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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7분)

 

기억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연구범위: 레 19:18, 눅 14:26, 요 3:20, 13장, 딤전 2:4, 벧후 3:18, 요일 2:3-11.

 

학습 포인트: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요한은 우리 행동의 모본이신 예수님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요한이 말한 '새 계명'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안식일 오후

어떤 목사님이 한 부부를 상담하게 되었다. 문제는 남편의 외도였는데, 단지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여성들과 연루되어 있었다. 그 남편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덧붙이기를, 자기는 아내를 다른 어떤 여인들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그의 말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왜 그런가?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번 주에 요한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해 준다. 누구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핵심본문: 요일 2:1~6

 

학습 목표

깨닫기: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께 순종하게 됨을 깨닫는다.

느끼기: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다.

행하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에 반응한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참된 지식

A. 요한은 왜 '옛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했는가? 구약에 나오는 이웃 사랑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에 나타난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B. 재림교인들은 종종 율법주의자라는 말을 듣는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비난은 합당한가?

C. 사람들은 어떻게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가? 하지만 지식은 왜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가?

 

II. 느끼기: 예수님의 모본을 따름

A. 사랑과 순종은 분리할 수 없다. 어떻게 이 둘을 함께 배양하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가?

B. 영지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했는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지식보다 경험을 중시한다. 하지만 왜 느낌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대신할 수 없는가?

 

III. 행하기: 행동하는 지식

A.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이러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B. 우리가 예수님의 모본을 항상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점: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은 그분의 계명이라는 틀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 있고 사랑스런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준다.

 

일요일(7월 19일)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요일 2:3~5)

 

오늘의 본문에는 "이로써 우리는 아노라"하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3절). 둘째, 그들이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5절).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을 고려할 때(참조 요 5:29), 우리는 이것들을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우리는 지식 그 자체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요한이 이 서신에서와 다른 곳에서 대처하고자 했던 이설로서, 지식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사상이었다.

'지식'(그노시스)은 고대 종교에서 중요한 요소였는데, 특히 그리스도 이후 첫 번째 세기 동안 종교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것은 2세기까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완전히 자라나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단으로 발전하였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도덕적인 행동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체험과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공상적 신화를 강조한다. 구원은 주님과의 믿음의 관계를 통해서 주어지기보다는 이 신비한 지식을 통해서 얻는다고 가르친다.

요일2:3-5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1. 다음 구절들은 신약에서 지식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까?(마 13:11, 눅 1:34, 77, 요 17:3, 롬 3:20, 고전 8:1, 딤전 2:4, 벧후 3:18, 요일 4:8)

마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눅1:34, 77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답: 신약에서 지식(혹은 앎)은 이론적인 것뿐 아니라 체험적인 것도 말한다. 특히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말한 것은 체험적인 앎을 말한 것이다. 지식에는 이론적인 면과 체험적인 면이 동반된다.

 

신약에서 '알다' 또는 '지식'은 이론적 및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관계를 묘사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순종, 사랑, 죄를 멀리하는 것 등 이 모두는 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들이다. 지식에 있어서 이론적인 면과 경험적인 면은 함께 가야 한다.

요한은 '알다'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했지만, '지식'이라는 명사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영지주의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전문적인 용어를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체험적 지식을 통한 순종의 생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체험적인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있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다. …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쓰라린 실망을 맛보게 될 자들 중에는 외식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겉으로만 신앙 생애를 해온 자들이 있을 것이다. 저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자아가 엮어져 있다. 저들은 자신의 덕행, 영향력,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설 수 있는 재능 및 진리에 대한 저희 지식이 그리스도의 칭찬을 받게 하는 줄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만하고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눅 13:25-27)

 

<부가설명>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세상에서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때때로 생명을 보존하느냐 잃느냐 할 정도로 중요하다. 구원과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다. 여기 안다는 말이 바로 기노스코인데 경험적 지식을 뜻하는 말이다. 실습을 자주 하지 않고 이론만 배운 사람은 공장에서 실습으로 기계에 대하여 아는 사람과 같지 않다. 이론은 빤해도 기계를 다루는 솜씨는 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과 비교가 될 수 없다. 그 기계의 공학적 이론을 설명하라고 하면 실습만 한 사람은 아마도 잘 못할 것이다. 둘을 겸하고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실습으로 익숙한 사람이 유용하다.

구원과 영생도 실습으로 익숙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유대인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였다.(요5:39) 그러나 그 성경이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성경은 연구하면서도 생명이신 예수님께 가지 않았다.(요5:40) 우리의 지식이 유대인과 같으면 안 된다.

 

교훈: 요한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영지주의를 의식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에 '지식'이라는 명사 대신 '알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월요일(7월 20일) 계명들을 지킴 (요일 2:3~5)

 

누구나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요한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말한다.

 

1. 요한에게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외적인 증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은 이 주제에 관하여 또 어디에서 언급했습니까?(요 14:15, 21, 15:10, 요일 3:22, 24, 5:3, 계 12:17, 14:12). 이 구절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이 구절들은 율법에 관한 우리 재림교인들의 입장을 어떻게 대변해 줍니까?

요14:15, 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일3:22, 24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답: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증거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요한과 예수님께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요한의 글에서 그러한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여기에 사랑과 순종이 연결되어 있다. 본문에서 '그'(Him)라는 용어는 다소 애매하게 사용되어서 성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가리킬 수 있는데, 아마도 요한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일서 2:4에는 같은 진리가 부정적인 용어로 서술되었는데,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주장들을 지적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자는 누구나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매우 강한 어조로 견책하고 있다.

 

2.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표현이 됩니까? 율법을 지키는 여부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실체를 드러내 줍니까? 이 둘은 서로 어떻게 연결됩니까?

 

답: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지 사실들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 지식이다. 상대방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비록 밤낮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그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요한의 말대로 그는 거짓말쟁이이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하다. 그대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 그처럼 철저하게 사랑을 강조한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고 말한다.”(부조와 선지자, 153)

 

<부가설명>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이미 어디서 설명한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요5:24)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 생명이 그리스도이시다.(요일5:11,12) 그런 사람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었고 예수님의 계명이 그의 마음에 생리현상이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프고 괴롭고 불편해서 견디지를 못한다. 생명이 나타내는 생리현상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또 예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몸의 지체는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예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의 확실한 지체가 되어 있는지?

 

교훈: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다.

 

화요일(7월 21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요일 2:6~8)

 

요일2:6-8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한때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영어로 WWJD라고 새겨진 팔찌를 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새겨진 글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라는 말의 머리글자였다. 어떤 이들은 유치한 생각이라고 비웃었지만 적어도 그 아이디어는 좋았으며,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 아이디어는 여기 요한이 한 말과 잘 부합된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은, 빛 가운데 행하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순종을 의미함을 강조한다. 두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름으로 빛 가운데 행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어떻게 그분의 모본을 따를 수 있는가? 먼저 예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 하며,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삶을 모방해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1. 사복음서를 간단히 훑어보십시오. 가장 좋아하는 예수님에 관한 기사는 무엇입니까? 어떤 기사가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줍니까? 당신은 그 분야에서 얼마나 주님을 닮았습니까?

 

답: 이것은 공부하는 각 사람이 대답해야 할 물음이다. 필자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하신 말씀을 좋아한다. 예수님은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용서하는 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궤계에 빠진 사람이다.(고후2:10,11) 또 예수님의 교훈 중에 “내가 무엇 무엇이다”라고 한 교훈을 좋아한다. 그런 교훈은 예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교훈으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바로 그러신 분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말하는 그것이 바로 나의 인격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 쉽지 않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유하심을 기도하면 산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서의 절정이지만, 그분의 가르침과 생애에 관한 정보도 충분히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혹은 대속자로만 생각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혹은 모본자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구주와 모본자로 다 받아들였다. 요한일서 1:7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보혈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2:2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제물로 나타난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이시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는 다른 측면이 부각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름

“그리스도께서 생애하시던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 즉 그분이 밟으신 곳을 걸어보고 그분이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던 호숫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눈이 때때로 머무르던 들과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은 큰 특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하여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에 갈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병상 곁에서나 빈곤한 오두막집에서나 사람이 많이 모인 대도시의 뒷골목 길에서나 인간의 마음에 위안이 필요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지상에 계실 때에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므로 우리는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 행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640)

 

<부가설명> 대답에 적은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런데 그 우리가 어떤 우리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죄인인 우리의 모본이신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죄인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고전15:22), 죽은 자들에게는 모본을 보일 수가 없으며 보여도 그들은 그것을 따라 행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삶의 모본이 되는 것은 산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에게 모본이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모본이시라는 말이다. 그들은 거듭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예수 생명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인 노력으로 하는 행동이 된다. 그것은 열매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열매이며 빛의 열매이다. 열매라는 말씀을 깊이 명상하면 귀한 이해에 이를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며 대속자이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모본자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수요일(7월 22일) 새 계명 (요일 2:7~8)

 

요일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은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요일 2:3~4)을 강조한 다음, 7절과 8절에서 "새 계명"을 소개한다. "새 계명"이란 무엇인가? 그 답은 같은 표현이 나오는 요한복음 13:34에 있다.

 

1. 요한복음 13장을 읽으십시오. 앞뒤 문맥에서 "새 계명"이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어떤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요13:14-17, 31-3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답: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가룟 유다와 같은 제자까지도 차별 없이 사랑하셨으며, 자신을 희생하시는 무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셨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비천한 일을 행하신 예수께서는 섬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후에 '새 계명'을 반포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또한 서로를 사랑해야만 했다.

요한일서 2:6~8에도 상황이 유사하게 전개된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라는 말을 한 다음,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명, 곧 새 계명을 제시하였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3:34~35과 문학적으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요한일서 2:7~8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계명은 형제자매 간의 사랑에 관한 계명이다.

그런데 요한은 왜 자신이 새 계명이 아닌 옛 계명에 대해 쓰고 있다고 말했는가? 그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이 이미 구약에 제시되었기 때문이다(레 19:18).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때에 요한복음 13:34에 나오는 예수님의 "새 계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계명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실제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6절). 그리고 그분의 초림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그분의 제자들에게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8절,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마침내 하나님의 율법의 개념이 본문의 앞부분(요일 2:3~6)과 뒷부분(요일 2:7~8)을 연결시킨다. 계명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된다.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계명들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는 자들임을 의미한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날 저녁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고 말씀하셨다. 그 예식의 기별은 명백하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것은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은 우월감이나 편파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준다. 우리의 생활 방식은 동료 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반영할 것이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인해 기뻐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283)

 

<부가설명> 많은 교인들이 새 계명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 계명인 줄 안다. 그러나 본문을 유의하여 읽어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새 계명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이며(요15:13), 원수 되었을 때에 대신 죽어주신 사랑이다.(롬5:8) 그러므로 섣불리 서로 사랑하면 계명을 이루는 것이라는 어정쩡한 해석이나 이해는 발붙일 곳이 없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강조하여 다시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우리가 옛 계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이런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옛 계명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새 계명은 예수께서 위하여 목숨을 주신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에게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시면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요한이 다시 강조하고 있는 새 계명이었다.

 

목요일(7월 23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 (요일 2:9~11)

 

요일2:9-11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1. 위 본문에서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요약해 보십시오.

 

답: 요한은 교우간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했다. 형제를 차별하는 자는 진리의 빛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요한일서 2:5에는 사랑이 무엇인지 간결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나타낼 수 있다. 새 계명에서 다시 언급된 사랑(6~9절)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이 분명한데, 이는 오늘의 본문(9~11)에서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구절도 역시 "~한다 말하는 자"(참조, 4, 6, 9절)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9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다. 10절에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긍정적인 표현이 나온다. 11절에는 다시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눈이 이미 멀어버렸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거나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문제는 그의 주관심사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에게 당장 대두되고 있는 다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2. 형제를 미워한다는 표현은 매우 강렬한 진술이며, 우리 자신의 행동에 적용하기가 꺼려지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냥 화가 났다든가 기분이 상했다고 표현하기 원하지만 성경에는 종종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는 미워한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다음 구절에서 그러한 표현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합니까?(마 6:24, 24:9~10, 눅 14:26, 요 3:20)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24:9,10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답: 성경에서 종종 '미워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함으로 다른 사람을 경홀히 여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한다.”(참조 요 3:20)는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 미워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함으로 다른 사람을 소홀히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은 반드시 혐오한다는 의미만은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빛을 통해 새 계명을 이해함

“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일컬었는가?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나타내실 충만하신 사랑을 아직 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분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받아 들여야 하였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분의 자기희생의 빛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갈바리 십자가에서 비쳐오는 빛 가운데서 그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읽어야 하였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40)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의 본질적인 기능은 사람을 살리려는 정신이다.(요일4:9)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이끄는 정신으로 살아야 하며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은 위하여 죽은 자들이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사랑이다. 우리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를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런 조처를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많이 하는가 살리는 일을 많이 하는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교훈: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고,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미워한다는 표현은 증오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금요일(7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창세기 39:7~12, 다니엘 3:8~18, 요한계시록 13:16, 14:5.

 

계명들을 지키는 것,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여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특히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도전을 받고, 참된 경배와 창조주께 대한 순종의 문제가 우리 앞에 닥쳐오고 있다. 성경에는 가장 힘든 환경에서도 신실하게 살았던 요셉,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의 모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고의 모본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르기로 결심해야겠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함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진리의 이론을 믿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은 협잡꾼이 아니요, 성경의 신앙은 공교하게 만든 우화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 요한은 순종을 통하여 구원을 획득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순종이 사랑과 믿음의 열매라고 가르쳤다.”(사도행적, 56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십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어떤 모순에 빠지게 됩니까?

* 자기가 계명에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착각하고 계명의 정신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모순에 빠진다.

 

2.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ael Foucault)는 두 종류의 지식을 말하고 그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그것을 얻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지식이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어떤 종류의 지식이며, 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 변화시키는 지식이어야 한다. 예수의 생명으로 중생하여 생명의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지식이다.

 

3. 어떻게 하면 우리는 계명들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으며, 이와 반대로 율법에 불순종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요?

*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의 구원과 중생의 의미를 깨달으면 이런 함정에 빠질 수가 없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사랑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볼 수 있었다. 참으로 사랑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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