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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의 주제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하나님

기독교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세 하나님이라고 할까? 신이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지 삼위일체가 뭘까?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했는데 안줘서 어머니에게 가서 달라고 하니까 주었다. 그렇다면 아들은 부모를 대하는 두 개의 통로를 갖는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거절했으면 어머니도 거절한다. 그러면 부모에 대한 아들의 통로는 하나다. 하나님은 세분이지만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통하는 길이 하나라는 말이다. 아버지를 불러 구하나, 아들을 불러 구하나, 성령님을 불러 구하나 반응은 언제나 동일하다는 말이다.

세상에 유일신 종교가 많다. 힌두교의 브라만, 노자의 도(道), 불교의 일원사상, 천도교의 하늘님, 회교의 알라 신, 그러나 그 신자들이 그 신에게 무엇을 구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어떤 다른 신을 찾아 두리번거린다면 그들은 한 하나님을 불렀어도 유일한 신을 믿은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서 응답되지 않을 때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감사한다’는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성경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선택한 것은 벽을 향해 기도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히스기야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청천벽력과 같은 이 말을 듣고 어디로 갔을까? 이방종교인들인 태양에게 구해서 안 되면 달에게 구하고, 달에게 구해서 안 되면 별에게 구하고, 별에게 구해서 안 되면 뒷동산에 가서 그 중 제일 그럴듯한 큰 바위에 가서 구한다. 신이 많다는 것은 인간의 부름에 반응하는 신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에서는 갈 곳이 없다. 하여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 이방종교에서는 벽을 보고 명상을 하지만 벽을 향해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향해 기도할 곳은 어디든지 있다. 하지만 성경 종교인들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 교의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임무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땅에 나타나신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가 있다.(요 14:9; 12:4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고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으나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밝히 알지 못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므로(히 1:1,2)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예수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도 없을 뻔했다.

이방인들은 재난에서의 구원을 위하여 또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렸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물을 드렸다. 물론 예수님도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셨다. 예배가 인간의 요구 충족이 아니라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인간은 요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어떤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만약 예배가 인간의 요구 충족이라면 그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없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죄 문제부터 해결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실까?

예수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형상일까?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옥을 만들지만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끝없는 용서를 작정하셨다. 하여 아무리 붉은 죄도 구하기만 하면 즉시 용서된다. 용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 마음속에 작정된 법령이다. 용서는 인간이 가장 많이 경험한 하나님의 얼굴이다.

교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요(출 4:22)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그 자녀들을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 중엔 아주 드물게 그 음성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세상에서 나와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신약시대에는 ‘에클레시아’라고 했다. 이것은 ‘으로부터'를 뜻하는 에크(ek)와 ’부르심‘을 뜻하는 칼레오(kaleo)가 합하여 된 말로서 ‘~에서 부르심’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뜻하는 교회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하나님은 인간 모두에게 있어 개인적인 하나님이다. 한데 왜 하나님께서 교회를 두셨을까?

첫째 세상에서 나온 자들은 언제든지 사단의 공격 목표다. 맹수가 공격해올 때 얼룩말들이 머리를 가운데로 하고 한데 뭉쳐서 뒷발질을 하면 하나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하지만 흩어져 도망하면 그 중에서 한 마리는 반드시 죽는다.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세상과 대적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합하여 용기를 주고 그 가운데서 쉼을 얻어야 한다.

둘째 세상에서 나온 자들에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할 의무를 가진다. 바울이 죽을 정도로 힘들게 전도하면서도 자랑하지 못한 것은 이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전 9:16) 그것은 좋은 소식을 혼자 알고 있는 자들이 흔히 갖는 감정이다.(왕하 7:9) 세상에서 나온 자들이 좋은 복음을 가지고 다시 세상으로 들어갈 때 힘을 합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행 4:31) 위하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행 2:42)는 것이다.

셋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마 18:19) 이 말은 혼자 기도하면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땐 누구나 성자다. 두 세 사람이 모여야 비로소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

요한일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가족이다. 하나님이 교회의 한 구성원이라고 생각할 때 교회는 대단히 귀한 기관이다. 이 귀한 기관을 향해 사단은 한 개인을 공격할 때보다 더 강렬한 힘으로 공격한다. 결국 교회는 타협함으로 공격의 고삐를 늦추었지만 타협의 물꼬를 튼 교회는 상상할 수도 없는 타락의 물살을 타게 되었다. 정녕 하나님은 실패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그들 가운데서 나오라는 부름을 교회를 향해 발하셨다. 남은 자들, 그들은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나온 교회들이다.

구원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위치 변경을 구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이 말하는 구원은 다음과 같다.

불의에서 깨끗게 하심이다.(요일 1:9)

하나남과의 화해다.(요일 2:2; 4:1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요일 2:3)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요일 2:5)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요일 2:12)

악을 이겼다는 것이다(요일 2:13)

우리를 살리려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일 4:9)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요일 4:10)

아무리 저 멀리 하늘에 가서 생명과를 먹고 생명수를 마실지라도 위에서 말한 한 가지만 없어도 그곳은 천국이 아니다. 불의에서 깨끗게 되지 못했다면, 하나님과의 불목하는 관계라면, 하나님을 모른다면, 하나님 밖에 있다면, 죄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악을 이기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 게 아니라면, 우리가 처한 곳이 어떤 환경이라도 그곳은 천국이 아니다. 한데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서 실제(實際)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구원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實在)’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먼 미래에 다가올 무엇이 아니라 현재 누리는 것이다.

어떻게 이 엄청난 일들이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요 현재에 누리는 경험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한 행악자를 향해 예수께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다. ‘오늘 말씀하셨는지’ ‘오늘 낙원에 이를 것인지’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예수를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에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악을 이기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들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영생까지라도 포기할 것이기에 이것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맛보는 구원인 것이다.

구원 받은 자들에게

성경은 어디에도 ‘구원 받을 자’들에게 생활 지침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들이 살아야할 삶에 대해선 엄격하게 말씀하신다.

첫째 죄를 자백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인간이 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그 속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자백하면 주께서 그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그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요일 1:8-9)

둘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줄 아신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이다.(요일 2:3-4)

셋째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살이에 대한 자랑이다. 이것들은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요일 2:15-16)

넷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요일 3:14-15)

다섯째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 재물을 가지고도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에 계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진실한 행실로 사랑해야 한다.(요일 3:17-18)

여섯째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요일 4:7-8)

일곱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알 수 있는 것이다.(요일 5:2-3)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다. 죄에서 나온 백성이 다시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아야하는 것이다.

진리

거짓의 벽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의심과 불신을 막아내는 것은 진리뿐이다. 사려 깊은 인간의 부단한 질문은 진리란 무엇이냐는 것이다. 거짓의 벽을 깨뜨리고 진실의 속을 파헤친다고 진리의 속살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짓의 토대가 되는 무지를 벗긴다고 하여 진리의 빛이 비치는 것도 아니다. 밝음을 막아 어둠으로 인도하는 오해와 편견의 장벽을 깨뜨린다고 하여 진리의 찬가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 모순이 제거되거나 이성적 토의를 거쳐도 진리는 아니다. 인식론적인 깨우침이나 이성적인 판단도 진리는 아니다. 진리란 거짓의 땅에서 활발히 운동하는 불신과 의심을 막아내는 동력이요 인간을 자유케 하는 힘이다.

진리란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인생문제의 답이다. 삶에 대한 절박한 방도요 그리스도인이 걸어야할 도리다. 어떤 누구도 본인이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 말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인생 문제의 해결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다.(요 14:6) 인생 문제의 해결자라는 뜻이다.

빌라도는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누가 진리냐’고 묻지 않고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고 묻는 질문 앞에서 예수께서는 입을 열지 않으셨다. 길을 찾아 헤맨 인간의 노고와 진리를 향한 인간의 열정은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방향을 바꾼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에게, 그리고 방향을 바꿀 준비가 되지 않은 인간에게 진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런 자들에게 진리는 곧장 오류로 바뀔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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