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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과 하나님의 법

 

96일 안식일

일몰오후 654

 

기억절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연구 범위 : 5:17~19, 5:21~44, 7:9~13, 19:16~22.

 

비록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율법을 지극히 높이기는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그 목적을 오해하여 율법에 순종하면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바울이 썼던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10:3).

그래서 예수님은 종종 장로들의 전통을 불허하거나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던 것이다(7:1~13). 그들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비난하며 그분에게 맞섰던 이유는 오해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행습을 터놓고 비판하셨을지라도 예수님은 십계명을 높이고 그 영속성을 확증하며 율법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다(5:17). 그분의 죽음은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법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계시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율법의 영속적인 속성에 구원의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이해한다.

느끼기 :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은 한결같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행하기 : 오직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망을 부어주시는 그리스도를 매일 마음속에 영접한다.

 

A.

그대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율법을 폐하지 않고 더 완전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참 내용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오신 것은 율법의 내용을 꽉 채우고 이루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교회를 위한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경우는 무엇입니까?

교회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성경의 지시를 편의대로 해석할 때일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 외에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각각 이야기해보세요.

 

B.

작은 법규를 어기는 예와 법을 왜곡시켜 잘못을 합법화시키는 예를 들어 보십시오.

안식일에 도르가회 판매 문제는 어떨까요?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는 오해를 받으셨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장로들의 유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정말 반대하셨던 것은 무엇이고 정말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형식으로만 율법을 준수하고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것에 대하여 교정하려고 하셨다.

우리가 율법의 본질을 알 때 버려야 하는 율법주의적인 신앙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는 것과 율법은 십자가에서 폐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결론 : 변함없는 하나님의 법은 안전 또는 안정성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공급하는 것과의 조화로운 삶을 촉진시킵니다.

 

 

첫째날() 예수님은 율법을 바꾸지 않으셨다

831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

 

1. 마태복음 5:17~19에 따르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와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심. 예수님은 율법을 존중하셨다.

 

율법이란 말은 종종 성경의 첫 다섯 책(토라 또는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이 경우에 예수님은 주로 십계명을 언급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문자적으로 십계명을 무효화시키러 온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진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의도는 율법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전통으로 그 효과를 감소시키는 자가 그분이 아니라 유대교 장로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15:3, 6 참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더 심오한 의미에서 율법을 준수하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모본을 제시하셨다(8:3~4).

 

2. 7:38을 읽어 보라. 시내산에서 모세와 말하며 율법을 전해 준 천사는 누구인가?(63:9, 고전 10:4 참고) 왜 이 사실이 중요한가?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 그 천사는 출19:4~20:18까지 기록을 살피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로 호칭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친히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을 소중히 취급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친히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은 율법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복음서에서 보듯이 율법의 시여자가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친히 율법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서는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다는 어떤 암시도 찾기 어렵다. 오히려 그분의 말씀과 모본은 그와 반대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부가설명> 5:17~19에 율법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하셨다는 데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십계명만 한정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유는 예수님 당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면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좀 더 세밀하게 이야기하면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이라고 하였다. 그럴지라도 이 말씀이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구절 다음에 예수께서 하나씩 설명하는 과정에서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완전케 하러 왔다는 말은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 완전케 하기 전에는 불완전했느냐는 의문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완전이라고 한 단어는 헬라어로 프렐로(프렐로사이)인데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만 그 내용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오시지 않으셨으면 율법과 선지자는 내용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집을 아무리 완전하게 지어놓을지라도 그 집에 사람이 들어와 살지 않으면 그 집은 충만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로 비유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내용이시다.

 

교훈 :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목적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율법을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날() 율법의 의미를 심화시키셨다

91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1~22).

 

십계명의 항구성을 확립하신 후에 이어지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드셨다. 백성들이 이 명령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 줄 필요성을 절감하셨다.

 

1.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언급한 율법의 각 측면에 대하여 어떤 차이점을 드러냈는가? 그분은 각각의 경우에 어떤 권위에 호소하셨는가?(5:21~44)

[5:21~44]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 너머에 있는 진실한 율법의 참 뜻을 풀어주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경우에 예수님은 먼저 구약의 성경절을 인용하셨다(20:13~14, 5:17~18, 21:24, 24:20, 19:21). 그런 다음 그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펼치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신뢰하지 않으셨던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편협하게 형식화시켜 놓은 것들을 확장시켜 설명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율법의 참의미와 대조하셨을 뿐이다.

랍비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권위로서 그들의 전통을 언급하였다. 반대로 예수님은 율법의 시여자로서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여섯 번 등장한다. 주님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당당하게 그와 같은 주장을 펼칠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요구는 율법의 단순한 형식을 급진적으로 초월하였다. 그분의 가르침은 율법의 문자 이면에 있는 정신까지 포함했다. 그러한 정신은 단순한 형식주의가 될 수 있는 것들에 의미와 생명을 부여한다. 율법이 은혜로 얻는 구원을 설명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율법 준수 그 자체로는 죽음 외의 다른 결과에 이를 수 없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율법을 설명하신 사실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바른 방법을 제시하셨다.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의미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나 또는 증언을 읽을 때에 문자에 매이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영적 의미를 깨닫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 새번역) 살인하지 말라고 한 계명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문자의 뜻이다. 그러 그 문자는 사람을 미워해도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한 것이다. 문자만 읽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율법을 지킨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은 미워하는 것도 죽이는 것과 같다고 가르친다. 도덕적 사고방식에 매이면 나타난 행위가 판단의 기준이 되기 쉽다. 그러나 생명의 복음을 깨달으면 판단의 기준이 마음의 자세가 된다. 우리는 율법의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깨달아야 한다.(23:23)

 

교훈 : 예수님은 율법을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편협한 이해와 형식주의에 반대하셨으며 오히려 율법의 의미를 더 심화시키셨다.

 

 

셋째날() 예수님과 일곱째 계명

9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

 

1. 5:27~28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의미를 어떻게 확장시키셨는가? 29~30절에서 그분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27~30]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나타난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에 숨은 욕망과 동기까지도 계명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런 욕망과 동기를 내어버리기를 수족을 절단하는 결단으로 단행하라고 하셨다.

 

위의 성경절에서 예수님은 일곱째와 열째 계명을 언급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간음을 오직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신체적으로 저지르는 성적 행위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열째 계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간음에는 음란한 생각과 욕망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29~30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비유의 언어를 사용하신다. 물론 어떤 사람은 영생과 그리스도를 잃느니 불구로 사는 것이 낫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다른 교훈과 모순되는 방향에서 불구를 말씀하셨다기보다는(19:27~28, 21:17~20 참고) 생각과 충동에 대한 통제력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눈을 뽑고 손을 절단하라는 언급에서 그분은 죄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단호한 결심과 행동의 중요성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2. 19:3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했는가? 왜 그것은 교활한 질문이었는가?(7절 참고)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19:4~9 참고, 5:31~32과 비교)

[19:3~9]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이혼하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아니라고 하면 모세의 교훈을 무시한다고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의 원래 뜻을 증거하셨다.

 

5:3119:7은 모두 신 24:1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는 두 개의 랍비 학파가 있었다. 힐렐파는 이 말씀을 다양한 이유에 의해 이혼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반면 샴마이파는 오직 명백한 간음만이 이혼 사유에 해당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쪽 아니면 저쪽 한편을 선택하도록 덫을 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초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6)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왜 하나님은 아내에게서 어떤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면 남편이 이혼 증서를 써 주도록 허락하셨는지 물었다(24:1). 예수님은 결혼의 거룩함과 영속성을 지지함으로 이 말씀에 대한 남용을 바로잡으셨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혼의 유일한 사유는 성적 부도덕또는 간음’{그리스어로 포르네이아는 문자적으로 무절조(無節操)’}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명의 도(7:38)라고 하였다. 생명의 도는 생명이 나타나는 방법이다. 이것을 도덕적 계명으로 보면 사람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생명의 도라면 사람이 그것을 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생활하는 모습이 된다. 소는 육식을 못한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 된 사람은 간음 이혼 이런 것들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것을 지적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창조 때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면서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가 들어와서 그런 성질이 생긴 것인데, 성경을 배우고 따르는 것은 창조 당시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결국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을 믿는 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간음의 의미를 육체적 차원에서 생각의 차원으로 범위를 확대하셨으며 이혼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으셨다.

 

 

넷째날() 예수님과 다섯째 계명

93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15:5~6).

 

한번은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마주치자(15:1~20, 7:1~13) 그들은 모세의 법에 있는 내용이 아닌 장로들의 한 전통에 관하여 그분께 질문하였다.

그 전통은 식사 전에 의식적으로 손을 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전통대로 행하기를 게을리했다. 예수님은 즉시 다섯째 계명을 무효화시키는 바리새인의 다른 전통을 인용하면서 대답하셨다.

그리스도의 논증을 분석하기 전에 우리는 선물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유래한 고르반이라고 불리는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어떤 것에 대하여 그것은 고르반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과 성전에 바쳐졌다는 맹세로 간주되었다.

 

1. 7:9~13을 읽어 보라. 바리새인의 그 전통은 어떤 식으로 다섯째 계명을 범하는 교묘한 방법이 되었는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일의 중요성과 그분께 드리는 서원의 신성함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23:15, 34:20, 23:21~23).

[7:9~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23: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34:20]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23:21~23]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22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23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 입으로 하는 맹세로 부모에게 드릴 것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유전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법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릴 것을 엄격히 하나님께 드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당연히 하라고 가르치셨다.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거부할 완벽한 핑계거리를 찾았던 것 같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있는 확고한 원칙을 확대 해석해서 사람의 계명으로 변질시켰고, 지도자들의 사고 속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하였다.

예수님이 그 같은 문제를 다루셔야 했던 것은 그때만이 아니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11:42). 그들은 하나님께 바칠 것을 미루지 않으면서 동시에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두 명령을 지켜야 했다.

예수님은 칠백 년 전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남긴 말씀을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면서 그분의 논증을 마무리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15:8~9).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십계명을 높이시고 자신의 입장과 바리새인의 입장을 비교하셨다.

 

<부가설명> 구약의 교훈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연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위기 19:3에는 안식일과 부모 공경이 연결되어 있다. “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부모를 경외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분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부모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이치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창조주를 경배하는 표로서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효도와 여호와 하나님 경배는 대상은 다르지만 정신은 같은 것이다. 존재하게 하고 존속하게 하는 분에 대한 감사와 공경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부모님은 덜 공경해도 된다는 교묘한 논리를 만들어서 자기 욕심을

 

교훈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과 전통으로 바꾸고 그것을 핑계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잘못을 범했다.

 

 

다섯째날() 예수님과 율법의 본질

9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9:17).

 

1. 19:16~22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에서 우리는 율법과 율법의 준수에 대하여 어떤 폭넓고 중요한 진리를 끄집어내야 하는가?

[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 계명의 조문을 충실히 이행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못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생명은 오직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기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는 정신이 있는 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계명을 생활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부자 청년은 아무리 율법을 엄격하게 따른다고 할지라도 구원이 그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구원은 율법을 주신 구주에게서 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는 이 진리를 알고 있었으나 후에 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처음부터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지 제시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전적인 굴복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하나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순종만이 가납된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지이다. 자주 이것은 권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로 제시되고 명령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마음에 품을 경우 사람을 송두리째 타락시키게 될 그런 것들을 잘라 버리는 길 외에는 사람을 구원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523).

한번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었다. 예수님이 탄식하면서 내놓으신 답변은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범하고 있다고 해석할 만한 것을 말하도록 끌어들일 최후의 흉계를 꾸미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예수님께 물을 율법학자 한 명을 선택하였다(22:35~40).

그 율법학자의 질문은 모든 계명을 중요도에 따라 순번을 매기려는 랍비들의 시도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두 계명이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면, 더 중요하게 간주되는 계명이 우선시되고 덜 중요한 계명은 쉽게 어길 수 있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의 처음 네 조항을 높이며 다른 여섯 조항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결과 실천적인 신앙 문제에 관하여 그들은 실패하였다. 예수님은 능숙한 방식으로 답하셨다.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불가능할 뿐더러 쓸모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십계명의 모든 조항 속에 표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조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의 율법, 특히 십계명의 본질을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자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라고 말이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표현은 옳은 표현이다. 그래도 성경이 말하는 율법의 본질은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성경은 율법을 생명의 도”(7:38)라고 한 것이다. 이 율법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벧전1:3) 그 부활의 생명이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기차가 레일 위를 달려야 하듯이 부활의 생명은 생명의 도를 달려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이 사실을 암시적으로 지적하신 것이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구제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를 때에만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넌지시 가르치신 것이다. 삭개오는 그렇게 했는데 이 청년은 자기가 율법을 어려부터 지킨 사실에 의하여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였다. 자기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스라엘의 율법 준수 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다.(10:1~4)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 영생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지 자주 자신을 시험하고 확정해야 할 것이다.(고후13:5)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요일3:14)

 

교훈 : 율법에 대한 순종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구원의 조건으로 보았던 바리새인과 달리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밝히셨다.

 

 

여섯째날()

95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산상보훈>, 45~78 “율법의 신성성”, <시대의 소망>, 307~314 “산상수훈”, 606~609 “논쟁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본을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이사야 4221)는 것이었다. 율법의 거룩한 특성을 보여 주고, 그 광범위한 영향력을 제시하며, 그 영원한 의무를 명확히 밝혀 주셔야 했다.

아버지의 본체의 분명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극기의 구속주이신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랑의 순례자로 지내시는 동안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을 생생하게 나타내셨다. 하늘에서 난 사랑, 곧 그리스도 같은 원칙이 영원히 공정한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산상보훈, 48~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우리는 율법을 지키려다가 어떻게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율법에 순종하는 일을 면하게 해주셨다고 추측할 때 어떤 위험이 존재합니까? 이 시대에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열거해 보십시오.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중요한 조건으로 믿는다면 바리새인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율법의 순종을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율법을 율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율법의 본질이 부활의 생명의 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알다시피 십계명의 지속적인 유효성에 반대하는 주장들은 제칠일 안식일의 문제를 모면하려는 획책에 불과합니다. 복음서에서 안식일에 일어난 모든 치유의 기사를 살펴보십시오. 그런 기사들은 하나님의 율법뿐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어떻게 확증하고 있습니까? 안식일을 부인하려는 자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과 모본을 꼭 확인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안식일에 치유 봉사를 한 것은 안식일은 생명을 회복하는 날인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봉사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이 생명의 도라는 것을 증거하셨다. 안식일을 부인하려는 자들은 틈만 있으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이용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경우에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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