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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 피, 구름, 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유월절

비보통적인 이야기가 한 세대만 지나면 전설로 바뀌듯이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유월절도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생각이 가미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이듬해 첫째 달,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할 때, 주검에 몸이 닿아 부정하게 된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 앞에 와서 물었다.

“우리가 비록 주검 때문에 부정을 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정된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데, 우리만 못 바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민 9:7 새번역)

당연한 일이었지만 모세가 그 일에 대해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묻자 주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나 너희 자손들은 주검을 만져 더럽게 되었을 때나 먼 길을 떠나 있을 때나 모두 주 앞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그들은 다음 달 십사일 해거름에 유월절 예식을 행하면서,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과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어라. 다음날 아침까지는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되며, 희생제물의 뼈를 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유월절의 모든 율례대로 그렇게, 그들은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여 감사하고 그들을 억압한 죄의 세력에 대해 절치부심하는 날이다. 이 일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환경적 조건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이 의무조항이었을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정결한 사람이나 길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주검을 만져서 더럽게 된 사람이나 길을 떠나 있는 사람은 벌에서 제외되었다. 똑같은 법조항이지만 벌칙에서 제외된 사람에게 법은 의무조항이 아니라 권고사항이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죽이시는 모습을 보고 그분을 잔인한 분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이런 하나님이라야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이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형편은 언제든지 이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인자한 부모라고 하여 제 마음대로 하는 아들은 모자란 아들이다. 인자한 부모일수록 알아서 더 잘 모셔야 한다.

애굽에서 나올 때 잡은 유월절의 어린양은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렸다. 그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집문 밖에 나가지 못했다.(출 12:22) 한데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실 때는 ‘어린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 9:11,12)고만 말씀하셨다. 그 이후 광야에서나 나라를 세운 후에나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린다거나 아침까지 한 사람도 집문 밖에 나가지 않아야 하는 규례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월절을 지키는데 있어서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 나물과 뼈를 꺾지 않는 일은 중요하지만 피를 바르는 일과 집문 밖에 나가지 않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서 살았다. 다윗은 그때를 그리워하며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시 55:7)하고 노래했다.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던 애굽을 세상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공급되는 자유인들에게 광야의 삶은 그 자체가 교회생활이었다. 자유를 착취하는 애굽에서는 장자를 죽이기 위해 칼이 날아다니며 집집을 살폈다.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사람들이 죽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문 밖에 나가지 않아야 하지만 장자를 죽이는 칼이 집집을 살피지 않는 교회의 삶을 사는 자유인들에게 문밖에 나가지 말라는 규례는 필요 없는 조항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막생활 하는 그들에겐 피를 바를 문인방도 문설주도 없었으니 피를 바르라는 조항을 말씀하실 수도 없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가 된 뒤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두 성전으로 갔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 주위에 피를 바르지 않은 모습과 유월절에 집 안팎을 드나드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누리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나라 전체가 교회였던 이때를 스데반은 ‘광야교회’(행 7:38)라고 했다.

예수께서 유월절양으로 돌아가셨어도(고전 5:7) 그 피를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피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출애굽 할 때는 예수의 피를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발랐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의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피를 바르는 일이다.

구름(출 40:34-38)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성막, 곧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덮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으며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구름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다. 그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 날 동안 오래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의 명을 지켜 길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다음날 아침에 길을 떠났다. 낮이든지 밤이든지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9:15-21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대로 구름기둥이 따라다닌 게 아니라 구름 기둥이 가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다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다. 이 순서가 바뀌면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에겐 하나님 없는 삶이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살던 고센땅은 나일강 하류로서 겨울 평균 기온이 섭씨 13도 정도이고 여름 평균 기온은 28도 정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던 시내광야의 평균 기온은 고센 땅보다 조금 높아서 겨울 평균 기온이 15도 정도이고 여름이 평균 기온은 29도 정도이다. 하지만 보통 사막이 그렇듯이 낮에는 작열하는 햇빛이 내리 쬐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 한다. 이런 곳에서 낮에 구름으로 가려주고 밤에는 그것이 불처럼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요 기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만을 기적으로 인정한다. 불같은 기적도 그것이 매일 임한다면 사람들 눈에 더 이상 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적은 지금도 우리 눈에 펼쳐지고 있다. 푸른 풀을 먹고 흰 젖을 내는 것이나, 땅에서 물을 빨아 올려 빨간 과일을 만드는 것이나, 밥을 먹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이런 범상치 않는 일이 우리 눈에 매일 펼쳐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매일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적으로 생각지 않는다. 일상에 일어나는 범상한 일들을 범상치 않게 보는 이것이 기적을 보는 눈이다.

나팔

지금은 나팔이 악기로 사용되지만 고대에 나팔은 중요한 통신수단이요 의사 전달 방법이었다. 침략자가 있을 때, 진군을 알릴 때, 퇴각을 알릴 때, 총회를 소집할 때 등등 나팔은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인구가 많아지고 전기장치를 사용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경보를 위해 사이렌이 사용되었다. 인류는 소리를 통신 수단과 의사 전달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에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통신수단으로 빛에 관심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한 때는 봉화를 통신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보다 1억 배나 더 높은 주파수를 사용하여 빛을 발생시켰다. 미국 에너지국 산하에 있는 로렌스 리버무어 국립연구소 주연구원인 암스트롱은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가장 높은 주파수의 음파를 빛으로 변환시켜 대단히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말했다.(「Nautre Physics」 2009년 3월 15일 호) 이렇게 광파와 음파가 상호변환 되는 이 시대에 무엇이 통신 수단이냐를 말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인간은 소리를 통신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TV가 나오자 라디오가 각 가정에서 사라졌지만 의사를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소리는 빛과 앞 다투어 발전할 것이다. 왜 그럴까?

인간의 눈은 들어오는 정보를 다 인식하지 못하며 본 것과 내용은 전혀 다를 수가 있다. 빨리 일어나는 사건이라든지 자세히 보아야 되는 사물에 대해서 우리의 눈은 부정확한 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우리의 눈이 그림의 자세한 부분은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그릴 때 세밀한 부분을 그리는 대신 그림의 극적인 면만을 강조하여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명을 끼치려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각은 쉬 타성에 젖어버린다. 깜짝 놀랄만한 사건도 여러 번 나타나면 범상한 일로 바뀌어 눈길을 끌지 못한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각은 가면을 써서 속일 수 있어또 청각은 속이지 못한다. 요즘은 성대 성형 수술로 목소리를 바꾸기도 하지만 원래 성대는 지문처럼 음성 인식장치로 사람을 인식 할 만큼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해와 달의 동화에서 호랑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지 못하여 방안에 있는 남매를 놓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를 소리로 전하시고자 두 가지 나팔을 사용하셨다. 하나는 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이었고 또 하나는 은을 쳐서 만든 은 나팔이었다. 나팔을 부는 일은 제사장들의 임무 중 하나였다.(수 6:5; 민 10:8)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민 10:9)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대적에게서 구원하신다’는 말은 나팔을 불 때 깨어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평소에는 인간을 잊고 계시다가 사람이 나팔을 불면 그제야 인간을 기억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해, 그럼 내가 도와줄께’라고 말하는 아빠가 전화기의 전원을 꺼두고 있을까?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억’한다는 말은 적군이 쳐들어올 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다. 도움을 청하지 않는데 도와줄 분은 어디에도 없다.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민 10:10)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희락의 날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지만 희락의 날에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정작 인간과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날은 희락의 날이다. 많은 자녀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부모에게 전화하지만 모든 일이 잘되고 있을 때는 부모를 잊어버린다. 하지만 부부 관계에서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먼저 전화한다. 그것은 그들이 일체이기 때문이다. 희락의 날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과 일체의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다.(요 17:21)

왜 소리로 백성을 경각시키는 일을 제사장에게만 맡기셨을까? 진군할 때나 회중을 모을 때는 제사장만 나팔을 불더라도 ‘희락의 날에는 모두 나팔을 불며 뛰 놀라’고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제사장만 나팔을 불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목사만 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양각나팔이나 은나팔이나 그냥 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연습과 훈련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도 연습과 훈련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하지만 레위인 아닌 사람도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했듯이 이 시대에도 성결된 삶을 살면서 준비하고 훈련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준비된 레위인이 나팔을 불었듯이 훈련 받아 준비된 사람은 나팔을 불어야 한다.

모세의 연약함 때문일까?

사라가 죽은 후에 그두라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중 하나가 미디안이다.(창 25:1-6)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미디인 땅의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온 적이 있다.(출 18장) 그 이후 일 년 정도 지난 뒤에 호밥이 어떻게 모세를 만났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애굽에서 요단에 이르는 경로에 미디안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민 33장) 모세 일행이 미디안을 경유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모세가 광야를 행군할 때 호밥이 모세를 찾아간 것이 아닐까?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르우엘과 같은 사람이다.(출 2:21; 18:2) 한데 사사기에 보면 ‘모세의 장인 호밥’이라고 했다(삿 4:11) 개역성경은 모세가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간청했다고 했지만 새번역 성경은 그가 곧 장인이라고 했다. 히브리어로 장인과 처남을 표기하는 자음은 똑같이 ‘헤, 타우, 눈’이다. 후에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붙여 읽으면서 장인은 ‘호텐’이 되고 처남은 ‘하탄’이 되었으나 원래 성경 본문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호밥이 장인인지 처남인지 분명치 않다.

모세가 청한다.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장인께서도 우리와 같이 길을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장인어른을 잘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민 10:29, 새번역)

호밥이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겠노라’(30절)고하자 모세가 다시 간청했다.

“제발 우리만 버려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광야 어디에 진을 쳐야 할지, 장인어른만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인께서는 우리의 길 안내자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민 10:31 새번역)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을 의지하려한다고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이 잘할 때는 칭찬을 생략하시지만 인간이 잘못할 때는 반드시 진노하시거나 벌을 주신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세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재물까지 허락하셨을까’에 의문을 품듯이 여기서도 ‘인간의 연약함을 보이는 장면에서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셨을까’ 의문해 보아야 한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뒤, 미디안 땅에 가서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한 후에 이드로의 가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모세가 처갓집 식구에게 ‘제발 우리만 버려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광야 어디에 진을 쳐야 할지, 장인어른만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한 가족이 된 호밥과 축복의 땅에서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누구를 데려가고 싶을 때 그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은 인간이 늘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호밥은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30절) 하며 모세와 함께 가지 않았다.

호밥이 장인인지 처남인지 확실치 않지만 호밥이 미디안 땅에 머물러 있기로 선택한 일이 있은 후로 ‘탁월하다’는 뜻인 ‘이드로’나 ‘하나님은 친구시다’는 뜻인 ‘르우엘’이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때 찾아온 호밥은 모세의 장인이 아니었을까?

본향을 향하여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5-36)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궤는 듣도 보도 생각지도 못한 무기다. 세상 종교인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린 뒤에 칼이나 창을 들고 직접 나가 싸워야 했다. 어떤 나라 어떤 종족도 그들이 섬기는 신을 메고 싸우러 가지는 않았다. 그들의 신은 실존하는 신이 아니라 관념상의 신이었기 때문에 신에게 소원을 아뢸 뿐 신을 들고 싸움에 나갈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지중해 연안을 끼고 가는 길이었다. 한데 거기엔 블레셋이 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출 13:17) 하여 바란 광야로 인도하셨을까? 이스라엘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지리멸렬하는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용기를 가지고 행군하지 않았을까?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후에 유다의 남방 경계가 된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열 하룻 길이다.(신 1:2)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원한 지중해 지방을 지나면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열하루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한 달 분의 양식을 가지고 떠난(출 16:1)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바란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가셨을까?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하는 이런 표현은 고대에 백성을 이해시키고 가르치시는 방법이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평탄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어려운 길로 인도하실까?’ ‘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모든 이방 족속을 내쫓으신 뒤에 이스라엘 백성을 맞아들이지 않으셨을까?’ 평안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인간은 평안하고 쉬운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타락에 눈을 돌린다. 인간이 고통 중에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인간을 쉬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아래 질문을 생각해보셨나요?

1.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지켜야 하는 의무였을 까?

2. 출애굽 이후에 유월절을 지킬 때는 왜 피를 바르라고 하지 않으 셨을까?

3. 이 시대에 어떻게 예수의 피를 바를 수 있는가?

4. 우리 주위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가?

5. 나팔을 불면 하나님이 깨어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6. 제사장만 나팔을 불었다는 말은 목사만 전도하라는 말일까?

7. 모세가 호밥에게 같이 가자고 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모습일까?

8.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9.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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