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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일 안식일

일몰오후 642

 

연구범위 : 7:51, 10:24~25, 4:25~5:2, 살전 5:19~21, 3:28~29

 

기억절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성령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악한 상태를 깨닫도록 인도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으시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과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픈 욕구를 우리 안에 일으키신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시며,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반사할 수 있게 하는 비할 데 없는 능력이 있으시다.

반면 이렇게 강하고 능하신 성령은 연약한 죄인들의 저항을 받으실 수도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 않으신다.

죄는 매우 매혹적이고 호소력이 있다. 또한 기만적이어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나 선하심과는 180도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사하시는 성령은 모든 형태의 죄와 반대이시며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짓거나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 슬퍼하신다. 성령이 강력하신 만큼 또한 그분의 긍정적인 감화력은 소멸될 수도 있다. 우리가 죄악의 생애를 지속시킬 때 우리는 그분을 거부하게 된다. 복음서에 따르면 용서받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죄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12:31~32).

 

핵심요지

깨닫기 : 성령의 호소를 거역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본다.

느끼기 : 성령의 음성을 감지하고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새롭게 느낀다.

행하기 : 성령의 사역과 그분의 호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피조물인데도 어떻게 성령의 지도와 설득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 의지를 주셨고 스스로 그것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에 성령이 슬퍼하실까요?

성령의 권고를 계속적으로 무시하고 거절할 때.

살전 5:19~21을 함께 읽고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성령의 감화를 받고 무관심하게 지나버리는 것이다.

성령 모독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죄입니까?(12:10)

그것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감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성령을 기쁘시게 하며 더욱 그분의 감화력 가운데 머물려면 우리에게 어떤 선택과 결심이 필요할까요?

항상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에 굴복해야 한다.

 

결론 ; 성령이 벌이시는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명령과 호소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이끕니다. 성령께서 신격의 제3위이시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물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날() 성령을 거역함

31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1. 7:51을 읽어 보라. 어떤 경고가 주어졌으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였고, 오늘 우리도 집단적으로 그렇게 할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여러 죄악들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언급된다. 그 죄악들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차원의 죄이다. 그러나 행 7:51에서처럼 집단이 개입되어 있는 죄악도 있다. 스데반은 자신을 고소하는 자들에게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반역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은 자들이라고 했다(33:3). 그들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기를 원했던 기별을 듣기 거부했기 때문에 성령을 거역하였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에 거역하는 이러한 양상은 종국적으로 일부의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이끌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 그들은 외형적인 예배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대체물로 삼았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그분을 의지해야 할 연약한 인간들이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니 놀랍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신다.

만약 하나님이 강제로라도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기를 바라셨다면 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러면 온 세상을 죄의 위협에서 건지셨을 텐데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이든 사망이든, 선이든 악이든 도덕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다. 우리에게 얼마나 거룩하고 고귀한 선물인가!

든 사람이 각자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반면 우리는 집단적인 책임도 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머물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10:24~25).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선지자들의 기별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볼 때 우리는 그들의 온갖 실수를 탓하며 그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우리의 형편없는 선택들은 어떤가? 그것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실수처럼 공개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부가설명> 사람은 성령을 거스를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창조 받을 대상과 의논하지 않으셨다. 창조주의 의지대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창조된 사람은 창조주가 하신 일에 대하여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할 수 있게 창조하셨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존재 문제는 제외되어 있다. 그는 창조를 거절할 수 있지만 일단 거절한 다음에는 다시 창조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존재와 생명 문제에 한해서는 자유의지가 되지 못한다. 선택의 자유도 창조주가 창조한 그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없는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존재하게 할 수 없다. 오늘날 발명품은 이미 창조주가 창조해 놓은 것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1:9,10)고 말했다. 태초에 창조주가 창조한 범위를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격적 피조물들은 창조를 거절할 수 있다. 그러니까 창조주의 창조를 거절하든지 받아들이든지 하는 자유만 있는 것이다. 교과 저자가 말한 대로 전능하신 창조주의 창조를 거절할 수 있다니 놀랍다는 말은 참 잘 표현한 말이다. 결과로 사람은 사망이 되었다. 예수께서 오셔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사망에 머물러 있든지 생명을 받아들이든지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성령께서 주도하실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결코 거절하지 않도록 자아를 말씀에 항상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언제나 자아를 살피고 회개로 주님 앞에 나아가자.

 

교훈 :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호소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둘째 날() 성령을 슬프시게 함 1

313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1. 4:30을 읽어 보라. 바울은 여기서 명령형을 사용하여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말라고 훈계한다. 성령을 슬프시게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 이 구절은 성령은 인격적 존재로 슬픔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은 그분의 감화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께서 슬퍼하신다.

 

성령은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그래서 그분이 슬퍼하실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가? 우리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눈을 열어 죄를 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16:8).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께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일컫는 것이다. 이는 그분이 죄를 미워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것을 생각하며 말할 때에 성령은 기뻐하신다. 반면 이는 우리가 우리의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길 때에 그분이 슬퍼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죄를 간직하기로 하거나 죄의 심각성을 가볍게 보는 우리의 결정은 그분을 슬프시게 한다.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성령의 슬픔에 관해 언급하는 엡 4:30의 문맥은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기 전의 한 사람의 삶의 방식과 회심 이후의 삶의 방식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인내하며 온유하고, 사랑 가운데 오래 참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4:2~3).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으므로(4:23) 우리는 이제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고(4:15) 이방인들처럼 마음의 허망한 것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4:17). 대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4:24~31).

4장에서 언급하는 어떤 부정적인 요소라도 우리가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도록 허용할 때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날 때 성령은 슬퍼하시고 침통해 하신다. 성령을 슬프시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의도적인 죄를 계속 범함으로 성결하게 하시는 그분의 임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능력을 물리친다는 의미이다.

 

<부가설명> 성령은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의 한 위이시다. 그분은 인격적 개체를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지정의를 가지고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생각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아신다.(8:27) 그처럼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것도 다 아신다.(고전2:10) 성령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말씀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드러내신 다음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권도할 때에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슬퍼하시는 것이다. 또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 새 생명의 능력대로 따르지 않고 지체가운데 있는 죄의 법을 따르면 슬퍼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라고 권고한 것이다.(5:16,17) 성령의 소욕을 따를 때 성령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이룬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8:13) 권고를 잘 기억하고 따르도록 마음을 굴복시키자.

 

교훈 : 성령은 우리가 거룩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죄를 간직하고 그것을 가볍게 보는 결정을 내릴 때에는 슬퍼하신다.

 

 

셋째 날() 성령을 슬프시게 함 2

314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5~27).

 

성령이 슬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행위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우리의 삶의 방식에 마음을 기울이신다.

 

1. 4:25~5: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성경의 명령을 따른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져야 하는가?

[4:25~5: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사람의 지정의를 나타내는 모든 일에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살 것을 가르친다. 생각과 말과 감정과 태도가 다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

 

긍정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죄에 대해 분노하되 죄를 범하지 않으며, 스스로 일하고 수고한 결과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며, 덕을 세우는 태도로 말하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친절하고, 인정이 많으며, 용서할 때에 우리는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한 번도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던 것처럼 살면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인도와 사랑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이신 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우리의 행동 방식이 그런 고백과 모순된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진실성의 결여 또한 성령을 슬프시게 한다. 우리의 선교적인 노력과 우리의 윤리적인 행위 사이에 괴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을 반사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령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4:3~4, 15~16, 3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성령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삶의 특성에 관하여 어떤 점들을 가르치는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속에서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4:3,4,15,16,32]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공동체가 한 사상, 한 소망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도록 권고한다. 연합하여 서로 사랑하는 생활 속에 성령 충만이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에베소서 4장에는 하나의 뚜렷한 공동체의 특성이 있다. 연합이라는 개념이 여러 번 언급된다. 바울은 우리가 서로”(4:32)라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가면서 성령의 연합을 유지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교회 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4:3)며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않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이다. 성령의 전인 교회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를 가장 중요하게 보신다.

<부가설명> 성령으로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교호 역사를 보면 세상에 있는 교회가 온전한 연합을 이룬 때가 결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핍박 시대에 그렇게 연합했는지 모르겠다. 평안한 시대에는 저마다 잘난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분열되고 교파가 많아졌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렇게 하나되라고 기도하셨지만 교회 구성원들과 지도자들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이룰 수 있도록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치하지 못했다. 교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 지도자들의 욕심과 참된 거듭남이 없이 지식과 학문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앉기 때문에 지도자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자기 욕심과 감정을 따라 교회를 이끌면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참으로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오직 말씀 앞에 굴복하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이룰 수 있지만 인간의 감정과 욕심과 자존심과 고집이 교회를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의 우리교회에 이런 현상이 자꾸 드러나는 것은 슬픈일이다. 사람이 보기에도 슬프다면 성령께서 보실 때에 어떻겠는가?

 

교훈 : 성령은 우리의 행동과 생활 방식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반사하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주 안에서 연합할 때에 기뻐하신다.

 

 

넷째 날() 성령을 소멸함

315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19~21).

 

1. 살전 5:19~21을 읽어 보라. 어떻게 성령이 소멸될 수 있는가?

 

: 성령의 감화를 무시하는 것이 성령으 소멸하는 것이다. 예언을 따라 범사에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대로 사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소멸이라는 단어는 불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살전 5:19과 함께 엡 6:16에도 사용된다. 이는 성령이 불처럼 끌 수 있는 어떤 것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다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둘 다 성화와 관련이 있다.

성령은 우리가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런 지식에 따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내재하시는 능력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신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는 한 가지 길은 예언을 멸시하지”(살전 5:20) 않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분별력을 요구했다(살전 5:21). 교회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역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짓 교훈과 거짓 선지자가 출현하여 계속해서 교회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분별력도 필요하다.

모든 영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고 우리 길의 빛이다(119:105). 우리는 말씀에서 새로운 예언을 가늠할 기준을 얻는다. 성경 시대에 밤길을 걷는 사람의 앞을 밝혀주는 등불에는 빛을 내는 심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할지 가르쳐 준다(5:2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고 살아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그분 안에서 행하게 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이 성경의 실제적인 권위를 거의 제거하고 우리의 삶 속에 아무 능력도 미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을 해석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그것을 무례하게 취급하거나 그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기를 게을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밝히고 선한 일들을 향하여 우리의 양심을 각성시키기 위해 주신 이 등불을 끄고 있는 것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 말씀이 마음에 울림을 주어서 감성이 움직이고 그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감화이다. 그럴 때 그 감화를 생활에 곧 실현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록 받은 감호를 실현하지 않으면 그 감화는 사라진다. 생활은 감화를 받기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만 아니다. 사람 사이에 대화할 때에도 상대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지만 상대방의 말 중에 자신의 부족한 것이나 그릇된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렇게 느끼고 그런 것은 개선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면 성령께서 감동하신 것이다. 그런 순간들을 빨리 붙잡아서 가능한 한 속히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감화는 곧 소멸된다. 우리 생애에 성령의 감화를 소멸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우리는 곧 그것을 인격과 생활에 실천해야 한다. “ 부흥과 개혁은 성령의 도움 아래서 일어나야 한다. 부흥과 개혁은 서로 다른 것이다. 부흥은 영적 생애를 재생시키고 마음과 정신력을 소생시키며 영적 죽음에서의 부활을 뜻하며, 개혁은 재조직 그리고 사상, 이론, 습관, 행동의 변화를 뜻한다. 개혁은 성령의 부흥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부흥과 개혁은 그것들이 하여야 할 지정된 사명을 이행하여야 하는데 이 일을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연합되어야 한다.”RH, 1902.2.25. (ChS 42.2) 부흥은 성령의 감화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라면 개혁은 그것을 생활에 실현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우리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주신 예언과 말씀을 무시하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날() 성령을 모독함

316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2:10).

 

1. 3:28~29, 12:10, 12:31~32을 읽어 보라. 모든 죄와 모독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을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3:28,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만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크나큰 모호함과 고뇌를 야기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킨 죄목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극악무도한 어떤 죄악들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죄들은 다른 죄들보다 더욱 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우리는 모든 죄가 하나님께 흉악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언급하신 용서 받지 못할 죄란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은 이 성경절들 중 어떤 것도 이 죄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용서되지 않을 뿐이다. 성령의 사역은 죄인들이 죄를 깨닫도록 그들을 이끌고 그들 안에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픈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고의적이고 일관성 있는 거부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성령의 증언을 자의로 완강하게 거부할 때 발생한다.

예수님은 몇 마디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 모독죄는 지속적인 불신의 태도와 예수님에 대한 공개적인 적개심을 바탕으로 저질러진다. 성령 모독죄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단호한 삶의 방식이다.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증거를 받고도,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하늘의 은총임을 깨닫고도 그들은 오직 그들의 악한 목적들에 매달려서 그분이 마귀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였다”(Loma Linda Messages, 156).

인간의 마음이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고정되어서 의식적으로 예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기를 거부할 때에 마음은 완고해지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성령의 증언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죄가 용서의 범위를 넘어서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그분이 용서할 뜻이 없어서도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통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태도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

 

<부가설명>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인지 어렵다. 훼방이라는 말의 원어는 블라스페미아인데, ‘욕설, 중상, 비방(하는 말), 신성 모독적인 언사를 뜻한다. 성령의 존재와 인격에 대하여서나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유독 성령께 그렇게 하면 이 세상에서나 장래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교과 저자는 위의 성경구절들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용서 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참 묘한 표현이다.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용서가 되지 않는 죄라는 뜻이다.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죄는 비로 계획적인 죄라도 용서 받는다. 다윗의 경우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성령께서 회개하도록 강권하시는 음성을 지속적으로 거절하는 것이다. 당연히 용서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회개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성령의 감화가 다가올 때에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다. 회개는 기도할 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용서를 구한 그런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무릎 꿇고 입으로 용서를 구하고 일어나 나가서 같은 일을 계속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슬프게 하지 않고 성령을 훼방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기쁘게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 성령 모독죄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성령의 증언을 자의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부인하다가 그 심각성을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름을 말한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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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이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지 근심스럽게 묻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들이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그들이 그런 죄를 지었다면 그들은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염려는 그들이 여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마음 문을 열 필요를 느낀다는 증거이다. 그런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하여 그분의 의를 구하며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상태에서만 그들은 당장 자신들에게 절실한 평화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는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용서받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사람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갑작스러운 어떤 말이나 행동에 있지 않다. 그것은 진리와 명백한 증거에 대한 단호하고 완고한 거역이다.아무도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신비에 속한 것으로, 또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어떤 무엇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회개하라는 초청을 끈질기게 거절하는 죄이다”(화잇주석, 12:31~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우리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말하거나 행동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분을 소멸합니다. 우리는 삶의 어떤 영역에서 성령을 소멸할 위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영역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굴복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삶에 있어서 감성 영역이 성령의 감화를 소멸할 수 있는 대표적 영역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감성이 예수님의 감성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면서 지속적으로 성령께 자아를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와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아 두렵다고 한다면 그대는 무슨 말을 해 주며 어떤 성경절을 사용하겠습니까? 자신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돕는 데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허물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임을 인식시키고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기쁘게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인식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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