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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1:3)

to be or not to be

섹스피어의 『햄릿』 3장 1막에서 햄릿이 읊조린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이 꽂힌 고통을 죽은 듯 참는 것이 과연 장한 일인가. 아니면 두 손으로 거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저 칼 한 자루로도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장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한 불안, 한번 나그네 길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미지의 나라가 사람의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것. 알지도 못하는 저 세상으로 달아나느니 차라리 이대로 이 세상의 고통을 참고 견디기 마련이지.”

위의 대사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을 향해 복수의 칼을 드느냐,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사느냐’ 사이에서 고뇌하는 햄릿의 탄식이다. 여기서 세익스피어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상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는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 있다.

햄릿은 죽기 전에 잔인하고도 교만한 죽음에 대해 말한다.

“아, 죽음이라고 하는 저 잔인한 병사가 끈질기게 뒤따라오지만 않는다면…너희들에게 말해 줄 수 있으련만. 그러나 속수무책이구나.”

끈질기게 따라오는 죽음이라는 잔인한 병사에 대항하여 거센 파도처럼 저항하는 힘이 무엇일까? ‘죽느냐 사는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대사는 모든 인간에게 ‘존재냐 비존재냐’를 묻는 질문이다.

햄릿이 말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존엄한 유해라고 해도 나중에는 한 줌 흙으로 지금쯤은 아마 술단지 마개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하고 죽은 뒤에는 반드시 흙덩이가 된다면 살아 있는 인간도 결국은 흙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 있으나 비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한데 왜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는가?

생명

미국 항공우주국이 1960년대에 화성탐사 계획을 세울 때 거기에 참석했던 러브록은 ‘만일 그곳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구조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과연 생명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외계탐사를 위해서는 먼저 생명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많은 노력 끝에 생명체란 비평형상태 즉 낮은 엔트로피 상태라고 결론지었다.

모든 물질은 에너지가 가해지지 않는 한 무질서의 도가 높아지면서 평형상태를 유지한다. 평형상태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각 기관들이 그들이 가진 정보에 따라 협력하는데, 이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가해져야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24시간 내내 비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불을 지피는 생명의 불쏘시개가 무엇일까? 그게 바로 생명(生命), 즉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닐까?

오래전에 영화배우 박노식씨가 제약회사 광고에서 어린 아들 박준규의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했지만 그게 어디 박노식 씨의 소원뿐인가?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소원은, 재물도 명예도 아닌, 오직 자식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튼튼하게만 자라 달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아들이 어떤 세파에도 굴하지 않고 살 힘을 얻듯이 인간은 ‘피투성이라도 살라’(겔 16:6)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죽음이라는 잔인한 병사가 끈질기게 추적할지라도 끝까지 도망치려 안간힘을 다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삶의 의욕을 불지펴주는 ‘살라’는 명령, 이것이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살라’는 명령은 분명히 생명의 말씀이다. 하지만 아무나 그 말을 했다고 하여 그것이 생명의 말씀일까?

딸이 자동차 사고로 의식이 오락가락할 때 나는 딸이 살아주기만을 바랐다. 난 그 때 아이가 살기만 한다면 불구라도 좋고 식물인간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의식을 점점 잃어갈 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안 돼! 넌 나보다 먼저 죽어선 안 돼! 그건 너무 나쁜 거야!’ 아무리 외쳐도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다. 왜 아비가 그렇게 외치는데도 아이가 죽었을까? 왜 나의 말엔 능력이 없을까?

2007년 어느 날 ‘퇴임 뒤 귀향하면 숲 가꾸기 사업과 습지 생태계 보전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봉하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마을 곳곳은 잔디로 뒤덮여 흙을 밟기가 힘든 생태마을로, 뒷산인 봉화산은 웰빙 숲으로, 마을 앞 화포천은 습지생태 체험장으로 개발되고 문화 센터가 들어섰다.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에 봉하 마을에는 총 450억이 투자됐다.(2008년 1월 23일 donga.com)

“항만까지 1분이면 될 거리인데 전봇대 때문에 블록을 이송하려면 1시간 넘게 걸리는 게 말이 됩니까?” 대통령 당선자의 이 말 한마디에 수년 동안 관계 부처에 호소해도 옮겨지지 않던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안에 있는 전봇대가 단 사흘 만에 옮겨졌다. (2008년 1월 20일 chosun.com)

나의 말은 전혀 능력이 없지만 대통령이 넓은 들을 보면서 ‘여기 건물을 지어야겠다’고 한 마디 말을 하면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즉시 건물이 들어선다. 권력자의 말엔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소녀에게 달리다굼하시니 소녀가 살아났다(막 5:41) 죽은 지 사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나사로가 살아났다.(요 11:43)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다.(눅 7:14) 요한은 예수 안에 있는 이 생명을, 듣고 보고 만져보았다고 증거 한다. 간절한 소원을 품은 아비에게 없는 생명을 어떻게 요한은 예수에게서 듣고 보고 만져보았을까?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가진 그는 누구일까? 말로 딸을 살리는 일에 실패한 나는 생명의 말씀을 가지신 그분을 탐구하기로 작심했다. 과연 나도 그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져 알 수 있을까?

생명과 기쁨

딸의 이름은 수희(繡喜)였다. 아빠의 마음에 기쁨을 수놓았다고 하여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다. 생명의 특징은 기쁨이다. 수희가 죽자, 내 마음에 놓였던 기쁨의 수(繡)는 한 순간에 흩어져버렸다. 장례식장은 울음바다였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선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죽음은 슬픔을 가져오지만 생명은 기쁨을 가져온다. 만일 생명이 기쁨을 일이키지 못한다면 인류는 벌써 멸절되었다. 생명의 기쁨으로 인하여 땅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지칠 줄 모르는 것이다.

장옥정은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여 자의대비를 웃전으로 모시지만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난다. 1683년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자의대왕대비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설득하여 장옥정을 재입궐 시키고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옥정을 후궁으로 봉하여 창경궁의 취선당을 처소로 내준다.

1688년 장옥정이 장남 윤(昀)을 낳자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고 그의 부모인 장형(張炯)과 윤씨를 각각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과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에, 그리고 그의 오빠들을 포도대장, 총융사, 한성부 좌윤 등 고관의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생명을 낳는 일은 기쁨을 충만케 하고 사귐을 보장한다.

요한이 고백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기쁨이 충만한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과연 우리도 생명의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도 그 충만한 기쁨으로 생명을 듣고 보고 만져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요한 서신이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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