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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3분

 

● 연구 범위 : 갈 3:1~14, 롬 1:2, 4:3, 창 15:6, 12:1~3, 레 17:11, 고후 5:21

● 기 억 절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한 소년이 작은 배를 만들었다. 색칠도 하고 장식도 달았다. 그런데 그 배를 도둑맞았다. 소년은 슬펐다. 하루는 전당포를 지나다 자신의 배가 진열돼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전당포 안으로 들어가 “저건 내 배예요.”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전당포 주인은 “아니, 그건 내 거다. 내가 샀으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아니요. 저건 내 거예요. 내가 만든 배예요.” “2불을 내라. 그러면 너에게 주마.” 동전 한 푼 없는 소년에게 2불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잔디를 깎고, 온갖 잔일을 해서 결국 돈을 마련하였다.

그는 전당포로 달려가며 말했다. ‘내 배를 찾을 거야.’ 마침내 그는 돈을 지불하고 배를 되찾았다. 그는 두 팔로 배를 받아들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 작은 배야, 사랑해. 너는 내 거야. 너는 내게 두 배나 값진 녀석이야. 왜냐면 내가 너를 만들었고, 또 너를 샀기 때문이지.”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주님께 두 배나 값진 자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셨지만, 우리는 악마의 전당포에 갇혔다. 그러자 예수께서 오셔서 금과 은이 아닌 자신의 값진 피로 우리를 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창조와 그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것이 되었다.-William Moses Tidwell, Painted Illustrations, p. 97.

 

※ 학습 목표

깨닫기 : 구약에 나타난 구속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본 이해를 요약한다.

느끼기 :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와 분리되는 저주를 당하셨을 때 어떤 슬픔과 고뇌를 겪으셨을지 느껴 본다.

행하기 : 그리스도의 큰 희생을 감사하며, 우리의 죄를 덮고 용서해 주시도록 그분의 의를 구한다.

 

➋ 갈라디아 신자들은 어떤 면에서 어리석었습니까?

※ 십자가의 구원을 경험했는데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➌ 아브라함은 순종의 모본입니까? 믿음의 모본입니까?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으로 열렸을 뿐이다. 

➍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우리는 약속할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자신의 신실함을 전제로 일방적으로 하신다. 

➎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➏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품성을 신뢰하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이다. 계명이다.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이 되는 것이다. 

 

결론 : 구약은 제사 제도를 통해서 죄의 참혹한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처지를 대신하여 드려진 완전한 대속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일) 어리석은 갈라디아인들

7월 23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1. 갈 3:1~5을 읽어 보라.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지 요약해 보라. 어떤 면에서 우리도 바르게 시작했다가 율법주의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는가?

[갈3:1~5]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답: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은”이라고 번역된 ‘아노에토이’는 정신을 뜻하는 ‘누스’에서 파생되었다. 문자적으로 이 말은 ‘정신없는’이라는 뜻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생각이 짧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들이 마법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하였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그가 선택한 단어들은 그들의 배후에 마귀가 있음을 암시한다(고후 4:4).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르러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이 복음을 배반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코 그들이 모르고 한 일이 아니다. 갈 3:1에서 “보이거늘”이라고 번역한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공개적으로 게시되어 있는’ 또는 ‘그려져 있는’ 이다. 이 말은 여러 공적인 선언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십자가를 중점적으로 설교했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마음의 눈으로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하였다(고전 1:23, 2:2). 하지만 지금 그들은 십자가를 등지고 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의 현재의 경험과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상황을 대조하였다. 그는 다소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가? 즉 처음에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는가? 그들이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인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관한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이렇게 좋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제 와서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부가설명> 교인들이 구원받는 것과 구원받은 다음의 상태에 대하여 항상 착각과 오해에 빠지는 것 같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받는 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구원받는데 율법을 지니는 조건은 결코 없다는 것을 힘써 주장하는 것이 바울의 논지(論旨)이다. 오늘도 교인들이 이 두 차이를 자주 착각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고 무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바울의 가르침이 다르다. 구원받은 후의 삶에 대한 것을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생각하면 복음을 완전히 착각하는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꾐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렇게 착각에 빠져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사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이며 저주받을 사상이다.(갈1:8,9) 갈라디아서의 논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갈라디아서 후반에서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모든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계명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중심은 하례와 예전법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다 폐한 것들이다. 바른 이해로 믿음의 삶을 누리자.

 

교훈 : 갈라디아 교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는 영적인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둘째 날(월) 성경에 근거를 둠

7월 24일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지금까지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동의와 자신이 갈라디아 신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을 변호하였다(갈 2:1~10, 3:1~5). 그러나 갈 3:6에서부터 그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 복음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확증을 얻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사실상 갈 3:6~4:31은 성경을 기초로 한 단계적인 논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갈 3:6~8에서 바울이 언급한 “성경”은 무엇을 뜻하는가?(롬 1:2, 4:3, 9:17 참고)

[갈3:6~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롬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답: 갈라디아서에 말한 성경은 구약성경 창세기이다. 로마서에 말한 것은 창세기 출애굽기 등이다. 한마디로 구약성경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다. 바울이 말하는 성경이란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은 바울의 사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죽은 문서로 보지 않고 권위가 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 딤후 3:16에서 그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감동’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데오프뉴스토스’이다. 이 단어의 앞부분 ‘데오’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뒷부분은 ‘호흡을 불어넣은’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은’ 기록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고(롬 1:2), 그리스도인 생활에 교훈을 주며(롬 13:8~10) 자신의 교리의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갈 3:8~9) 성경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디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한 그의 서신들에서 일일이 확인하지 못할 만큼 자주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2. 갈 3:6~14을 읽고 어떤 구약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지 찾아보라. 이는 구약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갈3:6~1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답: 창15:6, 12:2,3, 신27:26, 합2:4, 신21:23, 이상은 갈라디아 3:6~14에 인용된 차례대로 구약을 찾아 적은 것이다. 구약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교훈 :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을 때, 바울은 구약성경을 기초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을 설명하였다.

 

 

셋째 날(화) 의롭게 여김을 받음

7월 25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 3:6).

 

1. 바울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는 무엇인가?(갈 3:6)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답: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다. 할례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창17:24) 그런데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유대인들의 시조일 뿐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유대인의 표본이었다. 많은 사람은 순종이 그를 정의하는 특색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신 이유는 그의 순종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할례를 받고,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 이것이야말로 순종이 아니던가! 바울의 반대자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논리의 선상에서 할례를 고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을 아홉 번이나 언급하며, 그를 율법의 준수자 대신 믿음의 모본으로 제시하면서 형세를 뒤집는다.

 

2. 창 15:6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고 말한 갈 3:6의 의미는 무엇인가?(롬 4:3~6, 8~11, 22~24 참고)

[롬4:3~6, 8~11, 22~24]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답: 아브아함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롭다 여김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칭의는 법적 세계의 은유인 반면, ‘여겨지다’, ‘간주되다’라는 말은 경제 분야에서 비롯된 은유이다. 그것은 ‘그의 공(功)으로 믿다(여기다)’ 또는 ‘(무엇을) 그의 계정에 두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말은 갈 3:6에서 아브라함에게 사용한 예를 제외하고, 믿음의 조상과 관련하여 11번 나타난다. 어떤 성경들은 이 말을 ‘여겨졌다’, ‘간주되었다’ 또는 ‘전가되었다’로 번역하였다.

바울의 은유에 따르면 우리의 계정에 들어온 것은 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가? 바울의 반대자들은 순종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절대 순종일 리가 없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지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한다.

성경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의의 토대가 아니었다. 순종은 오히려 의의 결과였다. 그는 의롭게 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롭다 칭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행했다. 의가 순종을 앞선다. 순종이 먼저가 아니다.

 

<부가설명>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그의 의로 여겼다고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다.(롬4:3) 그러나 창세기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여호와를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겼다고 되어 있다. 여호와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한 번도 없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경의 하나님인 줄 알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방신들도 다 하나님(엘로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는데 아브람이 여호와를 어떻게 믿었는지 설명이 없다. 그냥 믿었다고만 나와 있다. 이제 로마서 42장 17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었는지 확실히 설명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시오 생명과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을 의로 여기셨다. 지금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은 동일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교훈 : 아브라함은 순종의 모본이자 믿음의 모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의롭게 한 것은 순종이 아니라 믿음이며, 순종은 의의 결과였다.

 

 

넷째 날(수) 구약의 복음

7월 26일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한 분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그 복음은 틀림없는 참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을까? 바울이 창 12:3을 인용한 것을 보면,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맺었던 언약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창 12:1~3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본질은 무엇인가?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답: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기초는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은 네 번이나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약속하신 대신 아브라함은 약속할 것이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취하는 태도와 정반대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그분을 섬기겠다고 약속하고 그다음에 그 대가로 그분께서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율법주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인가 약속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단지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셨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창 22장 참고). 따라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 곧 복음의 본질을 예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구원의 두 가지 길을 가르친다고 성급히 결론짓는다. 그들은 구약 시대에는 구원이 율법의 준수에 기초했지만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가능케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진리와 거리가 멀다. 바울이 갈 1:7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는 단 하나의 복음밖에 없다(레 17:11, 시 32:1~5, 삼하 12:1~13, 슥 3:1~4 참고).

 

<부가설명>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약속, 계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약속할 내용이 없다. 신약성경에서 이 약속을 ‘디아데케’라고 한다. 상방언약은 ‘순데케’이다. 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신실하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 ‘미쁨’이라는 말은 ‘신실하다’는 순 우리말 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일향) 신실하시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신실함을 받아들이고 그 신실함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갈라디아 2:20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직역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자신의 이 신실함을 근거로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6:17,18)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미 신실하신데 사람이 이 신실함을 받아들이도록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맹세까지 하셨다. 얼마나 큰 보증인가.

 

교훈 : 구약의 언약도 진실로 복음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을 위한 우리의 약속이 아닌, 우리를 위한 그분의 약속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목) 저주로부터 구원받음(갈 3:9~14)

7월 27일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의 표현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주 아래 있으리라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순종을 통해 복을 받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견해는 명확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대조하였다. 신명기 27~28장에 기록돼 있는 축복과 저주의 언약은 단순명료하다. 순종하는 자들은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 이는 사람이 율법의 순종으로 하나님께 가납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율법을 골라 지킬 수 없다. 또는 하나님께서 몇 개의 잘못은 간과해 주시리라 추측해서도 안 된다. 율법의 문제는 다 지키든 아니면 못 지키든 둘 중에 하나이다.

이는 이방인뿐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바울의 반대자들에게도 나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롬 3:23)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해지려고 해도 율법은 우리를 범법자로 정죄할 뿐이다.

 

1.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셨는가?(갈 3:13, 고후 5:21)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시는 저주를 감당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구속(救贖)하다’란 말은 ‘되사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질을 석방하거나 노예를 풀어 주기 위한 속전(贖錢)을 지불할 때 사용하였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못해 받는 저주는 종종 사형 선고와 같았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불한 속전은 결코 약소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생명으로 그 값을 치르셨다(요 3:16).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짐으로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건져 내시고 자신이 그 저주를 감당하셨다(고전 6:20, 7:23, 고후 5:21).

바울은 성경적인 근거로 신 21:23을 인용한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형 집행 후에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이런 저주의 한 예였던 것으로 보인다(행 5:30, 벧전 2:24). 메시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저주를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것은 그분의 저주가 아닌 우리의 저주였다.

 

<부가설명> 율법의 저주는 곧 사망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율법의 저주 곧 사망이 되신 것이다. 그것을 고후5:21에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이라고 계시하였다. 죄는 율법의 저주요 그것은 곧 사망이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죽으심으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이 저주에서 예수님의 피를 제시하고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피는 죽었다는 증명서이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의롭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온 우주에 드러났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사망의 저주에서 생명의 축복으로 옮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다.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는 진정으로 이것을 믿는가?

 

교훈 :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의 저주에서 놓인다.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7월 28일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눌렀다.… 죄인들의 괴수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그분의 과제였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지신 죄의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그분은 화해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최대의 고민의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구주께로부터 당신의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더 이상의 자비의 탄원이 없을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민을 느끼셨다. 그분이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속자인 그분에게 아버지의 진노가 쏟아지게 만든 죄에 대한 의식이었다”(시대의 소망, 75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오늘날에도 ‘우리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종교 외의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 죄의 세상의 문화와 사상의 경향이다. 

 

➋ 바울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신학적 오류를 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른 신학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누군가 오류를 가르치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로써 어떻게 강력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까?

※ 바른 신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오류를 가르치고 있다면 강하게 지적하고 바르게 교정해야 한다. 그래도 교정 않으면 교회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의 기초 위에 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이유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동일한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잘못해도 정죄를 받지 않는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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