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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13:05

2009년 6월 20일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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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 장

교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공동체

콤뮤니티(community)라는 말은 라틴어의 콤뮨(commune)에서 온 말로서 콤뮨은 ‘나누는’ ‘공공의’ 등의 뜻이다. 여기서 공산(共産) 의 개념이 나오고 공화(共和) 개념도 나왔다. 즉 공산주의나 공화국은 모두 공동체 의식에서 발달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가장 잘 발달한 나라가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우리 마누라’라고 부른다. 영어로 ‘our wife'라 쓰고 보면 망측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마누라’라고 할 때 그 ‘우리’는 단순히 ‘나’의 복수형태가 아니다.

우리나라 말에서 ‘우리’는 ‘울’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로서 ‘그이’는 ‘그 사람’이다. ‘울이’는 ‘한 울안에 사는 사람’이다. 결혼하여 한 울타리 안에 살면 ‘울 남편’ ‘울 아내’가 되어 결국은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물이라는 말도 ‘울 물’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울’이 다음에 ㅇ을 만났으면 당연히 ㄹ이 뒤로 붙어 ‘우룰’이 되지만 ‘울’이 다음에 ㅁ과 만나 부딪치면서 ㄹ이 떨어져나가 ‘우물’이 된 게 아닐까? 어쨌든 공동체란 한 우물을 먹고사는 집단이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공동체 의식이 부족해진 것은 ‘울’이 허술했기 때문이 아닐까? 울은 담과 달리 ‘풀이나 나무 따위를 엮어서 집을 둘러막거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니 말이다. 울은 나무를 엮어 만든 그 사이로 호박죽을 나누며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한 울안의 사람들을 단단히 묶어주기에는 뭔가 허술한 점이 있다. 담으로 둘러친 사회는 섣불리 구역을 벗어나기 힘들지만 울에 사는 사람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울타리를 제치고 밖으로 나가 다른 곳에 가서 나무를 엮어 둘러 다른 공동체는 형성할 수 있다.

랍비 마빈 토케어가 말한다.

“유대인들이 자기 죄에 대해 용서를 빌 경우 ‘나’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며 반드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비록 개인이 단독으로 저지른 죄라 할지라도 반드시 여럿이 함께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유대인 모두는 커다란 하나의 가족에 속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빈 토케어 『성전 탈무드』 115쪽)

유대인들이 용서를 빌 경우에 나만 용서 받기를 구하지 못하고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유대인들의 공동체 의식 때문이 아니라, 죄 없으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관심 때문이 아닐까? 하여튼 우리나라나 유대인만큼 ‘우리’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동물은 혼자 있어도 살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 혼자서 살지 못한다는 말은 무언가 모자라다는 말이다. 둘이 완전한 동업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은 상품를 못 만들지만 판매는 잘하고, 한 사람은 판매는 서툴지만 상품은 잘 만들 때 그 동업이 성공할 수 있다. 상품도 잘 만들고 판매도 잘하는 사람이 타인과 이익을 나눌 이유가 없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은 무언가 모자라다는 말이다. 모자라다는 말은 덜 여물었다는 말이 아니라 더 받아들일 여분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빈틈(空間)이 시간의 개입을 위해 열린 틈이요, 때틈(時間)이 인간의 개입을 위해 열린 틈이듯이 인간은 타자의 개입을 위한 열린 사람틈(人間)이 아닐까? 그 틈사람 인간에게 돕는 배필이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여분으로 주신 공간이 오직 돕는 배필을 위해서 뿐일까? 그 여분의 공간에 누가 들어오셔야 인간의 고독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 될 수 있을까?

그 여분의 공간으로 인하여, 인간은 혼자 있을 때 고독이라는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그 몸에 들락거린다. 하여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친분관계로, 사회관계로, 성관계로 전전하지만 그것은 티베트 산 정상에서 알맹이 빠진 공기를 숨 쉬듯이 불안과 고통만 더해갈 뿐이다. 어찌하여 관계의 부족에서 발생한 고독 문제가 관계의 회복에서 해결되지 않을까? 고독의 조건이 관계의 단절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이 잘 못 설정된 때문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중심에 바벨탑이 올라가고 있었다. 바벨탑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고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모이기만하면 고독문제가 해결될 줄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 울 안에 사는 공동체는 한 하나님을 모심으로만 그 뜻을 이룰 수가 있다. 한 하나님이 없는 공동체는 열 갈래 만 갈래로 그 말이 나뉘어 결국 흩어짐을 면치 못한다. 여러 신을 두고 모이는 모임은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를 부르며 모일지라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이다. 한 아버지를 둔 형제라야 한 형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모인 무리들을 흩으신 뒤에 하나님께서 한 형제의 나라를 구상하셨다. 그 계획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지시할 땅은 국토요, 약속하신 큰 민족은 국민이요 창대케 할 이름은 주권이다.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빼앗는 것을 보면서 왜 남의 땅을 빼앗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짐승들은 지나는 곳마다 오줌을 싸며 자신의 구역을 표시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을 따라 지중해 서편의 온 땅에 두루 다니며 단을 쌓았다. 아브라함이 쌓은 단들은 그의 자손들이 차지할 땅이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가 종살이 하는 동안 그 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겼으나 하나님께서는 북쪽으로는 세겜에서 부터 남쪽으로는 헤브론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벧엘 동편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아브라함이 부지런히 다니며 점찍어놓은(창 12,13장) 모든 땅들을 빼앗아 그 자손들에게 주셨다.

아브라함이 광대한 나라를 꿈꾸며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듯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꿈꾸는 자들은 이 세상 곳곳에서 부지런히 단을 쌓아야 한다. 이 땅 구석구석을 “발바닥으로 밟”(신 11:24)으며 복음의 단을 쌓는 일은 불법적으로 빼앗겼던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는 일이다. 시날 평지에 쌓은 탑이 아무리 웅장해도 무너졌으나 아브라함이 두루 다니며 쌓은 단들은 한 나라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 올려 쌓는 나라가 아니라 이웃으로 확장되는 나라다. 그 확장이 세상 끝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마 24:14)

소속감

공동체 의식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소속감이다. 인간은 어디엔가 소속되어야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며 안정감을 갖는다. 그래야 의욕이 생기고 책임감과 사명감이 생긴다. 인간은 소속되기를 원하는 만큼 소속되기를 요구받는다. 학교, 직장, 동호회, 종친회, 교회 등 다양한 공동체가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하여 한 번에 한 집단에만 소속되지 않고 대부분은 여러 집단에 동시에 소속되는데 소속감의 강도는 우선순위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나는 지방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하지만 중학교와 대학교 동창들의 모임에는 가지 않고 고등학교 동창들 모임에는 간다. 우선순위가 고등학교에 있는 것은 기억 때문이다. 그때가 나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때였던 것이다.

인생 중에서 잠자는 시간과 동일한 시간을 소비하는 직장이 소속감의 우선순위에 놓여야 하지만 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은 직장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회사가 직원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서’(27.1%) ‘이직을 준비 중이라서’(20.6%), ‘회사에 비전이 없는 것 같아서’(15.6%), 자기 업무만 신경 쓰는 분위기라서’(10.5%), ‘연봉이 낮아서’(8.7%), ‘근무환경이 안 좋아서’(6.7%) 등이다. 소속감은 자부심과 대단히 밀접하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대해 자부심이 높으면 그 직장에 대한 충성도도 높아지고 소속감도 높아진다.

부모 형제도 한 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공동체이다. 끊임없이 한 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그 공동체의 힘이 무엇일까?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한 기억과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감사와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소속감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힘은 공동체의 중요한 지체중 하나라는 의식이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책임을 다 하라는 말이다. 그 책임은 지체가 고통을 받을 때 함께 고통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얻을 때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26절) 이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하나의 완전한 공동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엡 4:13) 것이다.

다양성의 집단

군대를 공동체라 하지 않는다. 군인을 사람이라 하지 않는 것은 군대가 유니폼(uniform)을 입은 획일성(uniformity)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군인은 자기의 의사를 펼치지 못하고 기계처럼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공동체는 그런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의 통일체이다. 한 주인 아래 다양성이 빛나는 연합된 집단이다. 다양성이 빛나는 집단이 한 주인을 섬기지 않으면 그것은 곧 혼돈이 되고 만다. 이 시대의 종교가 혼돈을 겪고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신을 가진 자들이 모여 ‘우리는 하나’다 라는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흔히들 바벨탑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바벨탑은 없다. 니므롯이 쌓은 것은 벽돌로 쌓은 지구랏(Ziggurat)의 하나일 뿐이다. 니므롯이 성과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려하자 하나님께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으며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저들은 드디어 성 쌓기를 그쳤다. 성경은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성 쌓기를 그친 이 상태를 이름 하여 바벨이라 하였다.(참 11:9) 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모이려한다면 결국 흩어져 바벨이 된다.

아무리 다양한 집단도 다른 예수가 아닌 참 예수만을 그 가운데 모시고 연합한다면 그 공동체는 아름다운 하나가 되지만 다른 예수와 여러 잡다한 신들의 모임이라면 그것은 혼잡한 바벨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열두 문으로)계 21:12) 들어갈 다양한 사람들의 나라다. 하지만 그 기초가 예수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나라이기에 영원한 나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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