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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일 안식일

일몰오후 639

 

연구 범위 : 5:16~25, 13:4~5, 7:14~24, 7:9, 4:2, 22:35~40

기 억 절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찬미가 있다면 로버트 로빈슨의 복의 근원 강림하사일 것이다. 하지만 로빈슨도 항상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다. 부친을 잃고 분노한 그는 술과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그는 조지 화이트필드의 설교를 듣고 나서 주님께 삶을 맡기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이 찬미를 쓰게 되었다. 원래 가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주의 귀한 은혜 받아 일생 빚진 자 되네. 방황하는 내 마음을 주께 묶어 주소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방황한다는 불편한 진실 때문에 어떤 이는 이 부분을 내 마음은 우리 주를 경배하기 원하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랑하기 원하네.”라고 개사하였다.

편집 의도는 좋았지만, 원래의 가사는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신자로서 우리는 두 종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영과 육체이다. 둘은 서로 충돌한다. 죄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본성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방황하기 쉬우나, 우리가 그분의 영께 기꺼이 굴복한다면, 우리는 육체의 욕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이번 주에 우리가 공부할 기별의 요지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영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한다.

느끼기 : 성령께서 지배하는 삶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죄로 향하는 본성에 사로잡힐 때 빚어지는 갈등을 인식한다.

행하기 : 매 순간을 성령과 동행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그 길을 따르는(걷는) 자들이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을 따라 사는 것이 생활스타일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삶과 성령의 뜻을 따르는 삶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기심과 자아 희생의 차이이다.

왜 우리는 마지막까지 영과 육의 갈등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전히 육적이고 우리 지체에 죄의 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대신 육체의 일들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아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슬금슬금 고개들 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사라져야 할 육체의 일은 무엇이며 맺혀야 할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위해 날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과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한다.

 

결론 : 영을 따라 사는 것은 날마다 성령께서 지시하는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모든 문제와 결정을 성령께 맡기고 악한 자아를 죽이기로 날마다 선택하기를 요구합니다.

 

 

첫째 날() 성령을 따라 걸음

910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5).

 

1. 5:16을 읽어 보라. “행하라(걸으라)”는 개념은 믿음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13:4~5, 13:13, 4:1, 17, 1:10)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3:4,5]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4:1,17]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 믿음을 생활에 실천하라는 것이다.

 

걸음은 구약의 은유로서 사람이 행할 도리를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인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는 행동의 유형을 묘사하기 위해 이 은유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는 이 은유를 초대 교회를 일컫는 첫째 이름과 관련지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전에(11:26), 그들은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알려졌다(14:6, 22:4, 24:14). 이 말은 초기의 그리스도교가 단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체계가 아닌 구체적으로 걸어야 할 삶의 길이었음을 의미한다.

 

2. 걸음에 대한 바울의 은유는 구약에 나오는 은유들과 어떻게 다른가? 16:4, 18:4, 44:23을 갈 5:16, 25, 8:4과 비교해 보라.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18: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44:23] 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여호와의 법과 율례와 증거대로 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앙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미쳤느니라.

[5:16,25]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하라고 구체적으로 말했으나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한다. 이것은 외적 지시에 의한 행함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작용하는 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인격의 도야가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 성령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행함은 단순한 걸음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율법을 따라 걸음으로 묘사되었다. 할라카(Halakhah)는 율법과 랍비의 전통에 나오는 명령과 규례를 언급할 때 유대인들이 사용한 법률 용어이다. 할라카는 보통 유대법으로 번역되지만, 그 말은 실제로 걷다라는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가야 할 길을 의미한다.

성령을 따라 걸음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율법에 대한 순종과 상반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어기면서 살라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 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율법을 남용하는 율법주의적인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순종은 외적 강요에 의해서 결코 성취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샘솟는 내적 동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5:18).

 

<부가설명> 사슴은 초식동물이 되기 위하여 풀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는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풀밖에 먹을 줄 모른다.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초식동물이 되기 위하여 풀을 씹는 것이라고 표현한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풀을 씹는 것이라고 비유적 표현을 할 수 있다. 구약의 지시와 바울의 주장은 격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명이 된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탄생한 인종이 된 것이다. 한국인 미국인 하듯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2:20에서 고백한 대로 이제 그리스도인이 사는 것은 그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안에서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주장한다. 예수님의 생명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 안에 작용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적 노력이 아니다. 육식동물이 노력으로 초식동물이 될 수 없다. 인간적 노력으로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도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진정한 중생을 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이 되어서 그 사람 안에서 생명작용을 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교훈 : 초기 기독교 제자들은 그 길을 따르는 자였다.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둘째 날() 그리스도인의 갈등

911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그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위 말씀의 고통스런 실재를 얼마나 경험해 보았는가?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갈등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존재하는 내적인 씨름을 의미한다. 인간은 육체의 소욕을 가지고 출생하기 때문에(8:7), 영으로 거듭나야만 진정으로 영적인 갈등이 생긴다(3:6). 물론 비그리스도인도 도덕적인 갈등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갈등조차 궁극적으로는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은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서로 투쟁하는 두 본성 즉 육과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속세를 떠나 갈등의 종지부를 찍고자 했으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통해 죄로 기울어진 본성이 제거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길을 잘못 찾았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분명 육체의 소욕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갈등은 예수님이 재림하여 우리가 새 몸을 받을 때까지 여러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세속을 떠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리는 그 갈등을 죽을 때까지 또는 예수님 재림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는 두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투쟁의 양편에 동시에 서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부분은 영적인 것을 갈망하고 육체적인 것을 싫어한다. 반면 우리의 육적인 부분은 육적인 것을 갈망하며 영적인 것을 배척한다. 회심한 심령은 육체를 저항하기에 너무 연약하다. 따라서 육체를 억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매일 우리의 죗된 자아를 성령께 맡기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고 바울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이다.

 

<부가설명> 재림교회는 사람의 본성을 이야기할 때 죄로 기울어진 본성이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죄로 기울어진 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육체의 소욕이라고 할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무엇인가? ‘소욕이라는 말이 에피뒤메오인데 욕심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욕심은 에피뒤미아이다. 세상적인 욕망을 뜻한다. 그것은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가르친 내용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5,16) 여기 정욕이라는 말이 에피뒤미아이다. 육신의 소욕은 세상적 욕망이다. 세상적 욕망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요일2:17, 고전7:31) 그것이 도덕적으로 죄가 아닐 수도 있다. 암으로 죽어가면서 그렇게 출세를 위해 애쓴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아무 쓸데없는 일이었다.’라고 쓸쓸하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가 출세를 위해 애쓴 것이 어떤 도덕성을 훼손했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면 도덕성을 훼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헛된 것이다. 솔로몬이 경험하고 고백한 말이 아닌가? 세상적인 것을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이 악이라고 말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4:13,14,16) 예수 안에 있는 것만이 영원하다. 성령은 이것을 우리 생애에 성취시킨다. 굴복하자. 진정으로 거듭나면 죄로 기울어진 본성이 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리고 죄로 기울어지는 것은 지체 가운데 죄의 법으로 남아서 세상의 자극이 올 때 반응하여 우리를 죄 아래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바로 성령의 소욕으로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인들은 내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 죗된 자아를 맡김으로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육체의 소욕을 억누를 수 있다.

 

 

셋째 날() 육체의 일

912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5:19).

 

영과 육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소개한 후에 바울은 갈 5:18~26에서 윤리적 선과 악의 목록을 통하여 이러한 대조의 본질을 깊게 파고들었다. 선과 악의 목록은 유대와 그리스-로마 문학 양식에 적합하게 잘 기술되어 있다. 이 목록은 피해야 할 행동과 본받아야 할 덕목들을 밝히고 있다.

 

1. 7:9, 4:2, 7:21~22, 딤전 3:2~3, 벧전 4:3, 21:8에서 선과 악의 목록을 유심히 살펴보라. 이 목록들은 바울이 갈 5:19~24에 열거한 목록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며 어떤 면에서 다른가?

[7: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7:21,22]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딤전3:2,3]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5:19~24]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육신의 정욕의 요구, 곧 이기심이 자기 유익과 쾌락을 위해 요구하는 것들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선은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맺는 열매이다. 그래서 생산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목록은 바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열거한 두 목록의 사용 방법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비록 바울이 두 목록을 대조하였지만, 같은 방식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악의 목록은 육체의 일들이라 이름 지었고, 선의 목록은 성령의 열매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이다. 제임스 던(James Dunn)은 이렇게 말하였다. “육체는 요구하나, 영은 생산한다. 한쪽 목록은 우려스러운 아집과 광적인 방종의 분위기로 가득하고, 다른 쪽 목록은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 평온, 회복, 신뢰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간의 악행을 그리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책임감 있는 행위의 근원은 내적 변화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거룩한 능력과 은혜를 그리고 있다.”-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 308.

두 번째 흥미로운 차이점은 육체의 일들은 복수이고 성령의 열매는 단수라는 사실이다. 이런 차이점은 육체를 따르는 삶은 분열, 혼란, 불화, 불일치만 양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성령의 영역에서 사는 삶은 연합을 배양하는 아홉 가지 속성의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 바르게 산다면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바울의 목록을 보면 왜곡된 신 관념은 왜곡된 성, 종교, 윤리 개념으로 이어지고, 인간관계의 파괴를 초래하며, 그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잃게 한다(5:21).

 

<부가설명> 교인들은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인 줄 착각한다. 성령의 열매는 한 가지이다. 교과에 말한 대로 육체의 일들은 복수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단수이다. 하나뿐이라는 뜻이다. 아홉 가지는 성령의 열매의 속성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열매의 맛이다. 한 열매에 아홉 가지 맛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열매는 맺었는데 절제열매는 못 맺었다.’는 식의 표현은 근본부터 틀린 말이다. 성령의 열매의 맛이 아홉 가지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이 아홉 가지 맛이 다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한 열매의 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과에 말한 대로 육체의 일들은 육체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들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거듭난 사람이 성령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사람이 맺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맺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랑인가?’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성령의 열매 이름이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께서 맺는 열매라는 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맺히는 열매이다. 그래서 생산하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육체의 노력으로 이런 열매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홉 가지 맛이 다 나타나는 일은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히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참으로 거듭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생산하는가? 심각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바르게 사는 것과 영생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교훈 : 육체를 따르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육체는 여러 불행과 고통을 야기하며, 영은 복된 열매를 맺는다.

 

 

넷째 날() 성령의 열매

91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1. 성령의 열매에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5:21~22, 27~28, 22:35~40 참고)

[5:21,22,27,28]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2:35~40]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성령의 열매는 거듭난 사람에게서 성령이 맺는 열매이기 때문에 그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삶의 방식이 된 삶이다.

 

십계명은 사랑의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할지 안내해 준다. 사랑이 아무리 문자적 율법을 초월한다 할지라도 결코 율법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십계명을 공허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 질량의 법칙을 공허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육체의 다섯 가지 일들과는 대조적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우아한 덕목으로 묘사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아홉 가지의 덕목들이 세 개씩 짝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서에 큰 중요성은 없다. 어떤 이는 3이라는 숫자가 삼위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세 개의 짝이 우리가 하나님,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과 맺어야 하는 관계를 반영한다고 믿는다.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목록 가운데 사랑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미 갈 5:6, 13에서 사랑의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사랑은 바울이 작성한 선의 목록에 항상 포함된다(고후 6:6, 딤전 4:12, 6:11, 딤후 2:22). 다른 덕목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등장하지만, 사랑은 유독 기독교적이다. 이는 사랑이 다른 덕목 중 하나가 아닌 모든 덕목의 열쇠가 되는 가장 핵심적인 덕목임을 보여 준다. 사랑은 가장 뚜렷한 성령의 열매이다(고전 13:13, 5:5). 때로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태도를 정의하는 것은 없다(13:34~35).

 

<부가설명>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람이 맺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맺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성령께서 맺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홉 가지가 아니고 또 아홉 가지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생명력이 생활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것은 생명의 길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이 생명이 생활하는 생활방법이 있다. 영어로는 Life Style이라고 표현한다. 라이프스타일은 라이프가 나타나는 모양이다. 거듭난 생명이 있으면 이 열매가 생활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열매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매는 나무가 생산하는 것이다. 나무 외부에서 누가 나무에 가져다 달아놓는 것이 아니다. 교인이 진정으로 거듭났으면 이 열매는 라이프스타일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식적으로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바른 인식이 없으면 사실을 그릇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실이 그러냐고 묻는다. 나의 현실이 그렇든지 아니든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계시한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자기의 현실을 기준으로 그럴 수 없다고 불신하느냐 하는데 있다. 구원은 내가 어떠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내게 대하여 어떠하시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시고 그 생명작용으로 라이프스타일이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것이다.

 

교훈 : 성령의 열매는 십계명의 순종과 관련이 있으며, 아홉 가지의 덕목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덕목은 사랑이다.

 

 

다섯째 날() 승리의 길

914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비록 육체와 영 사이의 내적인 투쟁이 모든 신자의 마음속에서 항상 일어나겠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패배와 실패,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 필요는 없다.

 

1. 5:16~26에 따르면 육체를 성령의 지배 아래 두고 사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해야 한다.

 

5:16~26에는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삶이 어떤 유형인지 설명하는 다섯 개의 동사가 나온다. 첫째,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16). 그리스어 페리파테오의 문자적 의미는 동행하다또는 따르다이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스승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다녔기 때문에 소요학파라고 알려졌다. 바울이 이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일회적인 동행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날마다 성령을 따라 살기로 결정해야 할 선택임을 뜻한다.

둘째 동사는 인도를 받다이다(18). 이 단어는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8:14, 고전 12:2 참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그다음 두 동사는 갈 5:25에 등장한다. 그 가운데 첫째(셋째 동사)살다(자오)’이다. 이 말을 통해 바울은 중생의 경험이 모든 신자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 동사의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중생의 경험이 날마다 갱신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에 바울은 계속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라”(넷째 동사)고 쓴다. 여기서 행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16절의 행하다와 다르다. 이 말의 원어 스토이케오대열을 갖춰 나아가다’, ‘발을 맞추다’, ‘순응하다라는 뜻의 군사용어이다. 여기에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삶을 주실 뿐 아니라 날마다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24절에서 다소 충격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다’(다섯째 동사)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성령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자 굳게 결심해야 한다. 물론 바울은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배양하고 육적인 욕망을 굶주리게 함으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함게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자아부정이라고 생각된다. 주석들은 제자에게 수반되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때에 요구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을 뜻하며, 예수를 따를 때에 생기는 다양한 경우에 대처하는 바른 방법일 것이라고 한다. 옳은 설명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자기를 위하여 진 것이 아니다. 인류를 위하여 졌다.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반대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 사실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목 박은 것도 아니다. 승리의 비결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과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인도 예수님과 같은 목적과 의미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감당할 때 참된 승리를 이룰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승리하시고 즐거워하셨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53:11).

 

교훈 : 육체를 성령의 지배 아래 두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매일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그분의 지도를 따라 행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15

 

그리스도인 생활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격렬한 투쟁에 대처해야 하고, 심한 유혹이 그를 공격해 온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른다. 우리가 이 지상 역사의 끝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원수의 공격은 더욱 기만적이고, 유혹적이 될 것이다. 그의 공격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더욱 자주 있을 것이다. 빛과 진리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더욱 강퍅해지고, 냉정해질 것이다(원고 33, 1911)”(화잇 주석, 5:17) .

성령의 감화는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 곁에 계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 속에서,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령의 내주(內住)를 아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나타낸다(원고 41, 1897)”(상동, 5:22~2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육체의 소욕을 못 박아야 한다는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성령의 생명으로 산다는 뜻이다. 항상 이 생명으로 살아지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에 인간의 노력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그대의 경험에 따르면 그런 역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날마다 순간마다 굴복하는 것이다.

 

그대가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엇입니까? 실망을 경험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자아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또 굴복해야 한다. 성령께서 그런 마음을 붙드시기 때문이다.

 

요약: 육적인 욕구와 영적인 욕구 사이에 갈등이 존재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패배의식에 빠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소욕을 억제할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다주시는 성령의 지배 아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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