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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4분)

 

기억절: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연구범위: 출 20:1~17, 롬 6:17, 살후 2:10, 히 13:2, 요이 1장, 계 2:14~15, 14:12.

 

학습 포인트: 요한이서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어떤 면에서 비슷한가? 요한은 ‘사랑’의 개념을 ‘진리’의 개념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 계명들을 지키는 것과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한은 왜 거짓 가르침의 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였는가? 요한은 왜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는가?

 

안식일 오후

요한의 두 번째 서신은 여러 면에서 첫 번째 서신과 비슷하다.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고, 같은 주제가 등장하며, 신자들에 대한 동일한 관심사가 나타난다. 개인적인 관심이 두 서신에서 모두 발견된다.

그러나 두 번째 서신은 첫 번째 서신과는 대조적으로 서언과 결어의 형식을 갖춘 전형적인 편지의 형태로 쓰였다. 본론 부분에는 칭찬과, 사랑하며 계명에 따라 행하라는 권면과, 적그리스도들에 관한 경계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가 분량이 짧은 것은 아마도 파피루스(종이)의 크기에 맞추어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용할 단어를 조심스럽게 선택했을 것이 분명하다.

 

핵심본문: 요한이서 1:6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사랑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오류와 이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 교과 개요 >

I. 깨닫기: 사랑과 진리

A. 요한이서의 주제는 진리와 사랑이다. 이 둘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또한 요한일서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B. 사랑이 없이 진리가 표현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와 반대일 경우는 어떠한가?

C. 요한은 이설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르쳐 준다. 요한이 제시한 방법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II. 느끼기: 사랑과 진리에서 비롯된 기쁨

A. 순종을 배양하기는 쉽지 않다. 사랑은 어떻게 우리를 순종으로 이끌어 주는가?

B. 사랑과 진리에 근거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 묘사해 보라.

 

III. 행하기: 이설에서 멀리 떨어짐

A.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이지만,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거리를 두어야 할 때도 있다. 이설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은 무엇이며,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요점: 요한은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준다. 오류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며, 또한 다른 이들도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일요일(9월 13일) 사랑과 진리 안에서

 

1. 요한이서를 읽으십시오. 요한일서와 유사한 점은 무엇입니까? 요한이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답: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같이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성도에게 보낸 편지로, 계명을 좇아 행하고, 적그리스도들을 가까이 하지 말며, 특히 '진리'와 '사랑' 안에 행하라는 권면이 담겨 있다.

 

요한이서를 대충 훑어보더라도 이 서신이 한 부녀에게 보내졌다기보다는 신자들의 무리에게 보내졌음을 알 수 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교회를 여자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엡 5:22~23, 계 12:16).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신자들은 문자 그대로 어린 자녀들이 아니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다.

 

2. 요한이서 1:1~4을 읽으십시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는 무엇이며, 요한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참조 살후 2:10)

요이1:1-4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답: 진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타난다. 이 진리는 사랑과 함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요한이서 1:1~4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사랑’이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 보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는 참된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단지 정서적으로 혹은 감성적으로나 피상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진리’라는 틀 안에서 표현된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과 진리이신 예수님(요 14:6), 그리고 성령님을 떠올리게 된다. 성령께서 신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듯이(요 14:16) 진리도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한다(요일 1:2). 진리와 사랑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함께 그리스도인 믿음과 경험 가운데 머물도록 이끌어 준다.

동시에 진리와 사랑은 요한이서의 주요한 주제를 이룬다. 사랑은 5~6절에서 좀 더 깊이 논의된다. 진리는 기만과 그 결과를 분별하고(7~8절),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거하게 하는 데(9~10절)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씀하심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크신 지혜를 가지고 깊은 주의와 친절한 태도로 하셨다. 무례하지 아니하시고 가혹한 말을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케 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약점을 비난하지도 아니하셨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써 하셨다.”(정로의 계단, 12)

 

<부가설명> 사랑과 진리, 이것은 요한복음 1:14에 육신이 되신 말씀에게 있는 은혜와 진리와 같은 사상이다. 이것은 언약궤를 통하여 표상적으로 계시해주신 진리인데, 언약궤의 겉은 순금이다. 누구든지 언약궤를 본다면 순금의 아름답고 찬란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들어있다. 계명은 진리의 축소판이고 겉에 입힌 순금은 사랑의 상징이다. 진리를 사랑을 생산한다. 예수님이 진리이시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도 진리이시다. 이 여호와라 이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은 사랑을 생산하고 실현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요일3:14) 그래서 진리와 사랑은 함께 일하고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랑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진리를 거스르고 부인하면서 인정으로 나타나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사랑은 아니다. 진리가 빠진 사랑은 생명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사랑하라는 그것을 인간 사이에 있는 감정적인, 인정에 호소하는 그런 사랑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사랑은 성경의 진리의 속성이기 때문에 이 진리를 떠난 사랑은 세상적 사랑이다. 이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진리와 사랑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솟아나야 한다.

 

교훈: 요한이서에 자주 반복되는 두 단어는 진리와 사랑이다. 이 두 단어는 참된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상호 보완적 작용을 한다.

월요일(9월 14일) 계명들을 좇아 행함(요이 1:4~6)

 

4절의 내용은 교회와 요한에게 용기를 주었다. 교인들은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다”는 장로의 말을 듣고 격려와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 진리 안에 행하라는 계명은 요한일서 3:23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도 호소한다.

 

1. 사랑과 계명은 어떻게 서로 연결됩니까? 요한이서 1:5~6을 보십시오. 왜 이 말씀은 특히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중요합니까?(참조 계 14:12)

요이1:5,6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답: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요이 1: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요한은 기쁨을 표현한 다음(4절), 요청과 권면의 말씀을 덧붙인다(5~6절). 요한은 다시 계명에 대해 이야기한다(5절). 그런데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요한은 계명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옮겨가는데 참으로 그 계명 자체가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6절에서 그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계명들(복수)이라는 말과 연결시킨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계명이 있는데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 사랑은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나타난다.

 

2. 계명들을 지키는 것(출 20:1~17)이 어떻게 상호간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까?

 

 

출20:1-17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지니라 14 간음하지 말지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답: 하나님의 계명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계명의 근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율법과 규례, 혹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지켜나가는 것이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이치에 정확히 맞다. 사랑은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요,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참된 사랑은 단순히 십계명에 순종하느냐하는 것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참된 사랑은 율법에서 발견되는 원칙들과 분리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은 계명에 순종하게 함

“순종은 그 같은 사랑을 드러낸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게(요일 2:3) 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40)

 

<부가설명> 사랑과 증오 또는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상태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를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해관계이고 하나는 사랑관계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해관계에 속한다. 이 관계는 이로우면 친밀하고 해로우면 멀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이해관계를 뛰어넘는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신 그것은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나타난 사랑의 형상이다.

십계명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그것이 바로 관계에 대한 내용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그래서 계명과 진정한 사랑의 속성이 동일한 것이다. 최소한 십계명이 가르치는 사항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을 결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소한의 표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적어도 이것은 하는 사람이며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관계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의 최고 경지이다. 이것이 새 계명이다. 사랑의 최소한의 표준도 이행하지 못하면서 최고의 표준을 들먹이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잠꼬대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화요일(9월 15일)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침(요이 1:7~9)

 

1. 요한이서 1:7~9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요한은 무엇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까? 그가 경고하는 것처럼 기만에 빠질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까?

요이1:7-9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답: 미혹하는 자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 미혹에 빠지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도들이 한 일을 잃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된다.

 

요한이서 1:7~9에서 요한은 거짓 교사들과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의 문제를 다시 언급한다. 이것은 이미 요한일서에서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그들 자신이 ‘미혹하는 자’가 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물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이들도 있었으나(4절), 목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떠나간 이들로 인해 애통해 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적그리스도들의 견해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크게 달랐다. 교인들은 그들과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물들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만 하였다. 여기서 요한은 신자들도 길을 잃을 수 있으며,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요한이서 1:9을 읽으십시오. 그는 바른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참조 마 16:12, 행 2:42, 롬 6:17, 계 2:14~15)

요이1: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마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계2:14,15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답: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 즉 그릇된 교리를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그분과 분리된 삶을 살게 된다.

요한은 교리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거짓 가르침이 한 사람의 영생을 잃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리는 중요한 것이다!

이 구절에는 도전 받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신실하게 머무른 자들 속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가 있다. 여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등한 분으로 제시되어 있다.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릇된 교리의 위험성

“사단이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힘을 얻는 것은 거짓 교리와 유전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성실을 통하여 사단이 그의 힘을 어떤 범위까지 펴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교회에서까지 여호와의 율법을 떠나서 그릇된 표준을 세웠다. 사단은 그 모든 일에 그의 세력을 장악하여 왔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그릇된 표준으로 이끌므로 그는 인간의 품성을 그릇되게 형성시키고 인간에게 자신을 최고의 존재로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복음전도, 589)

 

<부가설명>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물으셨다. 이것은 읽는 사람이 읽는 글에 대한 시각을 묻는 것이다. 같은 성경말씀을 읽는데 서로 상반된 결론에 이른다면 그것들이 다 옳은 것이 아닐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런 결론을 공유할 수도 있지만 명백한 내용에 그런 결론을 낸다면 누군가는 성경의 본의와 다른 사상으로 성경을 읽은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명백히 지적한다. “지내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교훈보다 축소해서 생각하거나 과대하게 생각하거나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4:6)고 표현하였다.

아주 쉬운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성경이 계시한 안식일은 제칠일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읽고 첫째 날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라든지,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고 했는데(겔18:4) 그 죽는 것은 영원한 지옥불의 고통을 뜻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 등이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말씀이 말하는 그대로 깨닫는 은혜가 필요하다. 그것을 지나쳐가면 그리스도의 교훈을 떠나는 것이며 기록한 말씀 밖으로 나가는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견해를 거절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게 하고 마침내는 영생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바른 교리는 중요한 것이다.

 

수요일(9월 16일) 환대하지 말라?(요이 1:10~11)

 

1.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을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여깁니다(히 13:2, 벧전 4:9).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바르지 못한 신학이나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초대받은 사실과 요한이서 1:10~11에서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참조 마 10:14~15, 18:15~17)

요이1:10,11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마10:14,1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답: 남을 대접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거짓 교사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거짓 교리를 돕는 행위가 된다. 요한이서 1:10~11에서 말하는 요점은 남을 대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거짓 교사들을 대접함으로 그들이 전하는 거짓 교리를 돕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물론 환대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좋은 덕목이긴 하지만, 만약 그 환대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거짓 교리를 돕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주후 1세기에 교사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르쳤고 숙식을 제공하는 교인들의 집에 함께 머물렀다.

만약 이러한 교사들이 거짓 교리를 퍼뜨릴 경우에,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들의 사역을 돕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사도들의 가르침과 거짓된 견해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는 교인들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인이 거짓 교사를 자기 집에 들이는 것을 보면서 혼동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요한은 이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그들과 어떤 접촉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행동이 진리와 반대되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매우 조심해야 한다.

10절과 11절은 개인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전체 교회의 태도에 관한 것이며, 10절에 나오는 “집”은 개인의 집이 아니라 교인들이 만나 예배드리는 곳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교회는 이설을 가르치는 자들을 독려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거짓 교사를 환대하는 것은 그가 제시하는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설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는 이 주제가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단 이설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도 비판적이고 거만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요한은 우리에게 진리와 오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거짓 교사들을 경계할 것

“나는 막을 수도 있는 이 문을 막지 않으므로 인하여 원수가 들어와 양 무리를 혼란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천사에게 어떻게 하면 그 문을 닫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천사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난처를 삼아야 하고 지금까지 무시되고 등한시 되었던 복음의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믿음으로 연합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나는 사도 시대 교회가 거짓 교사들에 의해 기만을 당할 뻔했던 것을 보았다.”(초기문집, 100)

 

<부가설명> 문제는 우리 성도들이 우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경진리를 정확하고 확고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말씀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하려는 노력을 별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들은 몰라도 불편하지 않으면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진리를 정확하게 몰라도 예수를 믿고 사는 일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가 듣지 못했던 이상한 교훈을 들으면 귀가 솔깃해진다. 그래서 빨려 들어가고 그것을 가지고 잘 배우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우리교회의 진리를 비판한다. 이런 사람들을 더러 만났었다. 그러므로 우리성도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확실히 성경적인 것인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벧전3:15) 이것이 증인의 모습이다. 이런 정신으로 굳게 서고 또 요한의 권고대로 이단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겸손하고 진지하게 배우려고 할 때는 환영할 것이지만 자기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보내는 것이 요한 2서 적이다. 즉 성경적이라는 말이다.

 

교훈: 환대를 베푸는 일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거짓 교사들을 환대하는 것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목요일(9월 17일) 서로 교통함(요이 1:12~13)

 

12절과 13절은 요한이서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이 구절들은 이 서신의 결론으로, 독자들에 대한 요한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무엇이며, 그가 얼마나 간절히 신자들을 직접 만나기 원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 요한이서 1:12~13에서 요한의 의지를 살펴보십시오. 서신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에 비해 직접 대면하여 만나는 것의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표현에서 그가 왜 그들을 만나기 원하는지에 대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참조 행 2:42~47)

요이1:12,13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행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답: 요한은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가 가서 성도들에게 진리를 확증할 것이며 그 결과 진정한 친교의 기쁨이 넘칠 것을 기대하였다.

 

요한이 전달한 기별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특히 요한이 적그리스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전혀 타협이나 양보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엿볼 수 있다.(갈 1:6~9)

요한은 자신의 기별을 구두로 전할 수도 있었으나, 기록된 형태로 전함으로써 좋은 점도 있었다.

1. 사도들에 의해 쓰여진 편지는 특별히 중요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신중하게 받아들여졌다.

2. 편지는 방문하는 것보다 독자들에게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상황이 중대할수록 신속한 반응이 요구되었다.

3. 기별은 다른 교회들이나 같은 상황에 처할 후세대를 위해 보존되었다. 실제로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다른 교회들과 나누라고 하였다.

4. 편지는 매우 주의 깊게 구성되기 때문에 말로 진술하는 것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

5. 성령께서 글 쓰는 이로 하여금 바르게 기록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전히 그들과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원하였다.

 

만남을 통해 깊어진 성도의 교제

“성령의 강림 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구주,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 되는 영혼들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하여 나아갔다. 그들은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부드럽고 사려 깊었으며 자기를 부인하였고 진리를 위하여 어떤 희생도 불사하였다. 매일의 상호 교제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내도록 명하신 사랑을 나타냈다. 이기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붙이고자 노력했다”(교회증언, 8권, 240)

 

<부가설명> 말씀과 영이 통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기쁨이 있다. 요한은 일서에서 사귐에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성도들이 서로 만나면 세상에서 사는 애환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나누는 기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깨달은 바를 나누고 증거한 일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여 하늘가는 길동무로서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곳이 바로 주님이 함께 계시는 천국의 분위기가 된다. 요한은 우리의 사귐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 분위기를 주장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안식일마다 넘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요한은 편지로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바랐다. 성도의 교제는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다.

 

금요일(9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갈라디아서 2:11~16, 디모데전서 4:17, 디모데후서 2:14~19, 요한계시록 2:13, 12~16, 18~25.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공손함을 나타내는 한편, 죄와 죄인을 그대로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 일치하는 행동이라고 그는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시고 구원하고자 애쓰신 영혼들을 우리가 사랑하되 그 죄와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역하는 자들과 연합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그 시대에 그랬듯이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도 영혼을 파멸시키는 오류에 대항하여 의를 위해 굳게 설 것을 요구하신다.”(성화된 생애, 65)

“세상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교육, 5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리나 가르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친절하고 포용적이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그것은 바른 사상이 아니다. 바른 자리에서 포용하고 친절해야 한다. 그릇 가는 것을 포용하고 친절하면 그 그릇하는 것을 도우는 것이며 같은 허물에 참여하는 것이다.

 

2. “진리란 무엇입니까?” 교과반에서 각자의 견해를 묶어서 하나의 완전한 정의를 완성해 보십시오.

* 완전한 정의를 교과반에서 할 수 있을까? 성경의 정의를 따른 것이 바른 것이다. 진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그 말씀을 요약한 십계명이 진리이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진리가 될 수 없다.

 

3. 방황하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줄 수는 없을까요?

*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씀으로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접근하는 사람의 정신이 정죄의 정신이 있을 때이다. 예수님은 정죄 대신에 용서를 선언하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사랑으로 부탁하셨다.

 

4. 우리 교회는 대체로 얼마나 접대를 잘 합니까? 우리 교회가 이 분야에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 각자가 속한 교회에 대하여 각자가 대답을 해 보자.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참된 친교의 아름다움과 이단을 대하는 지혜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였다. 고칠 마음이 없는 이단은 집에 들이지 않는 것이 합당한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도 사이에 참된 친교가 하늘까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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