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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4,15)

하나님의 징계

노예들이 배운 것은 오직 폭력뿐이다. 그들은 폭력은 알아도 징계는 모른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폭력이 없는 곳에서의 몸가짐에는 대단히 익숙하지 않은 백성들이다. 이들에게 고통이 따르자 불평이 터져나왔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11:5-6)

만나는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다’(민 11:8). 그것은 결코 ‘박한 식물’(민 21:5)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365일 먹으면 ‘박한 식물이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왕 내려주시는 음식을, 좀 다양한 음식으로 공급해주지 않으셨을까? 메추리를 한 달에 한번 쯤 내리시되 많이도 말고 한 집에 두어 마리 정도 돌아가게 내리시고 만나가 내릴 때 과일도 내리시고 가끔 채소도 내리시고 했으면 불평하지 않지 않았을까?

과연 그랬으면 불평하지 않았을까? 의식주에 문제가 없으면 인간은 더 감당키 어려운 불만을 갖게 된다. 풍족함이 타락으로 인도되는 인간에겐 불만족한 상태가 만족한 상태이다. 불만족하여도 감사하려면 삶 자체를 즐겨야 한다. 2009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김연아가 일등을 하자 각국의 언론들은 김연아가 이제는 스케이팅을 즐기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경기를 하기 위해 8시간 연습하기는 힘들어도 스케이팅을 즐긴다면 8시간도 길지 않은 시간이다. 스케이팅을 즐겨야 연습에서 자유롭고 경쟁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일등을 하지 못해도 실패하지 않은 인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어떤 악조건 가운데서라도 이기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위해 불만 없는 환경이 아니라 불만족할지라도 삶을 즐기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탄원했다.

“백성은 저를 보고 울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달라!' 하고 외치는데,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주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민 11:13-15 새번역)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민 11:18-20)

일개월간 계속 주신다는 것은 먹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만나만 먹으면 정력이 쇠약하여지고 고기를 먹으면 정력이 왕성해지는지’ 시험해보라는 말이다. 하루 이틀 먹어서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충분한 기회를 주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여쭈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121,22)

기적의 딜렘마는 그것을 매일 행하면 기적이 되지 않고 특별한 때만 행하면 곧 잊어버린다. 모세가 친히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했지만 그 일이 매일 일어나지 않을 때 그 기적은 나비와 같이 그 마음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만나의 기적 역시 보통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여호와의 손이 짧아지지 않았지만 인간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백성들이 울며 고기를 달라고 하자, 다음날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들이 일어나 바로 그 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놓았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민 11:31-33 새번역)

징계는 단호해야한다.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녀에게 그 단호함이 감정의 분출로 보일지라도 징계에 있어서 단호함은 필수적이다. 단호하지 않은 징계는 오직 자녀의 분노만 살 뿐이다.

여기서 저들이 고기를 탐했느냐 파와 마늘을 탐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자유인의 삶을 살 자격을 갖추었느냐 아니냐가 문제다. 저들에게 폭력이 가해졌더라면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그들에게는 폭력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폭력이 필요한 곳에 징계를 가하셨다.

고기를 주시고는 ‘고기가 잇 사이에 있을 때’(33절) 죽은 것은 불량식품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징계일까 저주일까? 그들의 죽음에 사랑이 묻어 있으면 징계요 사랑이 묻어 있지 않으면 저주다. 과연 하나님의 진노에 사랑이 묻어 있을까?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는 이야기 사이에 들어간 삽입구에 주목해보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모세의 말은 어떤 심정에서 나온 말이었을까? 거기에 한 마디 들어 있는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25절)는 말은 무슨 뜻일까?

군중을 움직이는 힘의 중심에는 선동자가 있게 마련이다. 여기의 선동자들는 ‘섞여사는 무리’(4절)였다. 이들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섞여 살던 애굽 사람들로서 기회를 포착하는 일에 능한 자들이었다. 저들은 조상의 땅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도, 자유에 대한 갈망도 없는 자들이었다. 단지 그들은 애굽이 일곱 재앙으로 초토화될 때 이스라엘 진영이 안전하게 보호되는 것을 보고 살길을 찾아 나온 자들이었다. 한데 광야에서 어려움을 당하자 이들의 육적인 ‘탐욕’(4절)이 음식에 대한 불평으로 나타난 것이다.

불평하는 말에 의해 선동된 백성은 곧 폭도로 변한다. 이때 상황의 급박하게 돌아가자 하나님께서는 70인의 장로들에게 영을 내려 수습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말도 백성들이 들으려하지 않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 하지 않게’ 되었다.

그 70명 중에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는 회막에 나가지 않았으나 그들도 예언을 하였다. 이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저들의 예언을 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모세가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얼마나 그 때 상황이 절박했으면 백성들을 설득하는 일에 한 사람이라도 더 나설 뿐 아니라 오히려 백성 모두 다가 선지자가 되기를 원했을까?

가르치고 타이르는 데도 듣지 않는 자식을 그대로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비록 고기를 탐한 자들은 죽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깨달아 알았어야 했다.

온유

이 땅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단어중 하나가 온유다. 성경의 온유함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사람이 아니다.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 감정을 분출하는 자가 아니라 보다 큰 뜻을 위해 감정의 분화구를 가진 자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애국자나 예수를 위해 죽는 순교자는 과격한 자들이 아니다. 나라나 교회가 위태로울 때 분기를 감추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실 때는 병자들을 살리고 주린자들을 먹이신 때가 아니었다. 권능을 베푸신 고을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4)고 분노하신 뒤였다. 온유한 자는 분노를 모르는 자가 아니다.

햄릿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향해 독백한다.

“사람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도 악당이 될 수 있다.”

세상에 얼굴이 온유한 사람은 많아도 마음이 온유한 자는 많지 않다. 마음에 칼을 갈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띠는 사람들이 많고 얼굴은 온유해 보이지만 마음이 모진 자들이 많다. 부드럽던 사람이 돈을 벌면 뻣뻣해지는 것, 웃던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얼굴에 힘을 주는 것, 그는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외모가 온유해 보였던 사람이다. 이 세상은 마음이 온유한 자가 아니라 외모가 온유해 보이는 자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자기의 기득권에 지장이 초래되거나 손해가 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살금살금 말하던 입이 옆으로 찢어지고, 굽실굽실하던 허리가 뒤로 재껴지고, 미소를 띠던 눈이 도끼 같이 선다면 그는 마음이 온유한 자는 아니다.

사람이 좋은지는 뺨을 때려봐야 안다. 손해를 볼 때에라도 부드러움을 간직하지 않는 자라면 마음이 온유한 자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온유해 보이는 자를 온유하다 하지 않고 마음이 온유한 자를 온유하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마 11: 29) 마음이 온유하 자가 아니면 온유한 자가 아니다.

모세

모세는 의분하는 사람이었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기도 하고 미디안에 도망하였을 때는 르우엘의 딸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건지기도 하였다. 출애굽한 뒤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울 때는 모세는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품게하느냐고 하나님께 항의도 하고, 백성들이 목마르다고 하자 하나님의 명을 거스려 반석을 두 번 치기도 하였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자 하나님께서 주신 돌비를 던져 깨뜨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명에 따라 우상 숭배자들을 도륙한 뒤엔 하나님께 올라가서 ‘그들의 죄를 사하든지 아니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라’고 요구한다. 모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아론은 백성들 편에서 볼 때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백성들이 원하면 금송아지도 만들도록 허락하고(출 32:4) 백성들을 대신하여(24절) 모세에게 거짓말도 해준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론은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론이 아니라 모세를 향해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 12:3)고 하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되기’(민 12:7)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충성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온유함을 결정한다.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이 아니라 때로는 노를 발하는 눈빛이 날카로울지라도 하나님의 집을 위해 분기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마음이 온유한 자이다. 평상시 온 세상을 주름잡을 듯이 나서다가도 하나님의 집이 위태로울 때 슬며시 뒤로 빠지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니다. 평상시에도 부드러운 얼굴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이 위태로울 때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을 향해 세상은 온유하다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온유하다 하지 않으신다. 마음의 온유함은 얼굴 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불의를 보고 분기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외모가 온유한 자는 불의를 보고 뒷걸음질 치지만 마음이 온유한 자는 불의에 항거한다. 누가 진정으로 강한 자일까? 성경은 얼굴 표정에 따라 강온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강한 자를 마음이 온유하다고 한다.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법, 하여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시 37:11)고 말한다.

온유한 자는 비방을 당할지라도 침묵한다. 하지만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l방하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회막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6-8)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았다. 랍비들은 이 일을 근거로 ‘유대인은 전텅적으로 나쁜 혀를 흉기로 여겨 단호하게 비난하고 있다. 탈무드는 남을 중상하는 것은 살인과 같은 행위로 보았다.’(이희영 『탈무드 황금률 방법』 512쪽)

아론이 모세에게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라’고 사정하자 모세가 여호와께 ‘고쳐달라’고 부르짖었다.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지라도 그가 7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 오게 할지니라’고 하셨다. 이에 미리암이 진 밖에 칠일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가 다시 들어오기까지 진행치 아니하다가 7일 후 그가 돌아오자 백성이 하세롯에서 진행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쳤다.

약속을 보는 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신 13:2)

하여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정복할 땅의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민 13:18-20)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용기를 가졌으면 좋은데 들어온 12명 중에서 10명은 정탐하지 않음만 못한 보고를 했다.

정탐하여 그 땅이 좋으나 나쁘나, 상대방이 강하나 약하나, 그들의 수가 많으나 적으나 정복해야할 땅이라면 왜 정탐하게 했을까? 그때의 일을 다시 말하는 신명기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신 1:20-2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을 보내라’(민 13:2)고 허락하셨다.

둘레가 480km나 되는 가나안 땅을 40일에 걸쳐 두루 여행하는, 이 위험한 사명을 끝낸 뒤에 정탐꾼들이 돌아와 보고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가져 온 과일을 보여 주면서 모세와 아론과 회중 앞에서 말했다.

“우리더러 가라고 하신 그 땅에, 우리가 갔었습니다. 그 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땅에서 난 과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고, 매우 큽니다. 또한 거기에서 우리는 아낙 자손도 보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은 네겝 지방에 살고 있고, 헷 사람, 여부스 사람, 아모리 사람은 산악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바닷가와 요단 강 가에 살고 있습니다.”(민 13:27-29 새번역)

이 때 그들이 살 땅을 보기 위하여 갔던 갈렙이 그 마음에 성실한대로 보고했다.(수 14:7)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민 13:30 새번역)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가서 그 백성들과 싸울 것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1-33) 고 말했다.

싸움은 군대의 사기로 하는 것이다. 아낙 자손이 장대게 보이고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보인 것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왜 싸워보지도 않고 전의를 상실했을까? 약졸은 없다. 병졸은 그들을 이끄는 장군만큼 강한 법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 1:21) 독려하였지만 그들 눈에는 그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점령할 수 있다고 했지만 열명의 지휘관들의 말을 들을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이 광야에서라도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왜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하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민 14:2-3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모세를 버리고 ‘우두머리를 세우자.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다.(민 14:4) 반역이 일어난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로라.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는 말씀만으로도 용기를 가졌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두려움에 떨며 자유인의 신분을 버리고자 했다. 하극상의 참극이 벌어지려는 찰나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슬픔에 겨워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했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를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14: 6-9, 새번역)

열 명의 눈과 두 명의 눈 사이에 보는 눈이 달랐다. 열 명은 불신의 눈으로 아낙 자손의 신장을 보았으나 두 명은 약속을 믿는 눈으로 약속의 땅을 보았다. 왜 불신의 눈과 믿음의 눈으로 갈라졌을까? 그들을 이끄는 대장이 사람일 때 인간의 마음엔 불신이 싹트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끄는 대장이 하나님일 때 인간은 용기를 갖는다. 아낙 자손이 정말 네피림의 후손이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없는 눈으로 사실을 보면 때로는 작은 적도 크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고 만나와 그들을 따르는 물이 있었다. 한데 왜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까?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보였던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그들을 따르는 물은(고전 10:4) 한 두 달만 지나면 일상적인 것이 된다. 기적이 일상적인 것이 된 곳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절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적이 일상적인 것이 된 곳에서 구원자를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기적이 아니라 약속의 손을 내미신다. 약속의 손은 절망의 땅에서 잡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의 용기의 동력은 자기개발이지만 성경백성의 용기의 동력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곳에서 성경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약속을 동력으로 삼은 용기 때문이다. 45년 후 갈렙이 85세가 되었을 때 그는 헤브론 지방의 거인들이 사는 지방을 자기에게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한다.(수 14:6-15) 약속을 동력으로 삼는다면 늙어서 육체적인 힘이 없는 때에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온 회중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하였다. 진리냐 거잣이냐가 아니라 항상 수수는 다수에게 핍박을 당한다. 만약 하나님이 진리를 옹호해주시지 않는다면 진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에 주의 영광이 온 이스라엘을 향해 나타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1,12)

모세가 탄원했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민 14:15-16)

하나님께서 마음이 움직이셨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려질 것이다.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29-30)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민 14:42)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한 몇몇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민 14:40) 하며 싸우러 나아갔다. 저들은 언약궤와 모세를 뒤에 두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자 만용을 부려보았으나 아모리 족속이 벌떼 같이 마주나와 저들을 쫓았다.(민 14:39-45; 신 1:44) 땅을 정복하리라하는 약속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약속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자유인이라도 용기를 갖지 못한 자유인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사십 년간 광야를 떠돌며 거기서 죽어야 했다.(민 14:34-37)♧

위 글을 읽으면서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보셨나요?

일요일: 배은망덕의 죄

1. 백성들이 불평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기를 먹지 못한 때문이었을까?

2. 이왕 주시는 음식, 왜 다양하게 공급하지 않으셨을까?

월요일: 지도력에 대한 압박

3. 기적의 딜렘마가 무엇일까?

4. 고기를 주시고는 ‘고기가 잇 사이에 있을 때’(33절)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치셨다.

이것이 징계일까 저주일까?

화요일: 유쾌하지 않은 가족 문제

5. 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까?

수요일: 가나안 접경에서

6. 왜 하나님께서 땅을 정탐하라고 하셨을까?

7. 똑같은 땅을 보고 왜 그들의 보고가 달랐을까?

목요일: 애굽으로 돌아가려함

8. 왜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보였을까?

9. 매일 기적을 보는 자들이 왜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까?

10. 하나님께서 ‘올라가라 얻으라’ 하여 싸우러 갔는데 왜 쫓겨났을까?

  • ?
    해바라기 2009.11.19 11:40
    기적의 딜레마:
    기적의 딜렘마는 그것을 매일 행하면 기적이 되지 않고 특별한 때만 행하면 곧 잊어버린다. 모세가 친히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했지만 그 일이 매일 일어나지 않을 때 그 기적은 나비와 같이 그 마음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만나의 기적 역시 보통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말씀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모든 기이한 행적들은 잊어버리고,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걱정하였으니, 그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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