브넬과 다윗 사이에는 과거사가 있었다. 사울의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수없이 수색했던 자가 바로 아브넬이었다. 아브넬은 자신이 쫓던 자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유다와 다윗을 향해 전쟁을 일으켰다. 수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유리했지만, 다윗의 나라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1. 삼하 2:17~23을 읽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요약해 보십시오.

[삼하2:17~23]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8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 노루 같이 빠르더라 19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0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21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 22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3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답: 다윗의 군대와 이스보셋의 군대 사이에 예기치 않은 충돌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패하자 아브넬은 도망했고,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추격을 멈추지 않았던 아사헬은 그만 아브넬의 창에 죽고 말았다.

국지전이 벌어지는 동안 요압의 동생이 현명치 못하게 아브넬을 추격하였다. 아브넬은 그에게 추격을 멈추라고 여러 번 경고했지만, 성격이 급한 젊은 장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아브넬은 자기방어 차원에서 그를 죽였다. 요압은 이 일을 잊지 않았다.

얼마 후 아브넬은 연약한 왕 이스보셋 통치 아래 상황이 좋지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다윗에게로 가서 이스라엘 부족들을 다윗에게 돌리겠다고 제안하였다(삼하 3:1~22). 그때 먼 곳으로부터 복귀하는 길에 있던 요압은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새로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요압은 자신이 주도하지 않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삼하 3:23~27. 요압이 다윗에게 했던 말과 그가 궁극적으로 아브넬을 죽인 이유를 대조해 보십시오. 삼하 3:30. 요압은 아브넬의 동기를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이런 사실을 통해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삼하2:23~27]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24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가 기아 맞은편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25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27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삼하3:30]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답: 왕 앞에서는 아브넬이 정탐을 하기 위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실은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브넬을 죽였다.

기도는 보복의 정신을 극복하게 한다.

“자아를 변호하고 우리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는 일은 고상한 마음의 증거가 아니다. 우리는 보복의 정신이나 화를 쏟아냄으로 영혼에 상처를 입히기보다 수백 번 잘못된 대우를 당하는 편이 더 낫다.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분께서 도우실 수 있다. 그분께서 은혜와 하늘의 지혜를 주실 수 있다. 그대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받을 것이다. 그러자면 그대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 깨어라, 기도하라, 일하라. 이것이 우리의 경구가 되어야 한다.”(교회증언 2권, 426)

<부가설명> 성경은 마귀의 궤계가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용서할 때 사단에게 속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거함으로 자기의 속박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요압이 비록 용장이었지만, 자기의 지위 보전과 아우를 죽인 사람을 원수로 간주하여 기어이 복수하였다. 사단의 궤계에 빠졌다는 말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불쌍히 여기며 진정으로 용서하는 정신이다. 요압과 같은 상태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는 일은 무엇이든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그럴수록 우리는 공(公)과 사(私)를 구별해야 한다.

월요일 11월 15일 죄의 대가

비록 아브넬를 애도하며, 요압의 행동을 꾸짖었을지라도, 그 당시 다윗의 지위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하여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삼하 3:28~35 참조). 보복을 피하기 위해 요압은 가능한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스스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윗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옳은 일은 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양심에 꺼리는 일까지 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양심의 소리에 점차 둔감해져서 마침내 정말 중요한 일에 바로 설 수 없다.

죄는 또한 신뢰를 잃게 만든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여러 차례 이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아를 죽인 죄 때문에 다윗은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없었다. 장자가 누이를 강간하고(삼하 13장), 둘째 아들이 살인자가 되었을 때에도(삼하 13:23~ 39), 자신이 비슷한 죄인이었기에 다윗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1. 삼하 11:15~25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요압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됩니까?

[삼하11:15~2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18 요압이 보내어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고할새 19 그 사자에게 명하여 가로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고하기를 마친 후에 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저희가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윗짝을 그 위에 던지매 저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 사자가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의 모든 보낸 일을 고하여 23 가로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승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온 고로 우리가 저희를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신복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25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

답: 다윗의 명령이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오히려 우리아가 정상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중에 사망한 것처럼 꾸밈으로써 다윗과 공범이 되었다.

요압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스스로 아브넬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때문에 그는 의인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우리아를 암살하는 일에 동조하는 죄를 더했다. 삼하 11:7을 보면 우리아만 희생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들이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도록 몇 명의 군사를 이 무모한 작전에 함께 내보냈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로부터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과 함께, 실추된 신뢰성과 신실함의 부족이 가져온 결과는 여전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2. 요압은 위에서 다윗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삼하 18:5~15을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요압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시켰을까요?

[삼하18:5~1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6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심복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9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11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답: 요압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라면 왕의 명령도 무시하였고, 때로는 왕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따랐으나, 자신의 개인적 유익을 위해서는 왕의 엄명도 가볍게 여겼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성공은 곧, 자신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삼하 19:5~6). 요압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도 그런 유혹에 빠지기 얼마나 쉬운가!

가장 중요한 계산

“그대의 소망의 근거를 철저히 살펴보라. 그대 자신의 영혼을 진실 되게 다루라. 막연한 소망은 그대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 손실을 계산해 보았는가? 아마 계산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대가가 얼마가 될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라.”(증언보감 1권, 84)

<부가설명> 사람들은 계산하며 산다. 특별히 손익에 대하여 계산에 예민하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을 때만의 일이다. 죽으면 계산이 소용이 없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단정한다.(고전15:22)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런 계산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계산에 바쁜 것은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물론 아직도 육체의 생명이 있을 동안 그 생명을 유지하는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계산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계산은 영생의 생명을 얻는 것이 무엇인지 계산하는 것이다. 요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그 계산은 하지 못한 것 같다.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자기의 위치에 대한 계산에만 바빴던 것이다. 결국은 그 모든 계산이 헛된 것을 드러내었다. 우리는 어떤가?

교훈: 하나의 죄가 발전하면 죄에 대한 우리의 억제력이 약화되어 또 다른 죄에 노출되고, 결국 요압과 같이 양심이 둔화된다.

화요일 11월 16일 정치가 요압

사무엘하 13장은 압살롬이 그의 이복형제 암논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압살롬은 그 일로 나라를 떠나서 자신의 때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암논이 자신의 이복누이이자, 압살롬의 친누이인 다말을 강간한 것은 분명한 죄였다. 하지만 형제를 죽인 압살롬의 죄는 또 어떠한가? 자신의 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다윗은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장애가 있었던 것 같다. 압살롬은 누이가 당한 일을 보복하고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명예와 수치는 다윗 시대의 가치체계를 이루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였다.) 다윗의 장자 암논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권리는 압살롬에게 있었다. 다윗의 마음은 죽은 아들에 대한 애도와 압살롬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이 모든 불행이 어쩌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요압은 이 문제에 개입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윗 왕에게 직접 고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드고아의 한 지혜로운 여인을 이용하여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1. 삼하 14장을 읽으십시오.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어떻게 전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요압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됩니까?

[삼하14:1~33]을 여러분들이 읽기 바란다.

[삼하14:1~7,18~20]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주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니라 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5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두지 아니하겠나이다./18 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라 여인이 가로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 왕이 가로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여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 왕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무릇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하였고 저가 이 모든 말을 왕의 계집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변하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답: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요압이 그 여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일러주었다는 말은 그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의 신학은 옳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에 불과했다. 그는 용서 없는 보복의 삶을 이어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심지어 신앙마저도 정치와 성공의 수단에 불과했다. 요압은 압살롬의 가능성을 보고, 미래의 왕에게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못지않은 적수를 만났다. 압살롬을 복귀시키는 일에 주역이었던 요압은 그로부터 어떤 감사의 답례도 받지 못했다. 압살롬은 단지 그를 이용한 다음, 자신이 요압만큼 교활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재빨리 보여주었다. 그는 다윗과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요압을 압박하기 위해 그의 밭에 불을 질렀다(삼하 14:28~33). 압살롬에게는 요압의 개입이 고마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내전 상황으로 발전하게 될 무시무시한 반역의 무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때가 올 것임

“아무리 그대 생각에 비밀로 여겨져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대들의 모든 행위는 그대들의 하늘 아버지께 공개되어 있다. 아무것도 숨겨지거나 가려지지 않는다. 그대들의 모든 행위와 그것들을 촉발시킨 그대들의 동기는 그분의 눈앞에 공개되어 있다. 그분은 그대의 모든 말과 생각을 온전하게 아신다. 그대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다.”(증언보감 3권, 82)

<부가설명> 요압은 처신이 아주 정치적이었다. 자기의 말과 행동을 자기의 처신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나는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문득 알게 되었다. 바로 요압과 같이 처신하는 것이 정치적 처신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정로를 걸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조금은 정치적이 되는 것 같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서야하는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치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즉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보다 더 유리한 처신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언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당히 나아갈 수 있도록(엡3:12)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를 구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큰 재앙의 불씨를 키우기 마련이다.

수요일 11월 17일 칼에 의지하여 살아감

1. 삼하 20장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요압은 어떤 인물입니까? 요압의 거역은 어떻게 정당화 되었습니까?

[삼하20:1~26]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3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 있으라 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가더니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7 요압을 좇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8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매었는데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11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곁에 서서 가로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할 때에 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굴어졌는지라 그 소년이 모든 백성의 섰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 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3 아마사를 큰 길에서 옮겨 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아가니라 14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15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16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18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20 요압이 대답하여 가로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저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하고 22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23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24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25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26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

답: 다윗이 반란에 가담했던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우려하자, 요압이 그를 직접 제거하였다.

아마사와 요압은 사촌지간이었다(삼하 17:25).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다. 요압이 다윗의 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뒤에(삼하 18:5, 14) 다윗은 요압을 제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마사에게 군 최고 지휘관을 약속하였다(삼하 19:13). 여기에는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요압에 대한 문책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의도는 단지 요압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사를 임명한 것은 압살롬 편에 가담했던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 화해의 표시였다.

2. 삼하 20:1~2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 상황은 어땠습니까?

[삼하20:1,2]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답: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지파간의 연합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다윗은 요압을 무시하고 아마사에게 군대장관직을 약속했다. 그리고 군대를 소집하여 새로운 반역을 처리하도록 그를 보냈다. 아마사가 정한 시간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자, 다윗은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명을 내렸다. 이 위기의 때에 다윗은 요압보다 그를 더 신뢰하였다. 마침내 요압과 아마사가 만났다. 요압은 아브넬을 암살했던 방식으로 아마사를 죽였다. 성경 기자는 그 공격이 순식간에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다(삼하 20:8~10). 요압은 자신이 배제되고 더 이상 첫째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매정하게 사촌을 살해했다.

요압의 부하 중 하나가 요압과 다윗 왕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으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백성들은 요압에 대한 충성이 곧 다윗 왕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고, 아마사 사건에서와 같이 재판관과 배심원과 집행자로서의 요압의 권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왕의 마음은 이미 요압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잃는 것 같지만 얻는 것

“원수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誣告)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이다. 마음의 겸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는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다.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산상보훈 17)

<부가설명> 사람이 자기 지위와 명예에 집착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지위와 명예의 노예가 된다. 그것이 시키는 일을 대담하게 수행한다. 요압이 바로 그런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 세상의 지위와 명예를 가져보았자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 것인가. 소망이 세상에만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사람에게 세상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비록 교회 안에서 교회 사업을 할 때도 자기 지위와 명예를 생각한다면 요압과 같은 함정에 빠질 것은 빤한 일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것에 집착하지 말자. 영원히 있을 것을 중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위하여 궁리하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교훈: 자신의 입지와 성공을 위해 친족마저 살해했던 요압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의 연쇄반응이 멈추도록 주님께 회개하며 악행을 근절해야 한다.

목요일 11월 18일 요압의 최후

시기가 아주 적절해 보였다. 다윗은 이제 나이가 많아 밤에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다윗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선발되었다. 성경 기자는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음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무기력함을 내비쳤다(왕상 1:1~4). 다윗은 젊은 아비삭과 상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상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남은 아들 가운데 장자였던 아도니야는 자신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 왕상 1장을 읽으십시오. 요압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압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왕상1:1~53] 공부하는 분들이 찾아 읽으세요.

[왕상1: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답: 요압은 다윗 이후의 왕권을 수립하는 일에 공을 세움으로써 임의로 휘둘렀던 자기 나름의 권력을 계속 이어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도니야와의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그의 정치적 입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왕상 1:7은 요압이 이 모의를 주동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윗 왕에게 이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요압은 이전처럼 앞장서서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그는 솔로몬을 자신의 섭정왕으로 선포함으로써 요압과 아도니야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요압은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분으로 여겼다. 요압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책임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같지 않았다. 그분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보응은 즉각적이지 않을지라도 이생이든 최후의 심판 때이든 언젠가 임한다. 그러나 종종 인생 말년에 고달픈 시간을 보내면서 심은 대로 거두는 사람들도 있다(갈 6:7).

물론 최후의 심판 때에도 자비가 있다. 요압은 아도니야의 모의에 대하여 처벌받지 않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반성과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결국 2차 모의에 가담하였다. 이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요압은 마침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전으로 피해 제단 뿔을 붙잡았다. 그는 제단이 오직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만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출 21:14). 회개하지 않았던 과거의 인생이 마침내 그를 삼켰다. 칼에 의지하여 살던 자가 마침내 칼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왕상 2:28~ 35).

얻는 것 같지만 잃는 것

“사욕을 좇아 허비한 삶은 먹어 버린 곡식과 같다. 그것은 사라지지만 증가됨이 없다.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을 위해 살고 생각하고, 계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이 끝나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자기 욕심의 법칙은 자멸의 법칙이다.”(시대의 소망, 624)

<부가설명> 요압은 가능하면 자기의 처지를 반전시켜보려고 했다. 아마도 아도니야에게 아비삭을 구하게 한 것이 요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비아달 제사장도 그 일에 한 몫을 담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차 반역을 시도한 것이다. 처음에 솔로몬이 너그럽게 대한 것을 기화로 재차 왕위를 차지할 것을 모의한 것 같다. 거듭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었을 때 솔로몬은 그들을 제거하였다. 인생도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영원히 제거된다. 우리는 과오를 거듭거듭 범하지 않도록 순간마다 주님께 마음을 드리고 굴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사시면 그렇게 될 것이다.

교훈: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주어진 자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스스로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금요일 11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진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붙들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리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진리 안에 있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의 생애와 품성은 진리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는 특별한 일들, 즉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영광의 왕국에 속한 천사들과 교제할 수 있는 도덕적 적합성을 준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붙드는 진리는 하늘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 마음에 자리를 잡을 때, 진리는 개선과 순결의 사역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결코 사람을 거칠고 무례하게 만들거나, 부주의하거나 강퍅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아온, 하늘에 기원을 둔 진리는 사람을 고상하고 거룩하게 만들며,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정이 많고, 순결하게 만든다. 그것은 강퍅한 마음과 이기심,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우리를 자존심과 세속적 야망으로부터 깨끗하게 만든다.”(엘렌 G. 화잇 언급, 싸인즈 오브 타임즈, 1878. 5. 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는 가족과 직장 그리고 국가에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충성심을 표시해야 합니까? 이런 중요한 관계에도 어떤 한계가 있습니까?

*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지 않는 한 애정과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할 때는 단연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한다.

2. 위에 있는 엘렌 G. 화잇의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진리가 그대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의 삶을 통해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신앙에 관하여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솔직해질 필요도 있습니다(고후 13:5).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사상이 되고 정신이 된 것이 진리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며 진리의 사랑을 받는 상태이다.(살후2:10) 성경 정신이 우리 생각이 되어 있는지 날마다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3. “나는 명령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악이 자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명령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더라도, 때로는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계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1번에서 말한 것처럼 상부의 명령이나 가족 사이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과 충돌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비나 어미나 형제자매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마10:37)

4. 우리가 입은 피해를 잊고 용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합니까? 이번 주 교과에서 용서에 대하여 어떤 진리를 배웠습니까? 용서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당신이 친히 죽임을 당하셨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피해를 예수 안에 묻어버리고 용서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사단의 궤계에 빠진 것임을 기억하자.

5. 백만장자 존 D. 록펠러는 경쟁사를 인수하기 위해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험부담을 안고 사업을 인수했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그 회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삼켜버린 것입니다. 부도덕한 행위를 쉽게 정당화하는 이런 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확인해야 한다. 마음에 감춘 사특한 계획은 하나님이 아신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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