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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6분

기억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안식일학교 홈페이지(www.sspm.or.kr)에 다양한 교과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6장, 요일1:8~2: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한 후, 바울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죄를 계속 지으면 안 되는 것인가?

로마서 6장은 위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바울은 여기서 흔히 “성화”라 부르는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죄를 극복하고 점점 그리스도의 품성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나 로마서는 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롬 15:16에 “거룩하게 되어”라는 말이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만들다”는 말은 보통 하나님께 “성별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과거에 완료된 행위를 의미할 때가 많다. “거룩하게 하심 을 입은 모든 자”(행 20:32)라는 구절이 좋은 예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는 개념상 하나님께 성별된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성화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지 성화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죄의 극복”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부분을 살펴 볼 것이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6:11

|학습목표|

⊙ 깨닫기 : 율법 아래서 죄의 주인을 섬기는 것과 은혜 아래서 의의 주인을 섬기는 것을 비교·대조한다.

⊙ 느끼기 : 하나님께는 살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의 태도와 정서를 배양한다.

⊙ 행하기 : 매일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한다.

01. 깨닫기: 죄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의에 순종할 것인가?

A.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순종에 연합하여 다시 일어난다. 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가?

B. 우리는 오직 한 주인만을 섬길 수 있다. 우리가 은혜의 삶을 살면서 죄의 법에 굴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또는 불가능한가?

02. 느끼기: 죄에 대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해 살 것인가?

A. 죄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반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B. 우리가 죄된 본성에 굴복할 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과 반대되는 어떤 정서와 욕구가 포함되어 있는가?

C.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 때, 우리는 어떤 정서와 욕구를 갖게 되는가?

03. 행하기: 오늘 선택하라

A.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킬 수 있는가?

B. 죄가 틈 탈 여지가 없이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이는 한 주를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해야 하는가?

요점: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충만하여 그의 죽음과 생명에 연합하여 침례를 받으면, 그분은 우리에게 거룩함과 영생의 복을 허락하신다.

일요일(8월 8일) 은혜가 넘침

롬 5:20에서 바울은 매우 인상적인 문장을 남겼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바울의 요점은 죄가 얼마나 많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죄가 너무 많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큰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죄가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❶ 롬 6:1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어떤 식의 논리를 다루고 있습니까? 롬 6:1 이후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한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답: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 사람은 왜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논조를 이어가고 있다. 시작부터 그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하고 있다.

침례는 하나의 장례를 의미한다. 무엇을 장사지내는가? 옛 사람, 즉 죄를 지은 몸, 죄의 지배를 받은 몸을 장사지낸다. 이 “죄의 몸”은 멸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다. 죄의 몸이 파괴됐으면 죄의 왕노릇은 이제 끝난 것이다. 물에서 올라온 사람은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 새 사람이다. 그는 이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다.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침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다시는 그 지배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

물론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마자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께 대하여 살아야 함을 생각하며 투쟁해야 한다. 승리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그래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침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낙심할 필요가 없음

“우리의 믿음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신뢰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과거의 죄들을 회개하며 앞으로는 순종하기를 결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도 아울러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성화된 생애, 89)

<부가설명> 예수를 믿음으로 회개하고 침례를 받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은 의롭고 선하게 살 수 있는가?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도 도덕적인 사람들은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쓴다. 그들이 마음이 악한 상태인데 그렇게 애를 씀으로 선하고 의롭게 되는가?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고 하였다. 자기 가진 것을 다 구제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엄청난 사랑의 희생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해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덕적 선행이나 희생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깨달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다.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즉 사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예수를 믿으면 예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신다. 하나님을 따라 의외 진리의 거룩함으로 재창조된다.(엡4:22~24) 그렇게 되면 그의 생명과 사상이 하나님의 사상으로 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 결과 그는 예수 생명이 사는 방법으로 살려는 강한 의지가 생긴다. 즉 영적 사고방식이 생기고 영적 생활방식으로 살게 된다.(롬8:5~9; 6:4) 즉 라이프스타일이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경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간증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갈2:20의 삶이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더욱 강력함을 믿는다. 우리는 이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죄가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지해야 한다.

월요일(8월 9일) 죄가 인격화 됨

❶ 롬 6:12의 말씀은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롬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답: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죄는 불가항력적이었다. 그러나 침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그것의 지배권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

“지배하다”는 단어에서 보는 것처럼 죄는 여기서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배하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왕이 되다” 또는 “왕의 역할을 하다”는 의미이다. 죄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고자 한다.

바울은 죄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는 의롭다 칭함을 얻는 자가 죄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통치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의지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그대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곧 의지의 참 힘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그대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는 그대들 안에서 그대들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온 성질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대들의 애정은 그에게 중심을 두게 되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와 조화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47)

롬 6:12에 “사욕”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죄가 지배할 때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 그것과 싸우려고 할지라도 욕망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죄는 마치 난폭한 독재자와 같아서 만족할 줄 모르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오직 믿음, 오직 승리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에게서 이 폭군을 몰아낼 수 있다.

롬 6:12에서 “그러므로”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10~11절로 돌아가게 한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간다.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계신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는 동시에 죄를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신뢰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충동적이지 않고 변덕스럽지 않고 미신적이 아닌, 고요하고 평온하며 깊고 꾸준하며 열렬한 헌신의 시간들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굴복이 있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거룩함을 연습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된다.”(증언보감 2권, 507)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다.(요일5:11,12) 생명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생명을 스스로 얻을 수 없다. 생명과 존재는 동일한 사실이다. 생명을 얻으면 존재를 얻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애를 쓸수록 생명의 근원과는 더 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명을 얻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게 되고, 죽은 행실을 하게 된다.(엡4:22, 히6:1) 부패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하는 눈물 나는 노력이다. 그것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 사망의 몸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할 만한 갸륵한 것이다. 죄나 사망은 인격체가 아니지만 인격체인 인간을 그 상태로 지배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생명이다. 이제는 이 생명이 생활하는 그것을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썩지 않는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썩을 수 없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생명의 능력이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롬8:2) 그러므로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중심에 두고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고, 예수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 죄와 싸워 이긴다는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죄는 세상에 편만하고 세상에 사는 동안 죄의 공격을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죄와 싸우게 되는 것이다.

교훈: 죄는 우리 삶을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우리는 그것의 지배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화요일(8월 10일) 법 아래에?

❶ 롬 6:14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십계명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답: 이 말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규정하는 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롬 6:14은 로마서에서 중요한 성경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재림교인들에게 자주 제시하는 성경절이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죄가 존재하는 이상 도덕법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죄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로마서의 앞부분과 6장을 읽었다면, 바울이 죄의 실체에 관하여 논하다가 갑자기 “그런데 죄를 정의하는 십계명은 폐지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법 아래”란 수많은 인간의 제도와 규례를 포괄하고 있었던 당시의 유대 사회 제도 아래라는 뜻이다.

반대로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율법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고 성령이 그의 걸음을 인도함으로 죄를 극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으며,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오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그의 삶의 보좌에서 죄가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롬 6:14의 전체 배경이며 그 안에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법 아래”라는 말을 너무 제한적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은혜 아래”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다면 그는 은혜가 아닌 정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은혜 아래”라는 것은 율법이 불가피하게 죄인에게 선고한 정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거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하여 죽음으로 이제 율법이 가져오는 죽음의 정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이다.

은혜 안에서 순종함

“우리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의의 참여자가 되고,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치 않는 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리뷰 앤 헤랄드, 1901. 9. 3.)

<부가설명>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으면서 어렵다. 은혜 아래 있다는 말도 역시 그렇다. 이 말들은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온 개념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4:21~31에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종노릇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율법에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한 것을 하는 이유도 그대로 해야만 형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이 규정한 형벌이 임하지 않는다면 율법에 기록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율법이 말하는 복을 받기를 기대하고 할 것이다. 율법을 행해도 복이 없다면 율법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즉 율법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 율법의 내용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으면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서 그것이 그들의 성질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내용과 정신이 그들의 생활 자체가 된 것을 가르친다. 율법이 있고 그것이 규정한 상벌이 있든지 없든지 율법의 내용과 정신이 그들의 본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이 율법의 내용과 정신이 되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바로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상태이다. 은혜 아래 있는 상태이다.(히10:16)

교훈: 우리가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산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수요일(8월 11일) 씨름하고 있는 두 주인

❶ 롬 6:16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그의 주장이 흑백논리처럼 분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뚜렷하게 드러난 대조적인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답: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사는 삶이 죄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의 삶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이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승리를 줄 수 있다.

신하를 다스리는 왕으로 죄를 의인화 했던 것처럼, 바울은 이제 종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으로서 죄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이 어떤 주인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섬길 수도 있고, 영생에 이르는 의를 섬길 수도 있다. 중간지대는 없으며 절충의 여지도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영생하든지 영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❷ 롬 6:17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16절의 말씀을 어떻게 확대시키고 있습니까?

[롬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답: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인하여 우리가 얻는 것은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여기서 순종이 어떻게 올바른 교리와 연결되고 있는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교리”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가 여기서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원칙들을 배우고 순종하였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올바른 교리를 “마음으로 순종”할 때, 그것은 그들을 “의의 종”이 되도록 이끈다(18절).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상, 교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거짓 교리에 대하여 상당히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섬길 자를 택하라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를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기를 원하신다.”(시대의 소망, 203)

<부가설명> 인디안의 두 마리 늑대 이야기는 생각하게 한다. 오늘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이다. 숲을 거닐다가 늑대를 보고 겁을 내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 속에도 늑대가 있단다. 두 마리나 있지. 하나는 나쁜 늑대고 하나는 좋은 늑대인데 이 둘은 항상 싸운단다. 손자가 물었다. 할아버지 그 둘이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겨요? 그건 말이다. 네가 잘 먹이는 늑대가 이기지.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죽은 자가 살아날 길을 마련하신 후에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예수를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라고 외치신다. 이 말을 듣고 믿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은 사망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사망의 세력이 날마다 순간마다 사망으로 이끌려고 공격한다. 이때 우리는 사망에 이끌려가든지 예수 생명 안에 안전히 머물러 있든지 결정해야 한다. 사망에 끌려가려는 욕망을 육체의 소욕이라 하고 예수님께 얻은 생명으로만 살아가려는 것을 성령의 소욕이라고 한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러면 살 것이다.(롬8:13)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갈5:16,17) 의의 주인인 예수님을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예수 생명이 온전히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것이다.

교훈: 우리가 의의 주인을 섬기기 원한다면 올바른 교리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목요일(8월 12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❶ 지금까지 로마서 6장에서 공부한 것을 기억하면서 19~23절까지 남은 절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아래에 정리해 보십시오.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 진리를 그대의 삶에 실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쟁점은 무엇입니까?

[롬6:19~2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답: 이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죄의 열매는 부끄러움과 사망이지만, 의의 열매는 거룩함과 영생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바울의 설명은 그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한다. “연약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허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능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의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새로운 주인 예수께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맡기기로 선택해야 한다.

롬 6:23은 죄의 형벌, 즉 범법의 대가(代價)는 죽음임을 말해준다. 죄의 형벌이 죽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뿐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죄는 자기 종들을 속이고 실컷 부려먹다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주인과 같다.

두 주인의 비유에서 바울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다른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양자택일해야 한다. 중간지대는 없다. 동시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죄의 통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며, 죄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우리에게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죄가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리라는 승리의 약속을 매일 주장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죄를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이 폭군은 수치스런 일을 행한 대가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폭군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의를 섬기는 자는 바르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행한다. 그들의 행위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새로운 경험에서 비롯된 열매로서 나타난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필요한 이유과 구원의 관점을 완전히 잃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일 때 얻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평생 사업에 나타날 것이다. 열렬한 활동의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케 하는 믿음이 간직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생애에 나타날 것이다.”(교회증언 9권, 141)

<부가설명> 타락한 본성이 무엇을 뜻하는가? 죄를 지으려는 경향을 뜻하는가? 아니면 죄를 지을 가능성을 뜻하는가? 또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버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의 처지에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일이 잘 안되니까 연약한 자기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는 연약성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 보다는 정서적 욕망이 아주 쉽게 발로되니까 그것을 타락한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아담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지 않았지만 선악과를 먹었다. 최초의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짓는 것은 타락한 본성이 없을 때에도 지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본성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계시와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이 계시하는 타락한 본성에 대하여 내가 깨달은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이다.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없다. 썩어져가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타락한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은 썩지 않으려는 갸륵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이다. 마음을 옳은 편으로 향하고 그것을 향해 힘써 걸어가려고 한다. 사람은 도덕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를 믿지 않아도 도덕적이다. 모든 큰 종교가 바로 도덕성을 계발하여 지선(至善)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지선의 결과가 극락과 천국이 아닌가? 그들의 지선으로 계발한 도덕성이 합당한 상을 얻게 한 것이다. 사단은 바로 이런 사상을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심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바로 악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노력할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 사람이 비록 아담 안에서 다 사형수가 되었을지라도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 있다. 이 기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 전적으로 나를 주장하고 내 안에서 예수 생명이 생활하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유혹이 강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야 한다. 예수를 한 순간이라고 떠나면 예수님이 맺게 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15:4~8)

교훈: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해져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구원의 주님께 맡기면 죄는 우리에게서 지배력을 잃게 된다.

금요일(8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05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교회증언 3권, 365 “청년들에게 호소함.”

“그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고 있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품성을 얻게 하시려고 하신다.”(시대의 소망, 123)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직접 약속하였고, 지성과 감성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화된 인간 도구들과 협력하기로 맹세한다.”(화잇 주석, 롬 6:1~4)

“믿음과 행실이 일치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악한 자의 자녀들은 그들 자신의 주인의 종이다. 누구를 섬기든지 그 섬기는 자의 종이 된다. 그들이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늘 왕의 종들이, 사단의 종들이 참여하는 오락과 쾌락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그들이 그런 오락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흔히 말할지라도 해가 없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분리시켜 당신 앞에서 정결하게 하시고자 신성하고 거룩한 진리를 계시하셨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교회증언 1권, 4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죄를 극복하리라는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 우리 마음이 부패되어 있다면 뭔가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 예수를 믿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요5:24) 마음에 부패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다. 곧 아담 안에서 얻은 사망의 생명이 가진 경험이다. 이 경험은 세상의 죄가 유혹할 때 아주 쉽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려고 한다. 그때 내 속 사람이 곧 성령으로 그 반응을 차단해야 한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요일3:9) 그러나 세상의 죄가 자극하고 유혹할 때 받아들이려는 반응을 할 수 있다. 그것을 막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싸우는 것이다.(엡6:11~18) 우리 마음에 부패의 흔적마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생명의 능력으로 완전히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간증해 보십시오.

* 각자가 말해보세요. 정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세요.(고후13:5)

3.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일에 의존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간과한다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구원의 두 측면을 함께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사람은 성령으로 그 재창조된 형상대로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아직도 내 안에 있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의 저항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첫 사람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 둘째 사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고전15:45~49) 그래서 때때로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이 다툰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이유이다.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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