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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일 안식일

일몰오후 531

 

연구 범위 : 15:6, 삼하 11~12, 3:20, 31, 4:1~17, 3:21~23, 요일 3:4

 

기억절 :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개역).

 

로마서 4장이 다루는 주제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성경적인 교리의 토대이자 종교개혁을 일으킨 그 교리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경건함과 덕성의 귀감이 되는 아브라함을 율법의 행위 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어야 했던 인물의 예로 사용함으로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였다. 만약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반면 아브라함도 은혜로 구원을 얻어야 했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도 그래야 할 것이다.

4장은 구원의 계획을 3단계로 제시한다. 신령한 복의 약속(은혜의 약속), 그러한 약속에 대한 인간의 반응(믿음의 반응), 하나님이 믿는 자들의 것으로 간주되는 의를 선언함(칭의). 그것이 아브라함에게나 우리에게나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구원은 은혜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합당하지 않음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하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아야 할 채무가 된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 창 15:6을 인용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학습 목표

깨닫기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구약적인 배경을 이해한다.

느끼기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긴다.

행하기 :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경험이 되게 할 방법을 찾는다.

 

구약 시대에 사람이 의로워지는 길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바뀌었습니까? 바뀌지 않았습니까?

바뀔 수가 없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구약의 예를 들어 보십시오.

노아, 에녹, 아브라함, 다윗 등등 히브리서 11장이 이것을 계시한다.

그대의 생각에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는 왜 더 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까요?

율법을 지켜도 그는 여전히 사망을 당하는 자이다. 율법을 사람을 사망의 존재라고 더욱 가르치고 있다.(10:3 참고)

믿음으로 얻는 의가 어떻게 율법을 폐하지 않는지에 대해 그대가 이해한 대로 설명해 보십시오.

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을 얻는 생명이기 때문이다.(8:7 참고)

 

결론: 칭의의 교리는 성경 전체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첫째 날() 1029일 율법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1. 3:31을 읽어 보라. 바울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요점이 재림신자인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굳게 세운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법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율법 심지어 구약 성경의 율법을 통째로 지킨 자들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는 못했다. 구약의 신앙은 신약의 신앙과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시는 은혜의 신앙이었다.

 

2. 4: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도 구원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만일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빚을 지우는 것과 같다.

 

구약 성경의 해설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졌다. 구약은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르친다. 따라서 믿음이 율법을 무효화한다는 어떤 암시도 옳지 않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구약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구약 성경 전체에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예를 들어 성소의 모든 제사는 죄인들이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대속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다윗이 밧세바와 부적절한 일을 저지른 뒤에 용서 받은 사실도 은혜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여러 항목에서 자신을 정죄하는 수많은 율법의 원칙들을 어겼기 때문에 필연코 그를 구원한 것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었다. 만약 다윗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야 했다면 그는 절대 구원 받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얻은 다윗의 회복을 믿음으로 얻는 칭의의 한 예로서 제시한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는 의에 관한 또 다른 구약 성경의 예이다. 물론 다수의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주의자가 되었지만 유대교는 언제나 은혜의 종교였다. 율법주의는 유대교의 왜곡된 형태일 뿐 그것의 기초는 아니었다.

 

<부가설명> 율법은 규율과 질서를 정리한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할 사실을 조문화한 것이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은 사람의 생활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율법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자기는 스스로 의롭게 살 수 있고 죽지 않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파기하여 필요 없다고 하는 율법인 의문의 율법, 개정판에는 율법의 조문이라고 번역한 그 의문의 율법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에 글자로 기록된 조문은 파기되었을지라도 그 의미는 예수 안에서 현재도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를 사유하시고 의롭다고 하신다. 그것은 옛날 의문의 율법이 하던 바로 그 내용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는 의인의 자격으로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된다. 그 행하는 의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 생활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이 유지되는 질서와 규칙이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생명인 예수님의 생명의 지배를 받게 된다.(2:20) 그 생명이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이것은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레일이다. 이 레일을 벗어나면 사고가 난다.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가 예수 안에서 얻은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율법의 바른 관계이다.

 

교훈 : 구약은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다.

 

 

둘째 날() 1030일 빚 또는 은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4:6~7).

 

여기서 바울은 단순한 신학 이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를 취급한다. 만약 누군가 스스로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용서를 받기에 앞서 어떤 거룩함의 표준에 도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당연히 자기 자신과 자기의 행동을 바라보게 될 텐데 그럴 때 신앙의 가장 불필요한 요소인 자아가 오히려 신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반대로 누군가 칭의가 아무 공로가 없고 합당치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위대한 복음을 깨닫는다면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자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결국 누가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반사하기 쉽겠는가? 자아에 몰두하는 자일까 아니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자일까? (당연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자이다.)

 

1. 4:6~8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어떻게 확장시키는가?

[4:6~8]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7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8 불법 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 일한 것이 없이 예수를 믿을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지는 복 있는 사람이 된다고 확장했다.

 

바울은 계속하여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를 설명한다(4:9~12).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이교도였다(24:2). 그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그는 아직 할례조차 받지 않았었다(15:6). 그래서 아브라함은 할례자들과 무할례자들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바울이 구원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훌륭한 사례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족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2:9).

 

<부가설명> 은혜와 빚을 대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자기가 일 한 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것은 하나님께 빚 지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겨줄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지 않으면 열심히 일한 사람이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것이다. 욥기의 욥이 바로 그렇게 따진 사람이다. 욥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알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욥이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할 때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이다.(45:8)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성품이 지극히 선하다고 했도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도덕적 성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이 진리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이것을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창조된 이 의를 받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고후5:17)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정말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며 그러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날() 1031일 약속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오백 년 전 오늘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다. 흥미롭게도 오늘의 주제 역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심장부에 이른다.

4:13에서 약속과 율법은 서로 대조된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위해 구약적인 근거를 마련하려고 한다. 그는 모든 유대인이 그들의 조상으로 인정하는 아브라함에게서 한 예를 찾았다. 아브라함은 율법과 아무 상관없이 가납하심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계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그것이 의미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가납하셨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통해 일하셨다. 이것은 구약에서 은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이 예를 사용했다.

 

1. 4:14~17을 읽어 보라.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어떻게 구약 성경의 중심 사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가?(3:7~9 참고)

[4:14~17]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5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6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7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구약성경의 중심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계시한다고 가르친다.

 

처음에 말했듯이 우리는 바울이 누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기억해야 한다. 이 유대인 신자들은 구약의 율법에 젖어있었고 다수가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게 그들의 구원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중에 바울은 그들의 조상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아직 전체 율법과 제사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었다.

설령 바울이 여기서 도덕법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시내산 이전에 원칙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요점에는 변함이 없고 심지어 더 명확해진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자 하는 노력은 믿음을 의미 없게, 심지어 소용 없게 한다. 믿음은 살리지만 율법은 정죄한다. 그는 정죄에 이르게 하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의 무용성에 대해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필요했던 동일한 것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는 예수님의 구원의 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마침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던 그 진리이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자 하는 노력은 믿음을 의미 없게, 심지어 소용 없게 한다. 믿음은 살리지만 율법은 정죄한다. 그는 정죄에 이르게 하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의 무용성에 대해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필요했던 동일한 것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는 예수님의 구원의 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마침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던 그 진리이다.

 

<부가설명> 유감스럽게도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 구절은 다 빠졌고 설명도 없다. 그 구절이 바로 로마 4:18~25이다. 저자는 그냥 아브라함이 하나님(여호와)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사실만 주장하였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18~25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지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정한 핵심을 벗어나게 하고 그냥 믿음과 율법의 행위, 즉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더욱 굳게 세운다는 주장만 하게 된다. 18절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창조와 부활 곧 생명의 하나님을 믿었다고 가르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이러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을 때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그 몸이 죽은 상태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생명의 후사를 주실 것을 믿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아브라함과 사라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고 그 믿음을 의로 여겼는데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드러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와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사람이 결코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생명을 창조하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것을 우리가 전적으로 믿을 때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가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상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약속하신 것이다. 아멘.

 

교훈 : 율법의 체계가 주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하여 구원의 나라를 약속받았다. 구원은 처음부터 믿음을 바탕으로 약속되었다.

 

 

넷째 날() 111일 율법과 믿음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3:21~23).

 

구원은 율법이 아닌 은혜의 약속을 통해서 이르러 왔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대하시는 예가 이를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행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이제 메시아의 강림으로 성취된 아브라함 언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선을 행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원칙은 모든 이방인의 종교의 기초에 놓여 있다.이런 원칙이 신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은 죄를 막을 방벽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시대의 소망, 35~36).

 

1. (위의) 증언은 어떤 의미인가? 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그토록 무방비 상태가 되게 하는가?

 

: 이 문제를 바르게 알려면 죄의 진정한 실상을 알아야 한다.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이다.(고전15:22, 4:22, 5:18) 죽은 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 3:21~23에서 가르친다. 살게 하는(생명 얻는) 율법을 주셨다면 이라고 한 것이다. 죽은 자가 율법을 지켜서 살아날 수 있겠는가? 시대의 소망에 있는 말은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2.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가?(3:21~23)

[3:21~23]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 율법은 믿음이 올 때까지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믿음이 왔을 때 생명이신 구주(예수)를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다.

 

만약 정말 생명을 주는 율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히 하나님의 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생명을 주는 율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율법을 범하여서 그것으로부터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더 완전하게 계시된 믿음의 약속은 믿는 모든 자를 율법의 매임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다가 받는 정죄와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율법이 믿음 없이, 은혜 없이 제시되면 그것은 하나의 짐이 된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혜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없이 율법에 매이는 것은 죄의 짐과 정죄 아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율법이 믿음 없이, 은혜 없이 제시되면 그것은 하나의 짐이 된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혜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없이 율법에 매이는 것은 죄의 짐과 정죄 아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말은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율법은 모든 아담의 후손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지적한다. 스스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살게 하는 율법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만 썩어져가는 구습만(4:22) 나올 뿐이다. 예수께서는 부친을 장사하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8:22,23)고 하셨다. 호흡이 끊어져 죽은 자나 호흡하고 있는 자나 다 죽은 자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다고 지적했다.(8:22) 이 지구에는 아담의 후손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했다.(2:3) 율법은 이것을 가르친다. 예수께서 오셔서 이 진노, 곧 사망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2:14) 그리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딤후1:10~11) 아담 안에서 죽었으나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의식을 가지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중생이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길이다. 믿음과 율법은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가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바르게 깨닫자.

 

교훈 :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오히려 그것의 저주와 죄에 더 노출될 수밖에 없다. 믿음의 약속만이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다섯째 날() 112일 율법과 죄

 

우리는 신약에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종종 듣는다. 그들은 곧장 그들의 논점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성경절들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술 이면에 존재하는 논리는 그다지 건전하지도 신학적이지도 않다.

 

1. 요일 2:3~6, 3:4, 3:20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요일2:3~6]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3: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죄는 불법이고 율법은 죄를 알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몇 백 년 전 아일랜드 작자 조나단 스위프트는 이렇게 적었다. “만약 음주’, ‘사기’, ‘절도’,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영어와 모든 사전에서 제하기로 의회에서 결의했다고 치자. 그러면 다음 날 아침 우리 모두가 온화하고, 정직하며, 의롭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깨어나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결론인가?”-Jonathan Swift, A Modest Proposal and Other Satires, (New York: Prometheus Books, 1995), p. 205.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면 어떻게 거짓과 살인과 절도를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하나님의 법이 변경되었다면 죄의 정의도 변경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면 죄 역시 폐지되어야 하는데,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요일 1:7~10, 1:14~15 참조)

신약은 율법과 복음을 모두 다루고 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복음은 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만약 법이 없다면 죄가 없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율법이 존재해야 구원이 효력이 있으며 복음이 의미 있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가 율법을 폐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는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전에 율법을 폐지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었다면, 이후에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다. 왜 인류가 범죄한 직후 율법을 폐지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십자가 이후가 아니라 십자가 이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사실 십자가만큼 율법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분의 죽음은 율법이 변경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했다. 만약 율법이 변경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지 않겠는가?

 

<부가설명> 율법을 십계명이나 모세의 율법과 같이 성문율로만 생각하면 위에 설명한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율법을 폐하면 죽음 자체가 파기 된다면 위의 설명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성문율을 파기한다고 죽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악들은 사망이 원인이다. 성경은 그것을 썩어져가는 구습이라고 했고,(4:22)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감각 없는 자가 되어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게 된다고 계시하였다.(4:18,19, 개역) 오늘날 세상에 넘치는 죄악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려서 사망이 되었기 때문에 감각이 없이 썩어가는 현상인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므로 죄 자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망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고,(딤후1:10)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는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를 없애려는 것이었다.(2:14) 그러므로 성문율이 아닌 율법은 생명관리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여자(하와)가 유혹을 받아 죄에 빠졌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딤전2:14) 여자가 유혹을 받을 때 성문율이 없었다. 여자가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진 것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 떠나는 것이라고 계시한다.(고후11:3)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이 죄에 빠진 것이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생명을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떠나면 생명을 잃는다. 생명을 잃으면 사망이 되고 사망이 되면 썩는다. 그것이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모든 도덕적 성품적 죄악이다. 그러므로 성문율을 폐해도 죄가 폐해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떠났기 때문에 율법을 폐한다고 떠난 생명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의 관계를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훈 :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율법을 폐지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여섯째 날() 1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가려 뽑은 기별 1>, 388 “그리스도는 기별의 중심이심”, <부조와 선지자>, 125~127 “아브라함을 부르심”, 363~364 “율법과 언약”, <시대의 소망>, 307~308 “산상수훈”, 608 “논쟁”, 762~763 “다 이루었다를 읽어 보라.

“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4:4). 사도는 여기서 창 15:4~6의 본문을 인용하고 설명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칭의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결론을 맺는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설명한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Romans, p. 82.

만약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의와 공로의 가치를 부여하도록 이끄는 데 성공한다면, 사탄은 유혹을 통해서 그 사람을 정복하며, 자신의 포로와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문설주를 어린양의 피로 적시라. 그래야 안전하다”(리뷰 앤드 헤럴드, 18899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 이해는 어떤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까? 이런 개념을 놓치는 자에게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자기의 행위의 의와 공로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오류에서 보호한다. 이런 진리를 놓치면 자기 행위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율법과 그에 대한 순종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다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로마3:31 믿음으로 율법을 폐할 수 없고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가르친다.

 

종교개혁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개인의 신앙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차이점을 터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본질이 사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망이 된 존재가 스스로 노력하여 생명을 얻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할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믿을 때만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으면 그 생명이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하는데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전7:19]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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