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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예수, 영혼의 닻

(21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8)

 

연구 범위: 6:4~6, 16:24, 6:6, 10:26~29, 6:9~13, 6:17~20

기억절: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6:19, 20).

 

히브리서 5:11~6:20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신학적 해설을 중단시킨다.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의 위험에 관한 엄격한 경고를 삽입한다.

당시 신자들은 자기 연민에 빠져 믿음을 잃게 될 실제적인 위험에 빠져들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독자들과 청중들이 그들이 마주한 힘든 상황들로 인해 영적 감각이 둔하게 되어 복음에 대한 이해와 경험에 대한 성장을 멈추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그런데, 이처럼 여러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엄격한 경고는 사랑 가득한 격려의 말로 막을 내린다.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면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의 약속을 이루실 분으로서 예수님을 높인다(6:9~20). 이와 같은 경고와 격려의 순환 구조는 히브리서 10:26~39에서도 반복된다.

이번 주 우리는 이처럼 서로 맞물리는 경고와 격려의 순환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에 집중해 볼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죄악 세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유혹 가운데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영혼의 닻이 되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하나님 앞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보증하고 계심에 감사한다.

행하기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아간다.

 

TMI 위로 :

2. 하나님께서 신실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던 영적 경험들은 무엇이었습니까?(6:4, 5)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한 것이다.

3.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6: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에 회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4. 용서함이 없는 죄의 특징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0:26~29)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5. 세상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울이 준 권면은 무엇입니까?(6:9~12)

부지런하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며,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아라.

6.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보증하셨습니까?(6:17~20)

약속과 맹세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사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으로 보증하셨다.

 

결론

바울은 신자들에게 용서함이 없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좋은 구원의 약속이 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확실한 약속을 가진 자들로서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영혼의 닻 되시는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26()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봄

 

히브리서 6:4, 5을 읽어 보라. 신자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는가?

[6:4,5]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와 성령에 참여했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봄.

 

빛을 받았다라는 말은 회심을 경험했다는 뜻이다(10:32). 그것은 사탄의 어두운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으로 돌아선 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26:17, 18). 그것은 죄(5:11)와 무지(살전 5:4, 5)로부터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의 형태는 빛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1:3)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임을 가르쳐 준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과 성령에 참여한 바 되는 것은 표현이 다를 뿐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분의 은혜(5:15) 또는 그 통로가 되는 성령을 나타낸다(2:38). 성령을 맛본자들은(7:37~39, 고전 12:13)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능력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다(5:22, 23).

하나님의 선한 말씀”(6:5)을 맛본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벧전 2:2, 3). “내세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미래에 행하실 부활(5:28, 29), 우리의 몸의 변화, 그리고 영생과 같은 기적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그것들을 현재부터 맛보기시작한다. 그들은 영적인 부활과(2:12, 13), 마음의 새롭게 함과(12:2),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을(5:24) 경험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했던 광야 세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광야 세대는 불기둥을 통해 빛을 받았으며”(9:12, 19, 105:39), 만나라는 하늘의 선물을 받았고(16:15), 성령을 경험했으며(9:20),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고(21:45),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을 통해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7:36).

하지만 바울은 광야 세대가 이와 같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던 것처럼(14:1~35), 히브리서의 독자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허락하신 모든 증거들을 경험했음에도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위험에 빠져 있다고 경고하였다.

 

<묵상>

바울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당시의 독자들, 그리고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 우리도 같은 경험을 했다면 그 안에 잘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히브리서 독자들인 유대인 교인들은 조상이 전해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말씀에는 조상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모든 선물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것을 받았으니 그들도 빛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복음도 받았다. 그런데 동족들이 핍박과 로마 정부의 감시와 그로인한 생활의 곤고함이 밀려들어서 받은 이런 선물들을 잊어버릴 위험에 처한 것 같다. 바울은 34장에서 제시한 옛 이스라엘 사람이 광야에서 잘못하여 하나님의 안식이 드어가지 못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받은 빛을 따라 하늘로 향하는 걸음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권고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재림이 역사적 시간으로 더디니까 믿을 떠난 사람들이 많을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역사적 징조를 바라보면서 우리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기대하는 교인들이 많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대로 안 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받은 빛을 따라 인내로 끝까지 경주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서 설교들이 재림과 그 징조에 관한 것이 많다. 주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기대대로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처럼 되지 않아도 흔들려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바울은 광야 세대의 경험과 반역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의 독자들 또한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위험에 빠져 있다고 경고하였다.

 

 

27() 다시 새롭게 할 수 없음

 

히브리서 6:4~6, 마태복음 16:24, 로마서 6:6, 갈라디아서 2:20, 갈라디아서 5:24, 갈라디아서 6:14을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그리스도를 죽인다는 뜻이다.

 

헬라어 원어에서는 할 수 없나니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들을 새롭게 하실 수 없으시다(6:6). 바울(? 베드로)은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한다(4:12). 그리스도 외의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것처럼(6:18), 또는 믿음 없이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하다(11:6).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믿는 자와 예수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묘사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누리던 권위와 권력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존재를 제거하겠다는 의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가장 근본적인 단계를 시작으로 개인의 자주권과 결정권에 도전을 던진다.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16:24). 이것은 세상”(6:14), “옛 사람”(6:6), 그리고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5:24)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은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없다(6:1~11).

예수님과 자아 사이의 투쟁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투쟁이다(8:7, 8, 5:17). 이것은 한 번에 마쳐지는 싸움이 아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옛 사람육신과의 싸움에서 어쩌다 한 번씩 실패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죄는 참된 구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경험한 후에도(6:4, 5)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삶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로 선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완전히 떠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묵상>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6:6)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회개할 데가 없다는 뜻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믿다가 예수 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없애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같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했다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내게 예수님을 죽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다시 내게서 죽여버린 것이다. 즉 다시 새롭게 할 길을 없애버렸다. 그러니까 회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회개는 용서해주실 분이 있을 때 가능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용서해주실 분을 죽여버린 것이다. 우리 생애에 이런 일을 저질러서는 결코 안 된다. 십자가에 죽을 자는 자신인데 예수님을 죽였으니 회개할 수 있겠는가? 일시적으로 낙심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두가 되도록 복 주시기를 바란다.

 

<교훈>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로 선택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할 수 없으시다.

 

 

28()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브리서 6:4~6의 경고는 히브리서 10:26~29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고와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예수님 외에는 죄를 용서할 다른 어떤 방법도 없음을 반복해서 말한다.(10:1~14).

 

히브리서 10:26~29을 읽어 보라. 저자는 용서함이 없는 죄에 대하여 어떤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을 여기는 것,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속죄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대언자로(요일 2:1) 세우셨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죄의 용서를 경험한다(요일 1:9).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10:29). 이 세 가지 표현의 의미를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다(10:29)는 것은 예수님의 법을 거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그분의 원수들을 그분의 발등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한다(1:13, 참조, 1:5~12, 14). 예수님을 짓밟는다는 것은 배교자가 예수님을 원수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문맥에서 볼 때(1:13), 배교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은 보좌에서 끌어내림을 당하시고 대신 자신이 그 보좌에 앉아 예수님을 발등상으로 삼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루시퍼가 하늘에서 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며(14:12~14), 미래에 불법의 사람이 행하려고 하는 일이다(살후 2:3, 4).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라는 말은 예수님의 희생을 거절하는 것을 나타낸다(9:15~22). 이 말은 예수님의 피에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없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한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헬라어로 욕되게 하다(enybrisas)라는 단어는 무례함 또는 거만함, 오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은혜의 성령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성령님과 현저한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배교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에 모욕으로 반응했음을 의미한다.

배교자는 어떻게 해서도 정당화되거나 옹호받을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그는 예수님과 그분의 희생, 그리고 성령님을 거절한 자이다.

 

<묵상>

오늘의 주제 성구(10:26~29)를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혹시 내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 각 사람이 스스로 확인할 질문이다. 깊이 생각해보자.

 

<부가설명> 예수님은 단번에 드려진 속죄 제물이다. 반복해서 죽지 않으신다. 단번에 드린 그 속죄 희생이 인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처리하셨기 때문이다. 단번에 처리한 그 모든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망이 된 상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망하심으로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모든 아담의 자손이 사망이 된 그것을 단번에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두 번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예수님이 단번에 사망을 처리한 사실이 자기와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속죄할 제사가 없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10:27)라고 깨우친 것이다.

 

<교훈>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가르쳤다.

 

 

29() 더 좋은 것들

 

히브리서 6:4~8의 단호하고 간절한 경고 뒤에, 바울은 독자들이 아직 아들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경고를 잘 받아들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경작되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는 과 같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6:9)이라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6:7).

히브리서 6:9~12을 읽어 보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그동안 행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행할 선한 일들을 열거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라.

[6:9~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 섬김, 부지런히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고, 믿음, 오래 참음, 약속받는 자들을 본 받음 등을 열거했다.

 

신자들은 성도들을 위한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 바로 그분을 향한 사랑을 나타낸다. 이것은 과거 언젠가 행하고 끝나 버린 일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일들이었다. 특정한 때 등장하는 특정한 행동은 그 행동을 한 사람의 참된 성품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종교적인행동이 아니라 동료 인간들, 특히 소외된 자들을 향한 사랑의 행동이다(10:42, 25:31~46). 바울은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기를 잊지 말라고 권면한다(13:2, 16).

히브리서 6:12을 보라. 이 말씀은 성장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위험에 처한 자들의 특징인 게으름에 관하여 경고한다(5:11, 6:12). 소망은 믿음에 대한 지적인 학습이 아니라 사랑의 행실로 드러나는 믿음을 통해 살아 숨 쉬게 된다(13:8~10).

바울은 독자들이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물려받은 자들을 닮기를 바란다. 그는 이미 광야 세대를 믿음과 인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것을 물려받지 못한 부정적인 본보기로 제시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아브라함을 소개한다(6:13~15).

히브리서 11장에서 긍정적인 모본의 목록은 더 길게 나타나며, 마침내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위대한 믿음과 인내의 완전한 모본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며 그 절정에 이른다(12:1~4). 요한계시록 14:12에서 믿음과 인내와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묵상>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변함없이 나타내야 할 특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랑과 믿음과 인내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부가설명> 참 신자들은 더 좋은 것을 향해 전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생활하셨으니 그는 성령으로 탄생하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생활이 완전하셨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되면 우리 안에 생명을 일하시는 예수님(요일 5:11,12)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완전함이 생활에 나타나게 된다. 사탄의 시험과 죄의 세상 환경 때문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일곱 번까지 넘어질 수 있어도(24:16), 생명의 성령께서 죄에서 해방시키시고(8:2) 예수님의 완전을 유지하게 하신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항상 깨끗하다고 인정을 받는다(44:22).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회개하는 성도들의 허물을 용서하신다(43:25).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사유하시기를 즐거워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언제나 이처럼 대하신다. 이 사랑과 은혜로 성도들은 감사함이 넘쳐서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더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더 좋은 것과 구원에 속한 것이 있다.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교훈>

믿는 자들의 삶 가운데 참된 소망은 믿음에 대한 지적인 학습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의 행실로 드러나는 믿음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210() 예수, 영혼의 닻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을 아름답고 감격스럽게 설명하는 것으로 배교에 대한 경고와 사랑과 믿음에 대한 격려의 말을 끝맺는다

히브리서 6:17~20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증하셨는가?

[6:17~20]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두 가지 사실 곧 약속과 맹세로 보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방법을 통해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증하셨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통해 그분의 약속을 보증하셨다(6:17).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맹세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궁극적인 기초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 모세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확답을 받고자 기도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언급했다(참조, 32:11~14, 22:16~18).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간청은 하나님의 맹세는 결코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9:4, 11:28, 29).

마찬가지로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할 때에,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세를 주장하였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89:34~37). 두 맹세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승천하셔서 다윗의 보좌 위에 앉으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이 신약에 기록되어 있다(3:13~16, 1:31~33, 54, 55).

둘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 그분의 약속을 보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앞서가신분으로 승천하셨기 때문에(6:20), 예수님의 승천은 신자들에게 허락된 약속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맛보게 하심으로 그분을 영광으로 이끄셨다(2:9, 10). 아버지 앞에 계신 예수님의 존재는 영혼의 닻” (6:19)이다. 그 닻은 하나님의 보좌에 매여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이상 어떤 보증이 더 필요하겠는가?

 

<묵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신 예수님의 존재가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하나요?

 

: 그분이 우리를 당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좌 앞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2:5,6).

 

<부가설명> 저자는 변치 못할 두 가지 사실을 맹세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주석들은 그것이 약속과 맹세라고 한다.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은 문장상으로 약속과 맹세가 맞다. 그러나 20절까지를 다 포함하여 말할 때 교과 저자의 설명도 수용할 수 있다. 그러면 세 가지 사실이 된다. 저자의 말대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중보자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 있으니 그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안에 있으라고 당부하셨고, 바울도 예수님 안에, 주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고후13:5).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내가 예수님처럼 살도록 나를 생활해주시는지 늘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늘 그렇게 했다. 그것은 갈라디아2:20에서 고백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자.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맹세와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보증하신다.

 

 

211()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도행적>, 539~545 ‘사랑받은 제자 요한’, <시대의 소망>, 716~722 ‘유다를 읽어 보라.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을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정로의 계단, 43).

 

요한은 예수와 같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변화시키는 감화 아래서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자아는 예수 안에 감추어졌다. 동료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은 그 놀라운 생명의 능력에 자신을 복종시켰다.요한으로 하여금 항상 그리스도 곁에 가까이 있기를 갈망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이었다. 구주께서는 열두 제자를 모두 사랑하셨으나 요한은 가장 잘 받아들이는 정신을 가졌었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어렸으며 아이의 신뢰심을 가지고 더욱 예수께 그의 마음을 열었다. 이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더욱더 동정하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구주의 가장 깊은 영적 교훈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그를 변화시킨 성결의 아름다움은 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광채로 빛을 비추었다. 그는 숭경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될 때까지 구주를 바라보았고 그분과의 교제가 그의 유일의 소망이 되었으며 그의 품성으로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였다”(사도행적, 544, 545).

 

핵심적인 연구를 위해

1.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과 유다의 삶은 중요한 대비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요한과 그의 형제를 보셨을 때, 그들을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셨다. 요한에게는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 유다 또한 결점이 있었지만 요한의 것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 요한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변화했으며 유다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는가?

요한은 자아를 주님께 굴복시켰으나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아게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에 굴복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자아를 부정하는 자발적 사항이다. 그러나 부당한 대우에 굴복하는 것은 자의와 상관없이 억압에 의한 것이다.

 

3.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히 순복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자유 의지와 구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순복할 때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 도시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에 반응하는 인간의 반응을 뜻하는 말일뿐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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