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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선한 것을 본받음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삼 11-

선(善)이란

인간은 일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별히 사는 날에 의해 판단된다. 일상은 관습을 따르지만 특별한 날은 계획적이다. 만일 인간이 하루를 일하고 엿새를 쉰다면 인간은 그 하루 하는 일에 의해 판단이 된다. 만약 하루를 쉬고 엿새를 일한다면 인간은 하루 쉬는 그 쉼에 의해 판단이 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를 쉬게 하실 때 인간은 그가 쉬는 쉼에 의해 판단되도록 결정되었다. 인간은 그가 쉬는 쉼에 의해 판단되는 존재다.

만약 그가 쉬는 쉼으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된다면 어떤 쉼을 쉬어야 인간의 가치가 드높아질까? 골프를 쳐도 쉼은 온다. 집에서 TV를 보거나 신문 잡지를 보면서 쉴 수도 있다. 백화점에 다니면서 눈요기하는 것도 쉬는 방법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쉬는 일이다.

인간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시든 장미꽃 같이 된다.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비로소 쉴 수 있다. 한데 왜 사랑하는 일이 쉼이 될까? 만일 사랑이라는 것이 쌀 포대에서 쌀 한줌 덜어내면 쌀 한줌 자국 나듯이 사랑 한줌 주고 나면 사랑 한줌이 모자라는 것이라면 누가 사랑을 하려하겠으며 어떻게 그러한 사랑을 받겠는가? 사랑은 주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준 사람은 준만큼 부요해지고 받은 사람은 받은 만큼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인간에게 사랑받는 방법으로 주신 명령이다.

인간이 만든 많은 단어들 중에 가장 성공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예술가도, 문학가도,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으로부터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말한다. 인간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소금에 절인 배추 같다가도 사랑을 받으면 물오른 꽃잎처럼 활짝 핀다. 그러나 사랑처럼 눈물을 자아낸 단어도 많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에 생기가 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랑을 말하면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도 있다. 사랑은 주면 준만큼 풍요로워지고 받으면 받은 만큼 부요해지는 것인데 왜 그것이 눈물의 씨앗이 될까?

사랑은 나누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누고 나면 양쪽 다 못 쓰고 망가지는 것이다. 나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주면 준만큼 풍요로워지고 받은 만큼 기쁘지만 반쪽 사랑을 주어서는 전혀 안 받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잘못주면 안 준 것만 못한 것이다. 하여 성경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은 온전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미국에는 ‘화해를 위한 살인피해자 유족회’가 있다. 거기에 가입하려면 가족 가운데 살해된 사람이 있어야 하며, 사형 제도를 반대해야한다. 미국 사형제도폐지 연합의 의장인 레이첼 킹이 이들 회원들의 이야기를 모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라는 책을 만들어 냈다.

“헤이디가 곤히 잠자고 있는 남편과 저를 깨운 건 새벽 4시쯤이었어요. 우리는 손전등을 들고 탠트로 달려갔어요.... 텐트에 다가가 남편이 텐트 위로 손전등을 비추는데 그 순간 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누군가 수지가 자고 있는 쪽 텐트를 찢었는지 그 쪽에 구멍이 커다랗게 있었거든요. 구멍 난 쪽 땅바닥에는 수지가 늘 안고 자던 인형이 떨어져 있었구요. 식구들이 수지를 부르며 정신없이 찾기 시작했어요.”

결국 수지는 스물다섯 살의 잡역부인 리처드 매카시에 의해 유괴된 뒤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수지의 부모는 그 살인범을 용서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에는 용서를 뛰어넘는 이야기도 있다.

“전화를 끊기 전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사랑해요’ 라고 대답했지요.”

이 말은 사랑하는 연인들의 대화가 아니라 경찰관 남편을 죽인 피해자와 살인자의 대화이다.(레이첼 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20,72쪽)

우리는 조그만 잘못도 용서하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식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으며, 남편을 죽인 살인범을 사랑할 수 있을까?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용서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하여 나에게 피해를 입힌 모르는 원수는 그렇게 용서의 길을 밟게 된다. 위의 책에는 용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용서의 역설은 그것이 가장 이타적인 행동 같아 보이지만, 실은 매우 이기적인 것이라는 데에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은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히고, 그 결과 살인범에 의한 상처를 한 번 더 받게 된다. 살인범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뿐 아니라 그들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마저 앗아간다.”(상게서 17쪽)

원수사랑은 선악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끼친 고통의 크기와 비례한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 다음 말씀을 우리는 간과하지만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핍박을 당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인간은 용서의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은 사자에게 찢김을 당하는 상황에서 핍박자들을 용서하면서 죽어갔다.

하지만 잘 아는 ‘서로’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요한삼서는 요한이 가이오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자였다. 그는 전도여행으로 궁핍한 ‘나그네 된 자’(5절)들에게 신실한 자였다. 한데 교회에는 그런 자만 있는 게 아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자들도 있다. 그는 악한 말로 요한이 하는 일을 폄론하고, 전도여행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지 않을 뿐 아니라 대접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았다.(9절)

요한은 가이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이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요한 일행을 헐뜯고 신도들을 내쫓는 것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디오드레베의 교만한 마음 때문이다. 한데 왜 요한은 이것을 교만과 겸손의 범주에서 다루지 않고 선과 악의 범주에서 다룰까?

인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여 남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악이라 말할 수 있을 터이지만 인간의 행위에 의해 선과 악을 나눈다면 과연 거기에 경계가 있을까? 내가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불륜이 아닐까? 과연 선한 사람에게는 악한 생각이 일말도 없으며 살인자에게는 일말의 사랑도 없을까?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야 하지만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까만 천에 손전등을 비추면 까만색이 보인다. 그것은 반사할 색깔을 전혀 갖지 않은 검정색도 5% 정도는 빛을 반사한다는 뜻이다.(마가레트 브룬스 『색의 수수께끼』 215쪽) 10여명을 살해한 연쇄살인의 주인공도 악의 화신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삶에서 선악이란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듯 교차하는 것이다. 마치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더러운 곳과 깨끗한 곳, 급한 곳과 느린 계곡을 골고루 거치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수만리 장정을 흐르듯이, 지구별에 떨어진 인간은 누구나 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평안과 더불어 선과 악의 계곡을 지나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절)

세상의 선과 악은 전적으로 행위와 관계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인간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한이 진실로 염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아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와 다른 한 사람을 소개한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고 있으며 진리 자체도 그를 인정해 줍니다.”(12절 공동번역)

준마는 기름기가 찰찰 흐르는 잘생긴 말이 아니라 말을 잘 듣는 말이다. 명견은 잘 생긴 개가 아니라 말을 잘 듣는 개이다. 아무리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도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명견이 되지 못한다. 그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착한 사람이요 듣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다. 마리아가 선택한 “이 좋은 편 the good part(NAS)”은 부엌에서 일하지 않는 편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다. 성경에서 선이란 도덕적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한번은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이 관원에게 있어서 ‘선’과 ‘영생’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때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나니라’(마 19:17)고 대답하셨다. 영생과 선한 행실을 연결하여 묻는 청년에게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답하신 것은 영생은 인간의 착한 행실과 관계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중세 교회의 문제는,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영생과 선을 한 줄에 묶었다. 선과 보상이 한 줄로 묶여 있는 곳에서 선은 때로는 돈으로 표현된다. 면죄부 판매는 선과 영생을 이어주는 밧줄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목숨으로 이 밧줄을 끊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야말로 만인에게 평등한 구원이다. 만일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돈으로 선행을 대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점령될 것이다.

선을 윤리도덕으로 아는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렇다면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고 말씀 하셨다. 왜 그랬을까?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생활에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든지 도둑질하지 않는다. 살인하지 않는 것은 생활에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살인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것이 그의 생활에 나타나 보이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경험을 해야 한다. 선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겼던 도덕률이 그의 삶에 나타나야 한다고할 때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제자’는 컴퓨터의 아이콘이 아니다. ‘제자’를 클릭하면 ‘스승의 삶을 사는 자’ 이렇게 말로 끝나는 게 아니다. ‘제자’를 클릭하면 모니터에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십계명의 조문들은 컴퓨터의 아이콘에 불과했다. 그의 스승들이 삶으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클릭하면 거기엔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수천억 인구의 모니터에 그의 삶이 나타나도록 이 땅을 사셨다. 그것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요 21:25)

예수의 교훈을 기록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는 말은 예수의 관심사는 교훈이 아니라 삶이었다는 말이다. 세상의 많은 교사들은 교훈을 남겼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가 ‘계명’을 클릭할 때 교사들의 교훈이 모니터에 떠오르지만, 예수님은 교훈이 아니라 행실을 남기셨기에 그의 제자들이 ‘계명’을 클릭하면 화면에 예수의 행실이 떠오르는 것이다.

영생의 방법을 물은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가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심히 놀랐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 19:16-26)

만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인간의 선한 행실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도 하지 못하신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이 교만한 디오드레베와 다른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데메드리오를 소개한 것은 그의 진실한 삶이 그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그를 인정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인정했다는 말은 그의 행실이 진실된 삶이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컴퓨터에서 데메드리오를 클릭했을 때 그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Jesus loves you’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I love you'를 말하기엔 너무나 가진 것이 없는 인간도 ‘Jesus loves you’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자랑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일을 하셨다는 것, 이것이 다른 종교가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누어줄 것이 없는 인간도 ‘Jesus loves you'를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 된 삶이요 진리 자체가 인정해주는 것이다.

잘 아는 ‘서로’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행실의 차원에서 다루어질 때 인간은 지극히 무능한 존재이다. 하지만 ‘나’를 클릭했을 때 화면에 ‘예수의 삶’이 나타난다면 그땐 나도 원수를 사랑한 것아 아닐까?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가까운 이웃이 나를 해코지 할 때 그를 용서한다는 것이 인간의 행실 차원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나를 해코지한 원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성도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의 즐거움이 온통 그에게 있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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