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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교과 공부를 참고하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새 해에 넘치는 주님의 축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애용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금년에는 정말 참 포도나무 열매를 우람하게 맺도록 합시다. 주님이 진정 나의 생명이 되시면 참 포도를 맺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총 론

“성령의 열매는 …”

한 여성 운전자가 차를 몰다가 뒤따라오던 경찰차에 의해 갓길에 세워졌다. 경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권총을 빼들었다. 그 여성 운전자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당신이 신호도 주지 않고 함부로 차선을 바꾸고, 다른 운전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의 말이 끝나자 운전자가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걸 가지고 경찰이 권총을 빼들어요?” “당신 차 뒤 범퍼에 ‘크리스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에 분명히 도난차량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웃지 못할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바대로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삼아야 함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공적인 장소에서나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 열쇠를 이번 기 교과의 주제 성경절인 갈라디아서 5:22~23에서 발견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 곧,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내어맡긴 사람들의 삶에 맺히는 열매가 과연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보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결과이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는(the fruit of the Spirit is)…”이라고 말한 사실을 주목해 보라. 그는 성령의 열매를 단수(單數)로 취급하였다. 성령의 열매는 제각각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분리된 속성들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실체임을 지적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속에 행하시는 성령의 창조적 사역으로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여러 단면들을 가진 보석과도 같다. 각 면마다 예수님의 품성의 속성이 나타나고, 그분께서 우리의 삶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특성들이 나타난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실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

이번 기 교과를 통해,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열매에 대해 ‘연구’를 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이론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는 자는 더 이상 과거의 삶을 답습하지 않게 될 것인데, 그것은 단지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통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사람(요일 3:14)의 삶에 일어나는 “신선한 변화”이다.

이번 기 교과의 목적은 우리가 어떻게 더 오래 참고 더 사랑하며 더 온유하고 충실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오래 참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온유하고 신실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더 닮아가도록 성령님께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느냐에 그 초점이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열매의 특성들을 나타내야 하겠지만 특히 가정에서 그러해야 한다. 자아에 대해 기꺼이 죽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복종의 정신이 바로 그 핵심 열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거두는 수확이 많든 적든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덮어 주시는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가운데 이 모든 일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의 “열매”이지 결코 구원의 수단이 아님을 잊지 말자. 구원은 언제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며, 그분의 행하신 일을 우리가 믿음으로 주장할 때에만 베풀어지는 것이다.

리처드 오필(Richard O'Ffill) 목사는 저명한 저자와 강사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교회를 섬겨 왔으며, 대총회 본부에서도 7년간 사역하였다. 그는 현재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다.

 

1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5분)

기억절: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연구 범위: 눅 13:7~9, 요 11:4, 12:28, 15:1~10, 딤후 3:5.

안식일 오후

주님께서 주신 가장 감격스런 약속 중 하나는, 만일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번 기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의 다양한 면들을 공부할 것이다. 놀라운 구원의 계획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약속이 정말 나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가? 성경은 ‘예’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빌 1:6). 그분의 이 말씀을 기억하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그리고 가장 좋은 소식은 성령께서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시는 선한 일이 단지 현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교과에 인용된 예언의 신의 증언들과 재림교 성경주석의 엘렌 G. 화잇 언급 부분은 영문 페이지로 표기됨.)

핵심본문: 마 7:20

학습 목표

깨닫기: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성장은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자아가 아닌 성령 안에서 확신을 경험한다.

행하기: 영적 성장의 동력을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만이 성장의 동력이심

A. 성경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성장이 없음을 가르친다(요 15:5). 어떻게 하면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될 수 있는가? 성장의 과정에서 고통스런 전정은 왜 필수적인 부분인가?

B. 개인적인 성장과 제자도(discipleship)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C. 영적 침체는 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삶에서 침체를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인가?

II. 느끼기: 성령 안에서 확신을 경험함

A. 자아가 아닌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어떻게 확신이 생겨나는가?

III. 행하기: 영혼을 기름지게 함

A. 우리가 자라는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가?

B. 영적 침체와 지체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은 무엇인가?(참조 히 2:3)

C. 기도, 묵상, 증거, 말씀연구, 사색, 성경 암송 등은 우리 삶에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D. 우리는 성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요점: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경험에는 시간이 걸린다. 성장의 동력을 무시하면 침체가 이르러 오고 마침내 파멸을 맛보게 된다. 자아를 바라보는 대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용기와 확신을 갖게 된다.

일요일(12월 27일) “나무는 그 열매로 아나니”(눅 6:44)

“성령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대개 이런 질문은 ‘방언’을 말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들은 방언 말하는 것을 성령의 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떤 외형적 표적이나 이적을 어떤 것의 증거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마태복음 7:21~23에 기록된 그분의 분명한 경고를 들어보라(참조 계 16:14).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부정할 수 없는 이적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지겠지만, 그러한 이적을 행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그분의 신실한 제자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자들이 경건의 모양은 가졌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딤후 3;5)

1. 디모데후서 3:5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오늘날의 형편을 어떻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까?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답: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품성으로의 변화보다는 눈에 보이는 이적 행함을 성령 충만의 증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3~44)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 자신이 고백하는 바를 통해서보다는 그의 됨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봉사를 위해 성령의 선물들이 교회에 주어졌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질 때 삶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 됨됨이를 강조한 말이다. 훌륭한 배우가 마하트마 간디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펼칠 수 있겠지만 결코 실제의 마하트마 간디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선하게 보일 수 있고 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선한 행동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마치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참으로 주의 정원에 심겨진 나무는 영생에 이르는 선한 열매를 맺는다. 그를 두르고 있는 죄들을 이기고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영혼의 전에서 악한 습관들을 말끔히 씻어낸다. 악한 쪽으로 치우친 성향들은 옳은 방향으로 돌이킨다. 나쁜 성벽들과 감정들은 변하여 새로운 행동 원칙이 생기고 품성은 새 표준을 갖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나무에는 거룩한 기질들과 성화된 감정이라는 열매가 열린다. 온전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80)

<부가설명> 우리가 좋은 나무 나쁜 나무라고 할 때 착각하지 않아야 할 것은 같은 종류의 나무가 질이 좋다든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즉 포도나무인데 하품 포도나무라거나 극상품 포도나무라는 뜻이 아니다. 나쁜 나무는 가시나무나 엉겅퀴이고, 좋은 나무는 포도나무나 무화과이다.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당연한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재림성도들이 인식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마가복음의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를 성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무엇이 성화되는 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어떤 씨가 자라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가라지가 자라면서 알곡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자께서 심은 좋은 씨가 자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면 거룩한 씨(사6:13)가 자라는 것이다. 거룩한 씨가 자라기 때문에 성장하는 매 계단마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이다. 이 교과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주장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아무리 좋은 과수라도 어려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그 나무 자체가 거룩한 나무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씨에서 자란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을 오해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진리를 옳게 분변해야 한다.

교훈: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사람도 그 행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월요일(12월 28일)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어린 두 소년이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수영장에 가기 위해 2층 창문으로 뻗어 있는 과일나무를 타고 내려가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 죽은 나무를 베어버려야겠다고 하는 소리를 소년들이 듣게 되었다. 이들은 비상 탈출로가 없어질 것을 걱정한 나머지 가게로 달려가서 인조 사과를 사다가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놀라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배나무에 사과가 열렸지?”

요한복음 15:1~5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참' 포도나무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참조 마 24:24)

요15:1-5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답: 사단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거짓 포도나무를 세상에 두었다. 거짓이 무성한 이 세상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탁월한 영적 식별력이 필요하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2. 요한복음 15:5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실제적인 차원에서 무슨 의미입니까? 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답: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삶은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4절에서 예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설명하셨다.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과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를 생각해 보라. 그 가지에 거의 익어가는 사과가 몇 개 달려 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가지는 곧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과에 빨간 색을 칠한다고 달라지겠는가? 그 잘려진 가지를 땅에 꽂고 물을 주고 거름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지를 땅에 꽂아둔다고 해서 계속 더 많은 사과가 맺히겠는가? 그러니 가지가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의 의미

“가지가 산 포도나무의 한 부분이 된다.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은 가지는 살 수 없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시대의 소망, 675)

<부가설명> 우리가 포도나무 비유를 읽을 때에 열매에 주목하기가 쉬운 것은 예수님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눈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포도나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도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잊으면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실상을 놓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은 가지이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님의 본질을 얻어서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성품(본성=퓌시스)에 참여하는 것이다.(벧후1:4) 그렇게 된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신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마치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 포도나무 가지가 된 사람들이 예수의 열매,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렇게 포도나무가 되지 않은 사람이 포도 열매를 맺으려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노력을 해도 그것은 예수의 열매는 아니다. 이 이치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 이번 교과를 바르게 공부하였으면 좋겠다.

교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한 다른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도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열매 맺는 생애를 살 수 있다.

화요일(12월 29일)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답: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런 결과로서 열매가 맺히는데,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유는 하나님이 포도원 농부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동기로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릇된 이유로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시도할 수도 있는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그분 안에 거한 결과는 열매를 맺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는 우리를 선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1. 이적과 선행으로 가득한 그리스도의 봉사에는 어마어마한 추진력이 있었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온 것이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선행의 동기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까?(요 11:4, 12:28)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답: 예수께서는 순수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일하셨다. 그분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만약 교회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지역사회에 뭔가 봉사할 방법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여러 면에서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하기 쉬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미명 아래 자신을 드러내기가 쉽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통하여 당신의 품성의 거룩함과 자비와 동정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추종자들 속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난바 된 그와 같은 긴요한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대들은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677)

<부가설명>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또 그렇게 부추기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여 완전하여지려고 도로(徒勞)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 재림하기 전에 성품이 완전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 가지이기 때문에 포도나무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 이해인가. 그것이 포도나무 가지이기 때문에 포도 열매를 맺는다. 당연하지 않는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추종자들 속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난바 된 그와 같은 긴요한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대들은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는다." 이렇게 열매를 많이 맺으면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이(요15:1) 얼마나 기뻐하실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옳은 일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수요일(12월 30일)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요 15:2)

1.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 우리 삶에서 이와 같은 전정(剪定)의 과정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한 전정의 경험을 당신은 가져보았습니까? 그 과정이 끝났을 때,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이기심을 깎으시며 고집을 꺾으신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겪은 전정의 경험을 나누어 보자.

추수의 계절이 끝나면 농부는 포도밭에서 대부분의 포도나무를 전정한다. 다음 해의 수확은 어떤 가지를 남겨 두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농부는 신중하여야 한다. 전정의 비결은, 수확과 포도나무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가지를 너무 많이 남겨 두거나 너무 적게 남겨 두어도 안 된다. 전정을 충분히 하지 않으므로 열매가 너무 많이 맺히게 되면, 그 이듬해 포도나무의 성장은 약해지고 수확량도 떨어지게 된다.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기술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시험의 자리에 두심으로 그들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신뢰하는지를 보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주 인간적인 연결을 끊으시고 사람들이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변경시키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영적 혹은 세속적 관심사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경험과 모순이 될 수도 있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정로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수도 있다.

시험은 이 땅에서 천국에 이르는 날까지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국에 이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 부른다. 성품은 시험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의 외형을 붙잡고 있는 많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성향 즉 자신의 길과 교만과 야망을 고집하는 성향에 의해 방해받게 될 것이다. 주님의 허락에 의해 매서운 시험이 그들에게 닥칠 때 그들은 참된 신앙의 결핍과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의 부족을 느끼고 성령의 필요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하늘 처소에서, 266)

하나님의 손에 들린 전정의 칼

“예수께서는 엄숙하고도 친절하게 농부의 의도를 설명하셨다. 가지를 치는 일은 고통을 유발할 것이지만 칼을 대시는 분은 아버지시다. 아버지께서는 난폭한 손으로나 무관심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땅에 늘어지는 가지들이 있다. 이것들은 줄기가 땅에 붙지 않도록 잘라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하늘로 뻗어 나아가야 하며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과실에 전달해야 할 수액을 소모해 버리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 버려야 한다. 너무 자란 것들은 잘리움을 받아서 의의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농부는 과실이 더욱 알차고 더욱 많이 열리도록 하기 위하여 해롭게 자라나는 곳을 잘라 버린다.”(시대의 소망, 676)

<부가설명> 전정은 한 나무에서 쓸모가 없거나 해로울 가지들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가지인데, 전정을 하는 것은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 중에 열매 맺지 않거나 열매를 맺는데 방해되거나, 포도나무 자체를 해롭게 하는 가지들을 잘라버리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 말씀을 읽어보면 깨끗하지 않아서 잘려나가는 가지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요13:10,11을 보라.)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일차적인 적용은 우리 개인의 어떤 허물들을 잘라낸다는 의미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드러내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들을 하나님께서 잘라내실 것임을 가르치는 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고 잘라내게 하신다는 사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그러므로 가지를 자른다는 것을 개인이 가진 부적절한 것들을 자른다는 것에만 적용하는 것은 이 본문을 올바르게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내용을 잘 검토하여 기본적 적용과 부수적 적용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시련의 전정을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다.

목요일(12월 31일) “실과가 열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눅 13:9)

1730년부터 1745년 사이에 미국에는 ‘대각성’으로 불리는 영적 부흥이 북부의 메인 주부터 남부의 조지아 주까지 동시에 일어났다. 이 영적 회복 운동의 지도자였던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1741년 7월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는데, 그 설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잔혹하고 무서운 지옥의 모습을 연상시켜 주었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설교는 죄의 무서운 무게를 잘 표현해 주었고 죄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태도를 나타냈으며, 심판의 확실성을 드러내 주었다.

1.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1~10에서 열매 맺는 일에 관하여 어떤 균형 잡힌 개념을 제시하셨습니까?

요15:1-10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답: 열매를 맺는 자연스런 법칙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분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 안에 거하기만 하면 풍성한 수확을 보증하셨다.

예수께서는 만일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전가된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증을 얻게 된다. 한편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그런 자들은 말라지고 마침내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참조 벧후 3:9)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한다는 뜻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요일5:11,12)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면 그 생명이 나를 생활하게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가된 그분의 의"라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배울 때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마치 예수님의 성품과 완전한 도덕적 선행을 나의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나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나의 것이 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이 전혀 나의 생명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성품과 완전한 도덕적 선행을 그냥 나의 것으로 여겨주기 때문에 구원의 확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했으면 그는 여전히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며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자일뿐이다. 우리는 생명을 얻은 자인가? 아니면 그냥 예수님의 성품과 그분의 모든 선행을 공짜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인가? 성경은 도덕을 말하기 전에 생명을 계시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2. 누가복음 13:7~9의 비유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눅13:7-9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답: 열매 없는 과일나무는 찍어버림을 당한다.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 속에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한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분 안에서 소유한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 준다. 열매를 맺는 것은 받은 구원에 대한 외적 표현이다. 그것은 구원 얻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가 이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다는 생각 때문에 교만해지거나 우리의 수확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 때문에 실망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저주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바로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무성한 잎사귀로 의기양양하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상징이었다. …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총애를 받아왔으며 다른 모든 백성들보다 의로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탐냄으로써 부패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하나님의 요구에는 무식하였고 위선으로 충만하였다.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이 그들은 거만한 가지들을 높이 뻗고, 외모로는 화려하고 눈에는 아름다웠으나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장엄한 성전과 신성한 제단, 관을 쓴 제사장들, 인상 깊은 의식들을 가진 유대인의 종교는 과연 외모로는 아름다웠으나 겸손과 사랑과 자비는 부족하였다.”(시대의 소망, 582)

<부가설명> 성경은 어디까지나 열매라고 한다. 열매는 나무의 결실이다. 포도를 맺으려면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열매보다 먼저 나무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무는 예수님이다. 우리는 그 예수님께 붙은 그 나무의 가지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 나무에 붙은 가지라면 그도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 나무의 가지는 되지 않고 예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 과연 열매를 맺을까? 이 교과의 저자가 한 이야기대로 배나무에 플라스틱 사과를 매달아놓고 열매를 맺은 산 나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확실히 붙은 가지이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맺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열매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 나무는 당연히 그 나무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교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구원의 결과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금요일(1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구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는다. 저들의 생애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선한 일이 이뤄진 것과 성결에 이르는 열매를 맺은 사실을 증거할 것이다. 저들의 생애는 향상될 것이며 순결하게 변화될 것이다. 바른 행실은 참된 경건의 틀림없는 열매이며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저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고 말씀하셨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329)

“교회와 연합했으나 주님과 결합하지 않은 모든 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품성을 드러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마 7:16). 그들은 경건의 소중한 열매인 절제, 인내, 친절, 사랑, 자선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가시와 엉겅퀴만을 맺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공언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으신다.”(엘렌 G. 화잇,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 9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일요일 교과에서 살펴본 대로, 실제로 선하게 되는 것과 선하게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 실제로 선하게 되는 것은 나무가 되는 것이고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나무가 되지 않았으나 그 나무의 실과를 모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식물 나무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서 예수 나무가 되어야 한다.

2. 교회에 등록했으나 주님과 결합하지 않은 자들은 조만간 그들의 실상을 드러낼 것이라는 엘렌 화잇의 진술을 주의깊이 읽으십시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자신이 참으로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교인이 된 것과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이런 교인들이 있으면 교회는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주님의 영광이 빛날 것이며 주님의 사랑이 넘칠 것이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정말 참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주님께 나를 맡길 때 주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정말 참 포도나무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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