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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2분

 

기억절:“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교사(리더)는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해 주십시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롬 1:16~17, 22~32, 2:1~10, 17~23, 3:1~2, 10~18, 23.

자신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칭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칭의의 첫째 단계는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바울은 이방인들의 끔찍한 부패상을 소개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울의 결론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도, 인간이 행한 일 가운데 어떤 것은 그의 죄 값을 갚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유한하고 좁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치명적인 기만이다. 그대가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대가 애지중지하는 생각을 따라 옥신각신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속죄 문제를 살펴보라. 이 문제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악한 자의 자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를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선행을 요구하신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선행을 아무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죄 가운데 자신을 두기 때문에 예수의 의만이 유효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화잇 주석, 롬 3:20~31)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3:23

|학습목표|

⊙ 깨닫기 : 이방인과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설명한다.

⊙ 느끼기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낀다.

⊙ 행하기 : 우리의 총체적인 연약성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헌신을 인정한다.

 

01. 깨닫기: 그리스도가 없다면 절망적임

A. 왜 우리는 우리의 총체적 연약성을 먼저 인정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제외하면 다른 소망이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가?

B.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02. 느끼기: 위를 바라봄

A. 과거의 어떤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과 구주에 대한 매일의 필요성을 느꼈는가?

B. 과거의 어떤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그분의 자비하심을 느꼈는가?

 

03. 행하기: 그리스도께 의지함

A. 우리 본성이 악하다는 수많은 증거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B.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그 필요성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요점: 그리스도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인간은 죄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총체적인 필요성과 의존성을 인정해야 한다.

 

일요일(7월 11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❶ 그대에게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 말씀에 나타나는 약속과 소망을 어떻게 경험하였습니까?

 

답: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멸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복음의 능력 때문이다.

 

이 성경절에 등장하는 몇 가지 핵심 단어는 다음과 같다.

1. 복음. 이 말은 “좋은 기별” 또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어떤 기쁜 소식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될 때는 “메시야에 관한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가 된다. (크리스토스는 메시야라는 의미의 그리스말이다.) 복음은 메시야가 오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 구원은 우리나 하나님의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의 완전한 의에 달려있다.

2. 의.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은 로마서에서 고유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특히 우리는 롬 1:7에서 “의”가 “하나님의 의”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아오는 의이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의이다. 이 의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약속을 줄 만한 가치가 있다.

3. 믿음. 이 말씀에서 “믿는다” 또는 “믿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피스튜오와 피스티스이다. 구원과 관련된 믿음의 의미는 앞으로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배우게 될 것이다.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신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부활하신 구주께 대한 기쁜 소식은 사람이 사는 세상 끝까지 전파되었다. 제자들의 마음은 자비심으로 너무도 완전하게, 너무도 깊게, 너무도 원대하게 충만해졌으므로 그들은 세상 끝까지 가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갈 6:14)다라고 증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선포하였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그 기별의 능력에 굴복하였다.”(교회증언 8권, 19)

 

<부가설명> 로마서에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1:1~4에서 그 사실을 잘 설명해놓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복음은 …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같은 사실이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앞으로 교과의 저자가 어떻게 전개할는지 교과를 다 읽지 않아서, 앞으로 읽어가면서 알게 될 것이지만, 내가 깨달은 바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부활과 그 부활의 생명이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 부활의 생명은 새로운 생명이며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며 의의 내용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바로 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생명은 우리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신 것처럼 살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월요일(7월 12일) 인간의 처지

 

❶ 롬 3:23을 읽으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쉽게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면 이 말씀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이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답: 우리들을 볼 때 도덕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이들은 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가? 라는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죄를 각자가 지을 때 죄인이 되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그들이 선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 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선하다고 느낀다. 그런 논리라면 강호순*은 아돌프 히틀러에 비해 성인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비교한다면, 자기혐오와 경멸감 외에 드러낼 것이 없을 것이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여러 의미로 해석 되고 있다. 가장 단순한 해석은 고전 11:7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어로 “영광”은 “형상”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 된 것 같다. 죄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켰다.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또는 영광을 반사하는 데 한참 미치지 못했다.

 

❷ 롬 3:10~18을 읽으십시오. 오늘날과 다른 게 있습니까? 이 본문에서 그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또는 만약 그대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롬3:10~18]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답: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사역이 없다면 하나님을 찾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삶은 심히 부패하고 절망적이어서 저주, 파멸, 고생,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총체적 죄됨과 그것을 해결하는데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죄인이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죄인의 얼굴에서 자기방어와 위선, 자기 정당화의 가면을 찢고,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그분께 자비를 구하도록 할 것이다(눅 18:13).

 

*여성 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

 

인간은 스스로 의로울 수 없음

“사람에게 있는 큰 위험은 자기에게 기만당하고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능력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 성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그 속에 도덕적 죽음의 씨앗을 간직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방종과 자기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 등의 부정한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치료봉사, 455)

 

<부가설명> 의인은 하나도 없다.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의지를 사용하여 죄를 선택하고 죄를 지어야 죄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죄를 선택하지 전에는 의인이었는가? 아니면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중립적 사람이었는가? 세상에 죄와 의에 대하여 중립적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스스로 죄를 선택하기 전에 이미 그는 죄인이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다. 위의 치료봉사의 말대로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생명적 관계는 스스로 끊은 것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이미 끊어졌다. 이것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가르친다.(고전15:22) 그래서 모두 사망의 존재들이다. 그들에게서는 의로운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밖에 나타날 것이 없다.(엡4:22,23) 그래서 의인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다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의하여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셨다. 그 음성을 듣는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얻는 하나님의 의이다.

 

교훈: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알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우리의 삶을 비교해야 한다. 우리가 심각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첫 단계이다.

 

화요일(7월 13일) 1세기에서 21세기까지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인간성이 개선되고 있고, 도덕성은 증가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가 점점 완전해지고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바른 교육과 도덕적 훈련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20세기로 진입할 때, 일제히 시작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것들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는 역사상 가 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세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크게 감사히 여겨야할 부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과거 극단적인 광인이나 꿈꿨을 법했던 대량 살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❶ 롬 1:22~32을 읽으십시오. 1세기에 기록된 이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롬1:22~3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답: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제거한 인류는 급속하게 부패하고 말았다. 인간들은 영적인 가치보다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시하게 되었고, 육체적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있어서 악을 추구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멀어졌고, 그분의 품성과는 정반대의 속성, 즉 배약(背約), 무정, 무자비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1세기에 기록된 이 말씀은 21세기의 인간 사회도 정확하게 묘사 하고 있다.

 

인류가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친 이후로 죄와 오류와 타락의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런 문제의 결과 가운데 살게 되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토피아(Utopia):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말.

 

아담의 후손

“사람이 범죄한 이후로는 신성한 것을 즐기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었다. 지금도 중생하지 아니한 자의 마음은 역시 그러하다. 그 마음이 하나님과 융화되지 못함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정로의 계단, 17)

 

<부가설명>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교과의 저자는 이렇게 묻고 있다. 정말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은 세기가 흘러갈수록 더욱 폭력적인 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종교 자체가 폭력적이 되고 이기심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월요일에 말한 대로 하나님과 생명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인류는 죽은 자들이다. 사형수들이다.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만 호흡하고 활동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 부패한다. 성경은 이것을 썩어져가는 구습이라고 가르친다.(엡4:22) 생명이 없는 것은 썩게 되어 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부패가 심해진다. 세기가 흐를수록 더욱 악해지는 이유이다. 하나님과 바른 생명의 관계가 없이 도덕적 선을 강조하는 종교도 역시 썩는다. 오늘날 종교 자체가 폭력적이 되고 이기심을 극대화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예수님은 사망을 처리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분의 도덕적 선과 의를 나의 것으로 여김을 받는 차원이 아니고 그분의 생명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하나님과 생명관계가 확립된다. 진정으로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부패가 멈추고 생명의 향기가 들날리게 되는 것이다.

 

교훈: 20세기 초에는 인간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 사회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수요일(7월 14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같이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잊고 가장 추악한 행위를 일삼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민족과 백성을 그 범주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아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❶ 롬 2:1~3, 17~2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이 경고의 말씀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롬2:1~3, 17~24]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답: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기를 좋아하면서 더 큰 심판대에 서야 한 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로서 우리는 비신자 또는 타 종교인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 조심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구원할 대상이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맡기신 이유는 그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지, 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도구로 쓰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거나 자신을 그들의 심판관의 자리에 두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314)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분별하고 지적한다. 우리도 동일한 죄, 심지어 더한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할 때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태를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왜냐하면 비록 선택된 백성이라 할지라도 유대인 역시 죄인이며, 경우에 따라서 이방인보다 더 큰 죄인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빛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하였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요점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의롭지 않으며, 아무도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무도 내적으로 선하거나, 유전적으로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부인하는 자 모두가 복음을 통해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헛된 자부심을 버리라.

“인간이 연약함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한, 그는 결코 ‘나는 구원 받았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14)

 

<부가설명> 이미 말한 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담의 후손으로서는 아담 안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구원의 기별을 세상에 전파할 도구로 선택함을 받았을 뿐이지 그것을 전파하는 도구가 된 것이 곧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주신 율법이나 제도나 사건들이 다 온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전파하기 위하여 그 도리를 깨닫게 하는 자료들이지 그것이 그들이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회복되는 하나님과 생명관계에 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말씀을 성경만큼이나 많이 기억하고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이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하고 알아도 영생은 없다. 여전히 사망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부패밖에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다.

 

교훈: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 구원의 특별함을 생각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이 특별한 것이지 구원받는 사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목요일(7월 15일) 회개

 

5살배기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을 밀어 넘어뜨렸다. 부모는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는 싫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들릴 듯 말 듯 “미안해.”라고 말했다. 이것을 진심어린 회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❶ 위에 있는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스스로 된 자처럼 여기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나를 회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요가 아닌 선한 인도하심으로 죄인을 회개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협박하거나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무한히 인내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기 원하신다. 강요된 회개는 참된 회개의 목적을 훼손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회개를 강요하는 분인데 일부만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회개하도록 강요하시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

 

❷ 하나님의 사랑에 저항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면서 불순종의 상태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롬 2:5~10.

[롬2:5~10]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답: 회개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진노를 쌓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 반면 회개한 자들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된다(롬 2:7).

 

이 말씀과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바울은 선행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선행이 필요 없다는 의미로 이해해 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7절을 보면 구원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이르러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노력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원의 경험 가운데 일부분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의 일과 행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결심과 행동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참된 회개는 변화를 수반한다.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우리의 생애에는 반드시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런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할 때 이루어진다.”(정로의 계단, 39)

 

<부가설명> 회개는 자기의 상태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의 상태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썩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이다. 설령 자기가 도덕적으로 지고한 선을 행했다 해도 그것이 자기를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도덕적으로 지고한 선을 행하는 것은 사형수가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감옥 안에서 같은 죄수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그를 사형 받지 않도록 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 다만 대통령이나 주지사의 특사만이 사형을 면할 수 있다. 하나님의 특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특사를 받는 것이며 그때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생명의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다. 그것이 생명의 능력인데 그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이시다.(요일5:11~13, 롬8:2)

 

교훈: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되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시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극복하며 선행에 참여하기를 바라게 된다.

 

금요일(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실물교훈, 291~294 “주의 포도원”, 정로의 계단, 9~15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17~2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치료봉사, 492~494 “대인관계”, 교회증언 5권, 146~147 “사단의 앞잡이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 가!”(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세상 형편에 대한 비참한 광경이 내 앞에 제시되었다. 부도덕이 어디나 만연하고 있다. 방탕은 이 시대의 특별한 죄악이다. 악이 그 흉악한 머리를 오늘날처럼 대담하게 쳐든 때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보이며, 덕성과 참된 선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악의 대담성, 힘, 편만함으로 거의 낙망하고 있다. 편만한 악은 불신자들이나 신앙을 비웃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한다고 공언하는 이들조차 그 사건을 위하여 사단 자신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부패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정욕을 섬겨 왔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부정하고 그들의 상상 이 부패한 것이 당연하다.”(교회증언 2권, 34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화요일 소지에서 언급된 현상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 TV와 컴퓨터 등으로 각 가정을 악이 방문하는데 무방비 상태이다. 그래서 유년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로마서 1장에 나열된 악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이 교회 안에도 많이 스며들었다. 교인들이 마음에 많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주님께 진정한 회개로 예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2. 오늘 엘렌 G. 화잇의 두 번째 인용문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 그대는 어디쯤 있습니까?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요 8:11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한다고 공언하는 이들조차 그 사건을 위하여 사단 자신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부패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 나의 상태가 아닐까? 진정으로 회개할 때 주님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고 받아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붙들 수밖에 없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죄 된 본성과 타락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인간의 그런 실상을 잊어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어떤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 인간의 죄 된 본성이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의 썩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음으로 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롬6:4)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자기의 도덕적 선을 행하는 노력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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