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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일 안식일

일몰오후 542

 

기억절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연구 범위 : 1:23~24, 19:16~22, 6:27~38, 8:2~4, 12:9~18, 벧후 1:4.

 

위대한 블롱댕(Blondin)”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장 프랑수아 그라벨(Jean Francois Gravelet)은 밧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것으로 유명하다. 18609월 웨일즈의 왕자는 블롱댕이 뒤에 보조를 받으며 폭포를 건너는 것을 목격했다. 폭포를 건너간 뒤에 블롱댕은 영국 왕자에게 돌아와서 그도 폭포를 건너도록 돕겠다고 제안했다.

왕자는 비록 그 사람의 재주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고 방금 그것을 눈으로 목격했지만 블롱댕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요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복음의 진리, 재림에 대해 확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확신에도 우리는 우리를 그분의 손에 온전하게 맡길 준비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확신은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는 야고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정확한 이유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에게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진정한 경건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사람이 되는것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온전한 율법을 행하는 자유를 누린다.

행하기 : 주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행하고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로결심한다.

 

A.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잘못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일이며 모르고 아는 것 같이 되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 된다.

우리의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가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나의 생명이 되어서 내 안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어야 할 것이다.

 

B.

교회가 학교라면 이론과 실기의 비율을 몇 대 몇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11로 해야 한다. 이론 100% 실기 100%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과 을 강조하는 신앙은 각각 어떤 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초점을 자신에 두는 것이 되고 됨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의 삶에 책임을 도외시할 위험이 있다.

영적인 생활에서 행하는 것되는 것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까?

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생활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문제점이 있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인들이 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의 도리를 잘 깨닫도록 가르쳐야 하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결론 :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유혹의 뿌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이길 효과적인 무기입니다. 사탄은 죄가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애쓰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는 그분의 방법이 최상임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첫째 날() 너의 원수를 알라

1019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1:23~24).

 

어떤 사람이 자기 원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매일 면도할 때 그를 본다.” 야고보서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이다. 구원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상상하기 전에 현재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 때 시작된다.

 

1. 1:23~24을 읽어 보라.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1:23,24] 누구든지 도(로고스)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외모를 개선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야고보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2. 19:16~22, 26:33~35, 69~75을 읽어 보라. 여기 등장하는 두 인물의 실제 모습과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은 얼마나 비교가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그들에 대해 어떤 사실을 말해 주는가?

[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6:33~35], 69~7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부자 청년은 계명을 다 잘 지키고 사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고,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자신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그들 자신에 대한 확신은 헛된 것이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젊은 부자는 자신이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이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순히 법과 규례에 대한 외형적인 동의 이상의 더 심오한 영역으로 나아가라는 다른 종류의 순종을 고수하도록 요구받았다.

베드로 역시 이 젊은이처럼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확신에 찬 나머지 그는 다른 사람이 넘어져 떠날지라도 자신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끝까지 충성하겠다고 장담했다. 사람이 얼마나 단단히 죄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지 모른 채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해 스스로 속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침내 회심하였다. 그러나 젊은 법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를 자기가 제일 모른다. 자기의 생각이 자기인 줄 착각한다. 베드로가 대표적이다. 젊은 부자는 경우가 조 다르다. 그는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자신하는 상태이다. 예수님이 보는 것과 사람이 보는 시각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일이다. 청년은 자기가 생각한대로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다고 말한다.(3:6) 그러나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는데 해롭다는 것을 깨달아서 다 배설물로 버렸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자기의 용기를 과신하고 자기의 행위를 내세운다면 그 청년과 베드로와 같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살아주지 않으면 우리가 진정으로 용기가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어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안에 있어서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해 철저하게 깨닫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자아상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다.

 

 

둘째 날() 행하는 자가 됨

1020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1. 1:22을 다시 읽어 보라. 원어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야고보가 단순히 말씀을 행하라고 말했다면 기별이 어떻게 달라졌겠는가?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행하라는 말은 현재의 상태에서 말씀을 스스로 행하라는 말이고 되라는 것은 말씀을 행할 수 있는 존재와 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기노마이인데 become이다. 사람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야고보는 행함을 결합한다. 그는 그것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행하는자가 되어야한다. 더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시제는 먼 미래의 어느 시점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기대되는 지속적인 순종의 삶을 언급한다.

요점은 우리가 주 안에서 새로운 백성이 되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규율을 따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제 보았던 젊은 부자 법관의 문제점으로 보인다.)

 

2. 6:27~38을 읽어 보라. 우리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6:27~3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 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 대우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때에 생기는 삶의 형태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6:27, 30, 36). 불가능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 하려면 그렇다. 이와 같은 사랑은 죄 많은 인간 본성에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마다 다른 열매를 맺는다고 줄곧 말씀하신 이유이다(6:43~45).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대조한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5:19~21, 5:22~23). 우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출수록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 때 사랑과 순종의 열매라는 완전히 다른 결실을 맺는다.

 

<부가설명> 되는 것은 훈련으로보다는 태어남으로 된다.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참팬지가 훈련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침팬지가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학문을 해서 학위를 받아, 사람보다 낫다는 평판을 받는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침팬지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 그러면 영의 사람이 된다.(3:5,6, 8:9) 진정으로 영의 사람이 되면 영의 삶이 나온다. 되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가 바로 이점이다. 예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교훈 : ‘행함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행하는사람이 되어야한다.

 

 

셋째 날() 자유의 율법

1021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5).

 

1. 1:25을 읽어 보라. 그는 율법의 역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며(19:7) 자유의 길(119:45)이라고 말하는 시편의 음성을 되새긴다. 그러나 야고보에서 말하는 율법조차 우리를 구원하거나 정결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계적인 선수의 놀라운 경기를 본다고 해서 그와 똑같이 뛸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이상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을 따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이상을 따르려면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2. 8:2, 고후 3:17~18을 읽어 보라. 사망의 도구로서의 율법과 자유와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율법은 무엇이 다른가?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후3:17,18]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성령의 역사가 없을 때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지적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생명의 도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2:13)는다고 확언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순종할 때라야 율법은 비로소 자유의 율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잊고 산다. 우리는 계속 구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를 들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자유롭게 된 새로운 사람이 된다(8:36, 고후 5:17). 우리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는 율법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범죄자가 받는 저주와 억눌림에 다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고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다.

 

<부가설명> 율법이 자유의 법이 되려고 하면 율법이 생리가 되어야 한다. 삶이 그대로 율법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한다고 계시하였다. 성령이 성도의 생명이 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날 때이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생명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생명이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그 자체가 율법의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도(7:38)가 된다. 이런 성도의 삶을 자세히 관찰하여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것이 10계명과 같은 내용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조문으로서 10계명이 없어도 계명의 내용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유함을 받고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가 아닌 자유를 기초로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

 

 

넷째 날() 유익한가? 아니면 무익한가?

1022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26~27).

 

1. 1:26~27을 읽어 보라. 그리고 마 25:35~36, 40, 12:9~18과 비교해 보라. 이 말씀들에 비춰볼 때, 그대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1:26,2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5:35,36,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12:9~18]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 진정한 성경종교의 신앙은 이웃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원수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야고보 그리고 바울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듯이 유익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고, 시간을 들여 가장 쉽게 소외되는 이들을 찾아보고, 친절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실제적인 방식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된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상냥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이다”(치료봉사, 470). 엘렌 G. 화잇은 그와 같은 생애를 하고, 그러한 감화를 끼치는 데는 매 발걸음마다 노력과 자아희생과 수양을 요한다”(상동)고 덧붙인다. 그것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만약 신앙이 교리에 대한 확신과 설교 청취로만 이루어진다면 그런 신앙은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야고보가 26절과 27절에서 사용한 경건경건한이라는 단어는 현저하게 경건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와 같은 경건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차이점을 쉽게 알아차린다.

하나의 확연한 변화는 우리의 언어 선택이다. 공허한 언사, 격한 어조와 몸짓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에 더욱 민감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혀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래야 혀가 길들여지지 않는 말처럼 우리보다 앞서 맹렬하고 거세게 날뛰지 않는다.

또한 야고보는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가장 필요한 대상으로 고아와 과부를 지목한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보면, 사회에 되돌려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우리의 자원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이치에 합당치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정확히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거부당한 이들을 대해야 하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답례하지 못할 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태도는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지 드러낸다(6:35, 14:12~14, 5:44). 바울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재창조된다(2:10).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以上)에 열거한 구제와 돌봄은 단순한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격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수행되는 것들이다. 대상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이 잘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봉사하신 것은 봉사하기 위하여 봉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이 봉사로 나타나는 그런 봉사였다. 우리는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봉사하려고 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도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봉사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봉사이다.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하는 봉사라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봉사는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봉사한 것이 아니다. 그분의 생명력은 바로 봉사 자체로 드러나는 생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봉사하기 전에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착한 행실로 드러나는 것이다.(5:14~16, 5:9) 빛을 비추려고 생각해야 비치는 것이 아니다. 빛이면 비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봉사와 구제와 도우는 생활은 빛이 그냥 비치는 것처럼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교훈 : 진정한 신앙과 쓸모 있는 경건은 말이나 지적 확신뿐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과 친절, 봉사의 행위와 태도로 구별된다.

 

 

다섯째 날() 세상과 다른

1023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27).

 

1. 1:27에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요일 2:15~16, 벧후 1:4 참고)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생활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활원칙을 따라 사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부분의 유혹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 맞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유혹(특히 저항하기 가장 어려운 유혹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의 문제와 약점들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죄의 문제는 외부 요인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외부 요인도 일부 작용하지만 우리 내부, 즉 우리 마음의 요인만큼 크지는 않다. 우리 마음이 바로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살든지 그러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또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영역에서 문제가 더 심해지는 재미있는 현상도 있다. 예를 들면, 방 한쪽을 치우면 그 옆에 먼지가 더 많아 보인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정로의 계단, 64).

우리는 여기서 엘렌 G. 화잇이 실제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가 더 많이 실수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른쪽에 있는 영감의 교훈을 읽어 보라.)

진정한 경건은 더 깊은 경험을 얻고 싶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그 사람을 이끈다(5:6).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알기 위해 그분과 단둘이 충분한 시간을 보내셨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절대 단절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그분의 양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편견의 장벽을 헐며,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4:28~35).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식사와 생활방식은 주변의 이방 세계와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습관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지 갔기 때문에 복음의 씨가 제국 전체에, 심지어 로마와 같이 타락과 죄악의 중심지에도 뿌려져서 튼튼하게 파종되었다.

 

<부가설명> 처하여 사는 환경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환경은 에덴동산이 아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우리는 이런 환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마치 낙원에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런 생활환경에서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아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사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언제나 해방시켜주시기 때문에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 게 될 것이다.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교인이기는 해도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8:9)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성령의 역사로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세속에 물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교훈 : 경건을 얻는 길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면서 더 열심히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24

 

<정로의 계단>, 59~63 “제자가 되는 증거를 읽어 보라.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경이다. 인간은 자신의 말과 정신과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화잇주석, 1:23~27).

 

사람을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은혜의 참여자가 되게 하는 것은 믿음, 오직 믿음뿐이다”(정로의 계단, 60).

 

하나님은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고 하셨던 일을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구주께서 사셨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치료봉사, 42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가급적 세속적인 공간을 떠나는 게 좋다는 말이 있지만, 왜 그것이 죄와 유혹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까? 모든 종류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얼마나 멀리 가야할까요?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죄와 유혹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유일한 해결책은 성령 충만한 경험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말씀이 생활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9:11)

 

과거에 경찰이 범죄 혐의가 있는 자들의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물 주변에 깔린 맹견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밤마다 그 맹견들에게 햄버거를 먹였습니다. 처음에는 바리케이드 사이로 햄버거 대여섯 개를 던졌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맹견들은 경찰의 손에 있는 햄버거를 먹을 뿐 아니라 다 먹은 뒤 손바닥을 핥을 정도였습니다. 맹견들을 길들인 후에 경찰은 건물에 잠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의 방어벽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조금씩 양보하면 마침내 악한 자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둘 사이의 진정한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생명이요 생명은 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듣기만 하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대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정말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대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참된 자유는 생명이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임을 알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이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이 생명이 지장 없이 생활하는 것이다. 율법은 이 생명이 걸어가는 생활의 길이라는 것을 깯닫도록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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