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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5분

기억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 교과토의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해 줍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 14~16장

어떤 사람이 고령의 유명한 랍비를 찾아가 율법의 전체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랍비는 한 발로 서서 “너에게 해로운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들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랍비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은 근본적인 것이고, 나머지 것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구원의 근본적인 원칙에 상당히 집중해 왔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구약의 모든 제도가 필요한지 아니면 십계명의 역할만이 필요한지 연구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용납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이방인 간수의 질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거기에 대한 설명으로 바울은 이제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다룬다. 바울은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을 다루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중요하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15:5

|학습목표|

⊙ 깨닫기 : 각자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명한다.

⊙ 느끼기 :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가치 있게 평가한다.

⊙ 행하기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화평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실행한다.

01. 깨닫기: 다양성 속에서 하나 됨

A.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각자 다르다면, 개인적인 양심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왜 우리가 서로를 용납하고 격려하며 서로 배워야 하는 것인가?

B. 교인들이 각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떤 차이점이 생기는가?

C. 이런 차이점이 어떻게 분열 또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가?

02. 느끼기: 서로를 가치 있게 여김

A. 개인적인 양심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는가?

B. 우리의 생활방식 또는 행동방식, 또는 영적인 문제에 대한 차이점을 염려하는 교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주어야 하는가?

03. 행하기: 몸을 세움

A. 서로 다른 점이 많지만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연합의 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점: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각자 다르게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존중하며 서로 배우는 정신을 배양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다.

일요일(9월 19일) 연약한 형제

롬 14:1~3에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가 나온다.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에서는 이방인 개심자들에게 그런 종류의 육류를 삼가도록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것인지는 항상 의문시되었다(고전 10:25). 그럼에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어떤 이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차라리 채식을 하기로 선택했다. 이것은 채식주의나 건강한 생활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또한 이 본문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폐지되었다는 어떤 암시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롬 14:2)라는 말씀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그와 같은 적용은 다른 신약의 본문들과 배치될 수 있다.

반면 믿음이 약한 자를 받으라는 말씀은 교인으로서의 그의 권리와 그가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을 온전히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교인들이 그와 논쟁을 하는 대신 그가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❶ 그렇다면 롬 14:1~3에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합니까?

[롬14:1~3]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답: 믿음의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적용하는 부수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마다 다양성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3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문구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강하게 되는 방법을 조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민한”(하나님이 아닌 동료 신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신자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❷ 롬 14:4은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롬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답: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신다. 성경이 가르치는 일반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을 때 그것으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비판하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후 13:5; 고전 11:31).”(시대의 소망, 313)

<부가설명> 로마14장 처음부분의 말씀은 특히 재림 신자들에게 논란이 많은 내용이다. 먹는 것과 날짜를 지키는 것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식에 관한 것이냐? 안식일에 관한 것이냐? 이런 문제가 결부되면서 논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채식과 육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말씀도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이지만 우상에게 바친 것은 금지되었다. 그런데 바울의 말대로 이 세상에 신이 없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쳤다는 것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묻지 말고 먹으면 된다는 생각과 우상에게 바친 것은 먹지 말도록 금한 것이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날짜도 먹는 문제와 결부되어 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금식일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인 사회에서는 유대인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본받아서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것이 권장된 것이었다. 그것은 관습이지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각각 마음에 정할 것이다. 마치 우상에 제물이라고 할지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것은 결코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금식일도 각각 정할 것이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각각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제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대하여 각각 자기가 결정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한다.

월요일(9월 20일) 그대가 사용하는 잣대

❶ 롬 14:10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 주의하도록 권면하는 이유 는 무엇입니까?

[롬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답: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요 8:7).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흠 없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쉽다. 때로는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그렇게 한다. 남이 하면 안 되고 내가 하면 괜찮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스스로 어리석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1~4)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❷ 바울이 롬 14:11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은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롬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답: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결정하고 생활하도록 용납하라. 자기 결정은 그날 자기가 책임을 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인용된 사 45:23은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상을 말하고 있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는 이런 교훈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12절). 그때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❸ 문맥을 고려할 때, 롬 14:14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답: 우상에게 바쳐졌다하더라도 음식 자체가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양심은 존중 받아야 한다.

본문의 주제는 여전히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다. 정결한 짐승인지 부정한 짐승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핵심이 아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8:4 참조). 따라서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양심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민한 자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무시하였고 그들의 길에 걸림돌을 두었다.

자신을 표준으로 삼지 말 것

“그대의 의견, 의무에 대한 그대의 견해, 성경에 대한 그대의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표준으로 삼지 말고, 그들이 그대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산상보훈, 123)

<부가설명> 바울은 13장에서 국가 권력에 대항하지 말고 순응할 것을 말하면서 끝부분에서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을 권고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14장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국가 권력을 존중하고 순응하듯이 각 개인의 신앙적 결정에 대하여서도 용납하는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 재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자기 표준을 비판하는 것은 재림을 앞두고 있는 성도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래서 각각 심판대 앞에서 직고할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명백한 계시에 일치하지 않는 각 개인 신자의 결정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신앙의 표준이 아니고 각자의 결정이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며, 자기가 자기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거리끼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거리낌이 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들의 태도와 결정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양심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화요일(9월 21일) 거리낌이 되지 않음

❶ 롬 14:15~23을 읽으십시오(고전 8:12~13 참조).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감춰진 핵심은 무엇인지 요약해 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합니까?

[롬14:15~23]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고전8:12,13]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답: 우리는 각자 믿음으로 선택한 문제에 대하여 서로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는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17~20절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다양한 측면을 적절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식생활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육류 대신 채식을 선택한 자들과 논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화, 기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림 교회의 식생활 문제에 관하여 이 교훈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건강 기별, 특히 식생활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관점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❷ 22절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매우 흥미로운 경고를 덧 붙였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경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주어진 문맥 속에서 어떻게 조화됩니까?

[롬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답: 이 말씀은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 없는 행위가 타인의 양심을 상하게 하거나 그의 양심에 어긋나는 모본을 보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오락을 즐기든지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위, 심지어 식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선악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를 존경하는 누군가가 그대가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도 그대의 잘못된 모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대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본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특성들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특성들은 곧 인내와 오래 참음과 화평과 사랑이다. 사랑이 부족할 때에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된다.”(교회증언 6권, 398)

<부가설명>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켜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계명을 법적으로 범하지 않고 지켰는가 못 지켰는가를 묻기보다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묻는다. 베드로는 재림에 대한 소망을 말하면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묻는다. 어떤 사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그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구원은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들을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중생이요 그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 되면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되지 못하고 계명의 조문을 따지고 성경 구절을 이용하며 예언의 신의 증언을 사용하여 자기 표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매도하면서 자기는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한 것처럼 나타내려고 한다. 자기의 보기에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성경적으로 안 산다느니, 예언의 신을 부인한다느니,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반대한다느니 등등. 평가를 하고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그런 정신은 어떠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의문에 속하여 의문으로 사는 모습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랑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본질이요 계명이 기쁨으로 생활되는 상태이다. 진리로 자유하게 된 사람들인 것이다. 즉 진리가 그이 자유가 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교훈: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죄가 되는 일을 행하는 모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요일(9월 22일) 날들을 지킴

바울은 앞서 우리와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고, 우리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한편 일부는 원하지만, 다른 이들은 지키기를 원치 않는 기념일 문제도 제기되었다.

❶ 롬 14:4~10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넷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14:4~10]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답: 바울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유대교에서 전래된 몇 개의 축일을 준수하는 문제에 대하여 서로 정죄할 필요가 없다고 권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날을 준수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였다. 하지만 안식일은 이런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계명은 핵심적인 문제 곧, 도덕법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어떤 날들을 준수하는 문제로 초대교회에 논쟁이 있었는가? 갈 4:9~10에서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갈리디아 신자들을 질책하였다. 이로 보건대 초기 기독교에 분명히 그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갈리디아 신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설득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으로 로마교회도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자들은 오히려 유대인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축제일들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설득해야만 했다.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각자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라고 말하였다. 핵심은 그 문제에 관하여 그대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축일 가운데 한두 개를 준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라고 권고하였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롬 14:5에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시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되지 못한다. 바울이 제4계명에 대하여 그렇게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 교과에서 줄곧 살펴봤던 것처럼, 바울은 도덕적 율법의 준수를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에 대한 문제와 제4계명을 같은 범주에서 다룰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제칠일 안식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그런 사실과 무관하다. 그래서 바울의 글을 오용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안식일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님

“안식일은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담과 하와가 지켰고 온 하늘의 천군들도 역시 이 날을 지켰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쉬셨으며 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초기문집, 217)

<부가설명> 이미 앞 문제에서도 말한 것처럼 날에 대한 문제는 교과 저자의 말대로 유대인들의 절기에 대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고심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대로는 날 문제가 먹고 먹지 않는 문제와 함께 취급된 것을 보아서 금식 일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것도 여기 바울이 논한 것처럼 지엽적인 것이기 때문에 각각 마음에 확정할 사항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본신조와 교리와는 상관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기 교부들의 문서 중에 금식 일에 대한 언급이 있는 문서들이 있다. 눅18:10~13에 기도하는 사람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이 자기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금식 일 풍습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입된 것이다. 그래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금식 일을 지키는 것과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왈가왈부된 것 같다. 바울을 이 사실을 교통정리한 것이다. 날을 지키는 것이나 지키지 않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먹지 않는 것이나 다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주님을 위하여 한다는 말의 뜻을 바르게 깨달으면 이 말씀으로 날마다 먹는 음식이나 안식일 문제에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준 것이기 때문에 폐할 수 없다. 그것을 폐하면 사람을 위하여 하신 하나님의 일이 폐하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는데(마7:9~11)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음식물로 주신 사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안식일 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일상의 식생활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교훈: 일부 날들을 중요시 여기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을 같은 범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목요일(9월 23일) 적절한 축도

❶ 롬 15:1~3을 읽으십시오. (1)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기독교 진리는 무엇입니까? (2) 위의 말씀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습니까? (3) 같은 사상을 가르치는 다른 성경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이런 원칙에 따라 살겠습니까?

[롬15:1~3]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답: 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봉사하며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이 되도록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②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③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24, 33).

❷ 서신을 마쳐 갈 즈음에 바울은 어떤 다양한 말로 축도하였습니까? 롬 15:5~6, 13, 33.

[롬15:5,6,13,33]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답: 바울은 “인내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께서 로마 교인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였다.

인내의 하나님이란 그의 자녀들이 끝까지 견디도록 돕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휘포모네는 “불굴의 용기” 또는 “꾸준한 참을성”을 의미한다. 위로라는 말은 “격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로의 하나님은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란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❸ 개인적인 안부를 전한 뒤에 바울은 어떻게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까? 롬 16:25~27.

[롬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답: 바울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복음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인들이 견고하게 되기를 기원했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서신을 마치고 있다.

바울은 영광과 찬미의 기원으로 로마서를 마치고 있다. 우리는 로마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안전하게 믿을 수 있다.

바울은 그와 같이 놀라운 소식의 전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다. 그는 이런 소식을 일컬어 “나의 복음” 즉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라고 불렀다. 그의 복음은 예수님과 다른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검증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비밀이 되었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더 밝은 빛을 주시지 못하도록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메시야가 인간의 육체로 오시기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종의 섭리가 있었다. 메시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었고, 거룩한 능력을 내려놓고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새로운 종류의 삶이 “믿음의 순종”으로 시작되었다. 순종은 죄인을 의롭다 칭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믿음의 격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에게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그 산 믿음을 갖도록 서로 격려해야 한다.”(교회증언 9권, 273)

<부가설명>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백성이 된 사람도 같은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평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의로움을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는가. 그것은 예수님 정신이 아니고 예수님 생명의 역사도 아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도 화평을 누린다.(롬5:1)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에게 화평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위하여 인내가 필요하고 위로를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중에 우리는 재림의 소망을 더욱 굳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남의 약한 것을 능히 도울 수 있는 튼튼하고 힘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게 평화가 되는 삶이 날마다 이루어지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은혜로 복 주시기를 바란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인내심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금요일(9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독서 과제: 교회증언 5권, 477~478 “교회의 연합과 사랑”, 604~606 “실수한 자들에게 대한 사랑”, 치료봉사, 166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 줌”, 재림교 성경주석 13 권, 220.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가 있을 때에 화잇 부부를 바라보고 그 문제에 대한 권고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 속에 빠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 . . 많은 이들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해도 될까요? 그 사업을 해도 될까요?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연구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성경을 읽어라. 그분의 생애를 모방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좁은 길에서부터 빗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대의 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한다면, 그대는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118~119)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이며 무엇을 해야 될는지 우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권고에 의지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교회 안에는 언제나 혼자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정신이 인간 도구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임명하신 직분에 있는 사람들의 권고를 존중하고 그들의 판단을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을 신임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사도행적, 163~1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다음 아래의 경우에서 어떻게 바른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까?

❶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 충성하지만,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정죄 하지 않는다.

*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견해가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오직 성경으로 그에게 바른 증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말씀으로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인내로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❷ 내 자신의 양심에 바르게 행하되, 오류에 빠진 것이 확실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말해야 하는가? 침묵해야 하는가?

* 오류에 빠진 것이 확실하면 기도하고 성령의 감화와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에게 성경의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❸ 주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되 나를 존경하는 자들에게 좋은 모본을 보일 책임이 있다.

* 당연하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물론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본으로 보일 생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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