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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일 안식일

일몰오후 713

 

연구 범위

17:3, 요일 2:3~6, 23:27~28, 살후 2:9~12, 고전 12:4~7.

 

기억절 :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119:159~160)

 

목회 초창기에 나는 테네시 주 시골 마을에서 한 가족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몸집이 큰 한 남자가 큰 시가 담배를 물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께서 자신의 폐암을 치유하셨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종종 떠올린다. 그 남자는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자신을 치유하셨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자신이 치유를 받았다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일까? 표적과 이적은 언제나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일까? 우리가 믿음을 단지 표적과 이적 위에 두어도 좋은가?

부흥의 관점에서 우리는 마귀도 종교적 흥분을 조장하고 참 부흥에서 발생하는 감동을 줄 수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참 부흥의 영적 표식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그것들을 거짓 부흥의 표적과 비교해 보려고 한다. 그 둘의 차이점을 알면 우리는 원수의 속임수로부터 안전할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구별하되, 참 부흥이 형식주의와 광신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즐겨 순종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느끼기 :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기를 소망하며 삶 속에서 참 부흥을 경험한다.

행하기 : 하나님이 오순절 능력으로 영적 은사를 위임하실 수 있도록 경건한 삶을 통해 그분을 지극히 공경한다.

 

A.

진정한 부흥과 거짓 부흥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진정한 부흥은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거짓 부흥은 감정을 따르고 이적을 따르면서 분명한 말씀을 거부하는 형태가 된다.

우리가 형식주의나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록된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를 전적으로 따르며 진리를 옳게 분변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한다.

참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 그대는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계를 발전시키겠습니까?

기록된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도록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삶을 살게 해주시기를 간구할 것이다.

 

B.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는 어떤 관계입니까?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사람됨, 곧 인격이고, 은사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주신 방법에 대한 것이다.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중 한쪽만 강조하는 부흥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부흥이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어떤 사역과 헌신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까?

예수님을 올바르게 닮기를 바란다.

 

결론 : 하나님은 지상 사업을 마치기 위하여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오순절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기를 고대하십니다. 우리가 경건한 삶으로 그분께 영광 돌리기를 소망하여, 성령의 강력한 부어 주심을 간구할 때, 대망의 부흥은 이를 것입니다.

 

 

첫째날() 하나님의 뜻과 말씀

818

 

모든 진실한 영성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17:3, 10:7). 말씀에 순종하려는 결심보다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부흥은 표적(標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성령은 절대 말씀이 인도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딤후 3:15~16).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참 부흥의 바탕이자 중심이다.

 

1. 다음 시편 119편의 말씀은 부흥과 말씀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계발시키는 모든 영적 자질을 열거해 보라(119:25, 28, 49, 50, 67, 81, 105, 116, 130, 154). 주님과 만나는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러한 약속들은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119:25,28,49,50]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28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119:67,81,105]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16,130,154]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소성, 세움, 소망, 위로, 길의 빛, 깨닫게 함, 살게 함, 이런 약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생활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생명의 떡설교에서 예수님은 부흥의 본질과 영적 생애의 바탕을 설명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예수님의 진술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은 모든 영적 부흥의 원천이시다. 그분은 믿음으로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신다. 부흥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감동시키실 때에 일어난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과거 반세기 동안에 일어난 대부분의 신앙 부흥에서 다소간 동일한 감화가 작용해 왔으며 그것은 장래에 더욱 광범위한 운동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거기에는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에 적합한, 진리와 허위가 혼합된 감정적 흥분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속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면 그런 운동의 내용을 분별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무릇 사람이 성경의 증거를 등한히 하고, 극기와 세속의 포기를 요구하는 단순하면서도 영혼을 시험하는 진리에서 돌아서는 곳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다고 확신해도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464).

참 부흥의 본질은 말씀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생애를 사셨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분은 성령에 이끌리셨고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입으셨다.

 

교훈 : 참 부흥은 영적 흥분이나 체험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실 때 일어난다.

 

 

둘째날()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

819

 

부흥이란 결국 예수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영적 능력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그것은 구주와 함께하는 개인적이면서 중대한 경험이다. 예수님을 친구로 아는 것이 모든 부흥의 핵심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나누는 깊이 있고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에베소 신자들을 위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3:18~19) 기도하였다.

이는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 경건과 신앙의 모양은 있지만 예수님과의 내면적 경험은 부족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와 대조된다. 그들의 심각한 부족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25:12)고 하셨다.

하나님을 알면 언제나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사랑을 계시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열망도 커진다. 순종은 사랑의 열매이다. 그분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그분께 더욱 순종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고의로 하나님의 법을 범했던 때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 부흥은 수상한 부흥이다. 신앙적 열의는 일시적인 종교적 도취를 고무시킬지는 모르나 지속적인 영적 변화는 결여될 것이다.

 

1.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증거가 무엇이라고 했는가?(요일 2:3~6, 4:7~8, 20~21)

[요일2:3~6]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4:7,8,20,2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형제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 말씀 속에서 요한은 두 가지 핵심을 지적하였다. 첫째, 하나님을 알면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면 서로를 사랑한다. 요한의 요점은 분명하다. 진정한 영성의 결과는 변화된 삶이다.

부흥의 핵심은 예수님과 가까워진 것 같은 따뜻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기쁨으로 가득 찬 변화된 인생이다. 하나님이 모든 부흥에서 추구하는 최대의 목적은 우리를 그분께로 이끌어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목적에 우리가 더 깊이 굴복하게 함으로써 증거와 봉사를 위해 우리를 내보내시는 것이다.

 

<부가설명> 원칙을 실천하는 것과 감정적 충족의 관계는 참 묘하다. 감정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만족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충족된 감정이 바로 원칙을 실천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주로 오관과 관련되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그것이다. 눈의 욕구를 채우면 충족감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원칙을 실천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요즘 한국에는 몰래 카메라 사건이 많다. 시각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범죄행위이다. 청각, 미각, 후각, 촉각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 반드시 감정의 충족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감정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일 때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원칙은 성경말씀이 계시한 사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15:38,39) 이것은 옷을 입는 데만 적용할 원칙 이상이다. 우리는 감정의 충족이 아니라 계시하신 말씀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부흥이다.

 

교훈 : 부흥이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셋째날() 형식주의, 광신주의 그리고 믿음

820

 

진정한 부흥의 도전 가운데 하나는 얼음처럼 냉담한 형식주의의 표면을 깨고 한편으로 광신주의의 맹렬한 불꽃을 피하는 것이다. 형식주의는 융통성 없는 현상 유지의 덫에 매여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의 실체는 부인하면서 종교의 겉껍질에 만족하려 한다. 광신주의는 극단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신앙의 정로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신앙의 한 면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무시하여 균형을 잃기 쉽다. 광신주의는 종종 자기는 의롭게 여기고 남은 정죄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4:14) 되기를 바랐다.

 

1.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에서 냉담한 형식주의에 관하여 알아야 할 사실은 무엇인가?(23:27~28, 11:39~40, 7:5~9).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11:39,40]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7:5~9]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 외형은 잘 가꾸지만 속은 전혀 사랑의 성품이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이 없는 상태에 대하여 책망하셨다.

 

2.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임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던 자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사실은 무엇인가?(7:21~23)

[7:21~23]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표적과 기사가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두 말씀의 핵심 문제는 마음의 헌신이었다. 표적과 기사는 진정한 성경적 신앙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것들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 진정한 부흥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깊은 믿음이다. 요한의 말에서 성경에 기초한 부흥의 의미가 메아리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어떤 신앙이 세상을 이기겠는가? 그리스도를 그대 개인의 구주로 삼는 그러한 믿음이며,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하기에 절대적으로 무능하며 속절없음을 깨닫고 구원하기에 능하신 조력자를 그대의 유일한 희망으로 붙잡는 그러한 믿음이다”(Reflecting Christ, 21).

 

교훈 : 진정한 부흥은 냉담한 형식주의, 극단적인 광신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부흥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깊은 믿음이다.

 

 

넷째날() 사역과 기적

821

 

거짓 부흥은 흔히 기적을 크게 강조한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거짓 부흥은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강조하나, 참 부흥은 가장 큰 기적이 바로 변화된 인생이라고 여긴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들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우리의 자비하신 구속주이신 구주께서는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그보다 치유의 은혜로 접촉하신 모든 이의 구원에 관심이 더 많았다.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의 목적은 잃어버린 인류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19:10)었다.

예수님은 한 중풍병자에 대하여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9:6)고 선언하셨으며, 기적을 목격한 군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9:8).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의 한 결과였을 뿐, 그분이 지구에 오신 핵심 목적은 아니었다.

 

1. 다음의 말씀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미혹 당하는가?(살후 2:9~12, 24:11~13, 24, 19:20)

[살후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24:11~13,2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서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에 미혹을 당한다.

 

그들이 거짓 기적에 미혹되는 이유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않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것에 대한 욕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보다 훨씬 중요하게 될 때, 우리의 지성은 기만술에 노출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16:31).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따르는 신앙을 절대 대신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우선이고, 만약 일어난다면 표적과 기사는 그다음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적을 많이 행하셨다. 공관복음에서 그것은 권능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이적을 나타내는 말이 신약성경에 세 가지가 있다. 권능(權能), 표적(表蹟), 기사(奇事)이다. 권능은 원로 두나미스인데, dynamite의 어근이다. 표적은 세메이온인데 이것은 sign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기사는 테라스인데, wonders이다. 즉 놀라운 일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인데, 권능은 그 이적의 근원에 대한 표현이로, 표적은 그 이적을 행하는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을 기사라고 한 것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은 사도들이나 또는 거짓 이적을 행하는 마귀의 행사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행할 수 없는 놀라운 일아는 뜻이다. 마귀가 행하는 것은 표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기사이다. 그가 예수님을 흉내 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귀가 행하는 이적에도 이 세 낱말을 다 사용하였다.(살후2:9)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적을 주의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 이유는 행동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이적은 이적 자체를 탐하는 모습인데 그것은 이기심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이적이 행해진다고 해도 그것이 기록한 말씀과 그 말씀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분명히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교훈 : 참 부흥은 삶의 변화와 봉사 그리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을 강조하는 반면 거짓 부흥은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크게 강조한다.

 

 

다섯째날() 열매와 은사

8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1. 하나님이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고전 12:4~7, 12:4~8, 4:11~16)

[고전12:4~7]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12:4~8]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4:11~1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교회와 교인을 유익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두 개의 큰 영역으로 나뉜다. 어떤 은사는 자질인 반면 어떤 은사는 부르심이. 예를 들면 섬김, 긍휼, 위로, 가르침의 은사는 하나님이 각 신자들에게 부여하신 자질이다(12:6~8). 그러나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와 교사의 은사는 부르심이다(4:11~12). 두 영역 모두 비슷한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 성령은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강화시키고 교회를 선교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이 은사들을 부여하신다. 영적 은사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2. 5:16에서 성령으로 행하라는 바울의 표현은 어떤 의미인가? 5:22~25을 읽고 성령으로 행한 결과 얻어진 열매들을 열거하라(15:1~7 참고).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22~2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15:1~7]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성령으로 행하라는 말은 기록된 말씀을 따라 생활하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행할 때 열리는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에는 관심이 없고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는 데 집착하는 부흥은 위험하다. 만약 하나님이 성령의 열매가 없는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주신다면, 교회는 이기적인 과시(誇示)주의의 무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영적인 전선은 해어졌는데 하늘의 전원을 켜는 것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변화된 품성보다 성령의 은사와 권능에 집중하는 움직임을 조심해야 한다.

 

<부가설명> 성령으로 행하라는 말은 문장상으로 어렵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기록하였다. 좇아라는 말은 따라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성령을 따라가라는 뜻인데, 성령은 오직 성경말씀과 성경의 사상으로 사람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6:63) 우리는 성경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열심히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면 호흡마다, 걸음마다 말씀의 인도로 성령의 주장을 받을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몇 개냐고 물으면 대부분 아홉 개라고 대답한다. 그것을 바른 대답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 개다. 아홉 개는 성령의 열매의 맛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성품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생명이 된 사람이 나타내는 성질이다. 우리 성질은 어떤가? 속된 말로 개떡 같은 성질인가? 아니면 사랑이 넘치는 성질인가. 성품이라는 말은 성질의 품질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질을 극상품 성질이다. 그리스도인은 다 이 극상품 성질이 되어야 한다.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 중에 나의 성질은 어느 품질일까?

 

교훈 :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은사와 열매로 나타나는데, 열매보다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의 부흥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섯째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23

 

성령의 약속이 느껴져야 할 만큼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고 있다. 이 약속이 마땅히 성취되어야 할 만큼 성취되지 않고 있다. 복음 사업이 그처럼 무력한 이유는 성령의 임재가 없기 때문이다. 학식과 달란트와 웅변과 선천적 또는 후천적 재능을 다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한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없고 단 한 명의 죄인도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없다. 반면에 만일 저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의 선물을 갖게 된다면 아무리 가련하고 무식한 제자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이 우주에서 최고의 감화를 끼치는 통로가 되게 하실 것이다”(실물교훈, 328).

 

사도의 열렬한 호소는 결실이 없지 않았다. 성령께서 강한 능력으로 역사하셨으므로 이상한 길에서 방황하던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한 그들의 이전 신앙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하게 하신 그 자유에 확고부동하였다. 그들의 생애에는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이름은 영화롭게 되고 그 지방 각 곳에서 신자의 수효가 많이 증가하였다”(사도행적, 38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냉담한 형식주의와 통제되지 않은 광신주의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항상 정반대입니까? 교회가 동시에 광신적이고 냉랭하게 형식적일 수는 없습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한쪽의 극단이 또는 양쪽이 부흥과 개혁에 해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의 교회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대의 교회는 그 둘 사이에 어디쯤 서 있을까요? 그대는 어떻게 교회가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광신적이면서 동시에 냉랭한 형식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같은 광신적인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성질은 자기중심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 중심으로 성장해야 한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고 하지 않았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짓 부흥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그분이 부흥을 일으키신다고 믿는 것은 잘못일까요?

거짓 부흥은 예수 이름으로 행하지만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고 심지어는 무시하면서 보이는 숫자의 부흥과 나타나는 이적을 드러내며 선전하는 그런 모습이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부흥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사랑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그래서 말세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성령과 만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아니면 다른 데에서 왔는지 알 수 있도록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까요? 대쟁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기적의 배후를 분별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말하여 깨우쳐주어야 한다. 성경말씀과 사상에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이 책 처음에 쓴 말처럼 패암을 이적으로 치료해주셨다고 하면서 패암의 원인 중 하나인 시가를 계속 피우는 것은 성령의 역사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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