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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일 안식일

일몰오후 756

 

기억절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19:41).

 

연구 범위 : 19:28~40, 9:9, 19:45~48, 21:12~17, 20:9~26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주간은 예루살렘에서 전개된다. 그 주에도 떠들썩한 사건들이 이어졌다. 예루살렘 입성, 무관심한 도성에 대한 예수님의 눈물, 성전 정결, 그분을 죽이려는 음모,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의 고뇌, 모욕의 심문, 십자가형 그리고 부활. 비록 예수님 외에는 벌어지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선악의 대쟁투가 절정에 이르렀던 매우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그처럼 목격한 도시는 전무후무하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몇 차례 예루살렘을 지나셨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두가 성인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다. 그 기록의 대부분은 고난 주간의 방문을 다룬다. 물론 아기 예수의 성전 방문(2:22~38), 12세 때 성전에서 벌인 토론(41~50), 유혹자에게 이끌려 성전 꼭대기에 섰던 사건(4:9~13) 등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등장한 다른 경우들도 있지만, 복음서 기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차지한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일 주일 동안 펼치신 사역이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방법과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한다.

느끼기 :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이 미친 영적 감화에 공감한다.

행하기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본받는다.

 

A.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계획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사람들은 왕으로 즉위하기를 기대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성전 정결 노력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언제나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몸과 교회를 정결하게 할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과 교회 그리고 우리 개인을 아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확신과 충성으로 반응해야 한다.

 

B.

왜 예수님은 메시아이면서도 유대인들에게 거부를 당하셨을까요?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제정하신 성찬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억하고 전하는 믿음의 예식이다.

예수님을 진정한 구세주로 영접할 때 각자의 마음에 생기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부활의 소망으로 기뻐할 것이며 그 부활의 생명을 생활로 증거해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은 세상의 권좌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메시아의 진정한 사명을 드러내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보이고,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며, 유월절의 실제 목적을 드러내고, 세상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첫째 날() 예루살렘 입성

614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19:38).

 

예수님은 베들레헴 태생이셨고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그분은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베레아 지방을 다니시며 진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며 병을 치료하셨다. 그러나 줄곧 그분의 시선을 붙든 한 도성은 예루살렘이었다. 그분은 그 도시를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9:51)셨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계사에 가장 극적이고 중대한 일주일을 예고하였다. 그 주간은 왕의 위엄으로 행차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시작하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로써 그분과 원수였던 우리는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5:10).

 

1. 19:28~40을 읽어 보라. 제자들의 흥분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분명 이쯤해서 왕이신 예수님이 다윗의 보좌, 예루살렘 권좌에 오르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잘못된 기대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19:28~4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 잘못 된 기대에서 배우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성경을 인간적 기대를 이루려는 마음으로 연구하면 실패한다는 것도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는 예루살렘 집들을 두드리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2:2)는 안타까운 질문을 던졌다. 이제 십자가 사건이 있기 불과 며칠 전에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하늘이 떠나갈 듯이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19:38).

이 놀라운 장면은 예언의 성취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그러나 예수님은 호산나를 외치며 시작한 이 역사적인 행진이 곧 골고다에서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선언과 함께 마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너무도 자기 시대의 전통과 교훈과 기대와 문화에 사로잡혀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그 의미에 대하여 예수님이 미리 알려주신 경고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학자들의 해석이 아니고 전통이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가까이 있으면 그 책에서 잘 모르는 것을 저자에게 물으면 가장 잘 알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평론가들은 때때로 저자보다 더 깊은 사상을 끌어내기도 한다. 미처 저자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평론가에 의하여 해석이 되고 그래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사상을 적은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해석하고 설명한다고 해도 역시 신학과 전통과 기독교 문화가 개입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계시해준 대로 오직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성경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예언을 자기 욕망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오늘날 많은 경우 세태가 돌아가는 형편을 성경 예언에 적용시키는 식의 해석을 하지 않나 하는 우려가 있다. 이미 우리교단에서 공인하는 잘 알려진 예언들 외에 현재 국가적 사회적 현상을 성경 해석에 무리하게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 기도하고 자기를 낮추고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해석해주는 대로 겸손히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바르게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탄식하셨다. 그들에게 준 큰 기회를 인간의 생각으로 저버린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교훈 : 제자들과 군중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계획된 사건들의 전조였다.

 

 

둘째 날() 예루살렘 성전의 정결

615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9:4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도중 그 성을 위해 슬피 우셨다. 그 후에 예수님이 첫 번째로 하신 일은 성전에 가신 것이었다.

 

1. 19:45~48, 21:12~17, 11:15~19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부터 우리는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이 기사들은 마치 성전과 같이 기능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2:21)

[19:45~48]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21:12~1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11:15~19]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 하나님의 집을 강도소굴로 만들면 안 된다. 교회가 이권의 장소가 되면 안 되고 권력을 행사할 장소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각 개인이 몸 성전을 욕심의 장소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사복음서는 모두 성전 정결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 요한이 기원후 28년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발생한 첫 번째 성전 정결(2:13~25)에 대해 말한 반면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기원후 31년 유월절에 예수님이 사역의 마지막 국면에서 행하신 두 번째 성전 정결을 이야기했다. 두 번의 성전 정결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그분이 성전의 신성성과 예배에 얼마나 관심이 많으셨고, 메시아 사명과 권위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입증하셨는지 보여준다.

죽음 바로 직전, 두 번째 성전 정결에서 보여주신 그분의 행동은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죽으실 것과 성전과 성전 예배가 곧 폐지될 것을 아셨음에도 여러 물건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있던 자들을 내쫓으셨다. 그것이 곧 불필요해질 뿐 아니라 한 세대 내에 파괴될 것이라면 왜 예수님은 그것을 타락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것인가?

주어진 답은 없지만 아마도 성전이 여전히 하나님의 집이며 여전히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그 시점에 성전과 그 의식들은 신실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었다. 즉 전체 구속의 계획을 묘사하는 성전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에게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13:8)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공중봉사를 시작할 무렵 성전 정결을 행하셨다. 그때 힐문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요한복음은 가르친다.(2:21,22)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성전봉사는 없어질 것이다. 또 얼마 후에 로마군에 의해 성전을 소멸될 것이다. 그래도 정결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은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건물성전이든지 몸 성전이든지 교회성전이든지 성소는 정결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나아가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면서 성소정결 사업을 행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속죄봉사는 곧 성소정결봉사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 성전은 어떤가?

 

교훈 : 성전의 기능은 곧 정지될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는 성전의 신성함을 중요하게 여기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다.

 

 

셋째 날() 불충실한 자들

616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20:13).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한 교훈을 제공한다(20:9~19). 그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과 죄 많은 인류에 대한 변함없는 그분의 사랑이다. 물론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특별히 자기들을 가리켜”(19) 하신 말씀임을 알았지만 그 교훈의 범위는 시대를 초월한다. 이 비유는 모든 세대와 모든 회중 그리고 하나님께서 믿고 사랑하며 충성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오늘날의 소작인이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역사에 관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한다.

 

1. 20:9~19을 읽어 보라. 만약 우리가 비유 속의 인물들처럼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여기서 가르치는 원칙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20:9~1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 가르치신 원칙대로 집행될 것이다. 마지막에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머릿돌 위에 떨어져 깨어지면 용서받고 구원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 사랑과 충정의 열매를 드리는 대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분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연달아 그의 종과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이 청지기의 책임을 다하도록 설득하였다(10~12, 35:15). 그럼에도 모든 선지자가 거절의 희생자가 되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7:52).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의 오래된 사랑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비극은 끝없이 발생하지만 마침내 영광이 승리할 것이다. 십자가 후에 반드시 부활이 온다. 버려졌던 돌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맞이하고, 부자나 가난한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구원 받은 모든 자가 한 백성이 되어 살게 될 거대한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 그들은 종말론적인 포도원을 거닐며 영원히 그 열매를 즐길 것이다.

 

<부가설명>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는 이스라엘 국민과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 교훈의 첫째 목표였겠지만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일꾼들에 대한 교훈도 포함된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을 이루시고 성령의 보내셔서 교회를 주관하게 하셨다.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 지도자를 선출하여 교회를 돌보게 하셨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맞다. 교회는 사단의 침투로 부패하여지고 정권을 잡아서 정교양면에 군림했다. 교회자체가 구원을 결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며 지금도 그런 사상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교회로 자처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위하여 우리 각자는 반석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철저히 깨어져야 할 것이다.

 

교훈 :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파송한 선지자들과 심지어 그분의 아들까지 거부하였다. 그러나 변함없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넷째 날() 하나님 대 가이사

617

 

1. 20:20~26을 읽어 보라. 우리가 어느 나라에 살고 있든지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가?

[20:20~26]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 우리는 하나님과 국가에 각각 충실해야 한다. 혼동하지 않아야 하고 스스로 충돌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의 조세제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문제였다. 요셉푸스에 따르면 기원후 6년 경 갈릴리 출신 혁명 지도자 유다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선포하였다. 일부 메시아적 주장과 열망이 작용하면서 이 문제는 일시적인 반란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민감한 배경을 바탕으로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자에게는 숨은 동기가 있었다. 즉 그것이 옳다고 답하면 예수님이 로마의 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의 외침과 달리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만약 옳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혁명 세력에 동조하고 로마의 통치가 불법적이라고 선언하는 셈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반역의 혐의에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속박으로 예수님을 옭아매기 원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셨다. 그분은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을 지적하며 이렇게 선언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0:25).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은 매일의 필수품이었다. 그런 가이사의 통치 아래 살기 위해서는 가이사에게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감당해야 할 더 큰 의무가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께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하셨다.예수께서는 그들이 로마의 권세와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 권세를 유지하기에 요구되는 것만큼 세금을 바칠 것이며, 이것이 더욱 높은 의무와 상충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국가의 율법에 온화하게 복종하는 반면에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먼저 할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602).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국가에 각각 충성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다. 지금 몸을 붙여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허락한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국가 질서가 무너지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몸을 의탁하고 생활할 환경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르게 충성하는 삶을 살아갈 생활의 터전을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서도 국가에 수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든지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는 것일 때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하늘 시민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하게 세상 국민으로서의 임무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한도 안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교훈 : 유대인들은 납세의 문제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으나 그분은 지혜롭게 세속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무를 분리시켜 설명하셨다.

 

 

다섯째 날() 주의 만찬

618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22:13).

 

1. 22:13~20을 읽어 보라. 유월절에 거행된 주의 만찬의 의의는 무엇인가?

[22:13~20]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사실을 재림 때까지 기념하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구원을 의지하도록 하신 것이다. 또 함께 참여하는 자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예수님은 유월절이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 주의 만찬 의식을 제정하셨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큰 능력과 대조적인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한다. 우리도 죄의 결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스스로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자손손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교훈이다(12:26~27). 이스라엘의 자유가 하나님의 구속 행위로 말미암아 이룩된 역사에 뿌리를 둔 것처럼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도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해 있다. 진실로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이시며 그의 마지막 만찬은 믿음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찬란하고 확고한 의미를 표현하는 선언적인 행위이다.” - G. C. Berkouwer, The Sacraments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69), p. 193.

주의 만찬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고전 11: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엄숙한 기별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그 빵과 포도즙이 곧 부서질 그분의 몸과 죄를 사유하기 위해 흘려야 할 그분의 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26:28).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늘의 대책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예수님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고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 의식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고전 11:24~26).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26:28) 피를 흘리셨다는 예수님의 공언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되어야 한다. 이런 공언을 무시하고 다른 구원의 수단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분이 선택하신 구원의 방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러 교훈 가운데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성찬의 상에서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교훈은 우리를 하나의 교제로 이끈 그러한 죽음 때문에 우리가 한 몸으로서 자리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만의 상 앞에 앉을 때에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마지막 때의 구원 받은 공동체로서 자리한다. 그날이 이를 때까지 주의 만찬은 역사가 지니는 의미와 생명이 지니는 희망을 기억하게 한다.

 

<부가설명> 유월절에 행하신 성만찬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억하여 믿음을 북돋우는 예식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로 우리가 재림을 맞을 준비를 친히 하신 것을 지적한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이것은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이 소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같이 모일 때는 언제나 어떻게 예수께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하신 것을 자세히 말하곤 하였다.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주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받았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는 생각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귀중하였다.

이것들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강권하는 힘이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기억에 새롭게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이 예식을 제정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과의 연합이 있을 수 없다. 형제와 형제 사이의 연합과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굳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만큼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효험있게 만드는 것은 없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그분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죽으심 때문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의 소망의 중심이다. 그 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착시켜야 한다.(소망 659)

 

교훈 : 예수님은 그분의 죽음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그의 몸된 공동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재림의 날까지 기억하도록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셨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619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거기서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치셔야만 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또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의 사랑과 그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소화되어야 한다”(시대의 소망, 38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어떻게 판매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신앙이 사익과 명예, 지위를 위해 이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교인으로서 그와 같은 덫에 빠지지 않으리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신앙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의 유익과 생활수단으로 여길 때 이런 덫에 빠질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교회 사역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무신론주의 작가 알렉스 로젠버그(Alex Rosenberg)는 존재하는 모든 실체가 순수하게 물질적이라고 믿습니다. 즉 모든 것은 오직 물리적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 속에 의도, 목적, 동기, 하나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주의 목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없다. 우주에 어떤 목적이 작용하는가? 대답은 마찬가지이다. 없다.” 혹시 우주의 무의미성, 무목적성이 그대를 우울하게 한다면, 로젠버그는 그 우울함을 심각하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을 포함하여 우리의 감정이란 신경세포와 화학물질의 일정한 배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무의미성 때문에 낙담한 자들에게 조제약으로 신경을 재배열하라고 권합니다. 이런 인생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인생관을 비교해 보십시오. 어떻게 성만찬식의 참여가 이런 무신론적인 허무주의를 반박하는 공개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실제적으로 희색하시고 부활하시고 재림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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