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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일 안식일

일몰오후 757

 

기억절 :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55:4).

 

연구 범위 : 1:26~28, 2:15~17, 요일 2:16, 3:14~15, 고후 5:21, 5:13~14

 

이 세상은 매우 혼란스럽다(mess). 그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뼛속 깊이 악한 본성을 가진 죄인이자 타락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가 발전하며 진화한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보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21세기의 사분의 일도 지나지 않은 현 시점에서도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다. ‘과거는 미래의 전조라고 했던 어떤 정치가의 말처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피와 고생 그리고 눈물과 땀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구원과 만물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냉혹하고 광활한 우주에 버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맞서고 있는 세력은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대신 이루어 주시기 위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인류를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가 그분의 본성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쉬지 않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반응한다.

행하기 :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재능과 은사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A.

죄에 빠져 멸망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십니까?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시기까지 노력하셨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전하여 믿게 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 계획에 참여한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어떤 상태로든지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

 

B.

하나님의 선교 계획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구원을 친히 담당하시는 분으로 보내심을 받았고 그 일을 이루셔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취하셨다.

우리의 선교적 역할을 설명하는 소금과 빛의 비유는 각각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사회에 섞여서 희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빛으로 생명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어 접촉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누구든지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다.

 

결론 :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이끌려 우리를 찾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며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에 이르도록 이끄십니다. 여러 세대를 걸쳐 그분은 위대한 선교 역사 속에서 그분을 대신하여 일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초청에 어떻게 반응해야겠습니까?

 

 

첫째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

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인류가 끝없이 제기하는 질문 중 하나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이다. 성경의 첫 두 장에는(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많은 사람이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 우리의 기원을 알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와 존재의 이유, 살아가는 방법과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순조로운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1. 창세기 1~2장을 훑어보되 1:26~28을 유심히 살펴보라. 인류의 창조는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 어떤 큰 차이점이 있는가? 다른 부분과 달리 인류에 관하여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인가?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또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셨다. 창조하신 지구의 통치자로 세우시고 그것들을 돌보게 하셨다.

 

1. 사람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다. 그들 앞에는 연구하고 돌봐야 할 모든 가시적 창조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하신 방법은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셨을 때와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창조 명령은 있으라’(, 궁창, , 물고기와 새, 육지 동물, )였다. 그러나 이제는 명령이 상의로 바뀌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즉 삼위 하나님이 이 문제에 관하여 상의하셨다. 비록 창 1~2장이 지구와 그 안의 피조물의 창조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주된 관심이 인간의 창조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다. 다른 피조물에는 이러한 설명이 붙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분명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창조주의 품성을 반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도덕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비는 아름답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씀은 분명히 인간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4. 사람은 지배권을 가지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여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했다. 이 부름에는 책임감이 내포되어 있다.

 

<부가설명> 창조주께서는 창조하시는 일로 창조주가 여호와 즉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셨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1:20) 피조물 중에 인격적이고 이성적인 피조물은 이 지구상에는 사람뿐이었다. 창조주께서는 그 사람에게 창조주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계시하셨다. 그것이 2장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기록으로 나타내셨다. 또 사람외의 모든 피조물은 사람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셨으나 사람이라는 이름은 창조주께서 친히 지으셨다.(5:2) 사람을 다른 피조물들의 통치자로서 지위를 확인하게 하신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사람이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그 존재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시므로 존재 의미를 하나님께 부여받았다. 그들은 창조주와 생명의 줄로 연결되어 사랑의 친교를 나누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받은 것은 그 생명의 본질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일을 사랑이라고 한 바로 그 사랑이다.

 

교훈 :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도덕적 품성을 반사해야 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둘째날() 자유의지

6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창조 기사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2:9). 이로 보건대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들에게 없는 도덕적 요소가 처음부터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제 언급했던 것처럼 도덕적 판단 능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이다.

 

1. 2:15~17은 인류의 자유의지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동적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인류를 창조하실 수도 있었다. 빛과 해와 달과 별들과 같은 피조물들은 그런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그것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천연계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

그러나 사람의 창조는 특별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인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강제하지 않아도 자원하여 그분을 경배하기를 바라셨다. 그럴 수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은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보호하시고 존중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강하고 고집스런 선택을 방해하지 않으신다. 물론 잘못된 선택에는 때로 매우 심각한 결과가 따른다. 그럴지라도 복종과 순응을 강제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절대자의 품성에 어긋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는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신앙적인 의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개인의 의지와 선택을 일방적으로 지도하지 않으신다. 2. 윤리적인 의미로 개인들은 각자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3. 과학적인 의미로 신체와 두뇌의 활동은 온전히 인과관계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물리적인 법칙들이 개입되어 있지만, 자유의지는 우리의 행위, 특별히 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다는 뜻이다.

 

<부가설명> 나는 자유의지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때는 나도 분명히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은 자유의지는 오직 스스로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를 위시하여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창조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의 생명과 존재에 대하여 어떤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인가?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는가? 없다. 결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절대적으로 의존적이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의존하기를 거절할 수 있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인간의 자유선택이라는 것은 창조주께서 만들어놓은 범주 안에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참으로 자유의지라면 자유롭게 선택한 사실에 대하여 안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존재를 상실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창조주가 창조해준 존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를 떠나서는 결코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17:14~28) 독자들이 이런 생각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니까.

 

교훈 :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그분을 경배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셨다. 이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음을 뜻한다.

 

 

셋째날() 타락

63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6~7).

 

작은 열매 하나를 먹은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행위가 이루어졌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유의지를 가진 대리자들이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명백한 뜻에 순종할 자유뿐 아니라 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불가피한 필요 때문이 아니라 자의의 선택에 따라 그 열매를 먹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지시에 반항하기로 한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것인지 아니면 거역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그분의 말씀을 믿도록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강요하시지도 않고 강요하실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허락하신다. 대신 우리는 선택의 결과에 따라 살 각오를 해야 한다.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완벽한 통치자가 아니라고 말한 셈이었다. 그분의 주권이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불순종을 드러냈고 그 결과 인류에 죄와 사망을 가져왔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3~24).

아담과 하와는 낙원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그러나 자비로운 조치였다. 주님은 반역한 인류가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랑과 염려의 마음으로 죄가 가져온 끔찍한 상황을 영속시킬 수 있는 그 열매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격리시키셨다. (현재의 삶과 같이 고통과 슬픔,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는 영생이 어떨지 상상해 보라!) 아담과 하와는 아름다운 동산에서 쫓겨나 그보다 덜 비옥한 땅에서 일하였다(23~24).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부가설명> 독자들은 저를 용서하기 바란다.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망의 형벌을 내리시기 때문에 그들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생명과를 먹으면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는 이미 생명을 잃었다. 이미 잃은 그 생명을 대속함이 없이 그냥 생명과를 먹으면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예수께서 굳이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하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즉 신상필벌의 논리로 창조와 타락을 보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생기는 것이다. 성경은 도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생명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사망이 되면 썩어져가기 때문에 마침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대속의 약속 때문에 수명을 누리는 것이지 이 약속이 없으면 당장 죽고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담이 그것을 먹었을 때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둘째 사망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것을 대신 당하기로 하고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수명을 주신 것이다. 또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이 형벌하셨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그 자체가 죽음이다. 그것은 마치 독약을 먹으면 죽는 것과 같다. 독약을 먹는 것이 자못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벌을 줘서 죽는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살리려는 것이 구원의 계획이요 구원이다.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선악과를 먹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벌하지 않아도 그대로 죽고 마는 것이다. 생명 있던 자가 생명에서 끊어지면 그 자체로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고후11:3 참고) 지금 타락과 사망의 논리를 이미 타락해서 사망이 된 사람들이 추구하는 선악의 논리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산 사람을 죽은 사람이 부패하지 않고 살아날 수 없는가 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교훈 : 타락한 인류는 생명과 행복에서 떠나 죽음과 불행을 맞이해야 했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한 그들의 선택의 결과였다.

 

 

넷째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71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첫 조상이 타락한 후에 그들을 찾아오셨다. 반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숨고자 애를 썼다. 타락한 인류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그들을 찾아오시는 분 즉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피해 달아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그렇게 했다. 성령의 호소에 순복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오늘날도 동일한 과오를 범할 것이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의 첫 조상을 버리지 않으셨고 우리 역시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고 하셨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놀라운 선물, 곧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주셨다. 비할 데 없는 이러한 선물은 은혜의 공기로 이 세상을 둘러쌌다. 이 공기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을 택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장성한 남녀들이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68).

물론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교 활동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 속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많은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사탄을 멸하고, 아버지의 품성을 계시하며, 사탄의 고소가 그릇됐음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은 준수될 수 있음을 보여주셔야 했다. 그러나 가장 중대한 목적은 죄의 최종 결과인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3:14~15]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3:4~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고후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우리가 죽은 자가 되었는데 그 죽음을 대신하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한 것임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 그분이 치르신 값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을 위대한 교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의 죄와 고통을 취하심으로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처럼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있다.

 

<부가설명> 내가 성경강론하면서 회중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결코 한 번도 죄를 지은 일이 없이 930세를 살다가 죽었고, 그의 모든 후손들도 아담과 같이 그렇게 완전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있을까요?” 장내가 조용하였다. 여러분들은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마침내 한쪽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 예수께서 오셔서 죽을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나는 똑 같은 질문을 죽었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다시 했다. 그때 한 쪽에서 그래도 예수께서 오셔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죽었잖아요.’라고 했다. 옳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지은 도덕적 죄를 용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서 죽은 그것을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생명을 드러내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선악과를 먹은 그 행위가 죄가 아니라 그것을 먹었을 때 죽은 그것이 죄이다. 죽었기 때문에 썩는다. 그것을 썩어져가는 구습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4:22) 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망이 되어 썩어져가는 인간들이 썩는 기간이 계속되는 동안 노력하는 것이 교육, 도덕, 종교가 하는 일이다. 다만 성경의 종교만이 생명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예수 없이는 생명이 결코 없다. 이 생명을 받으면 생명이 가장 고상한 도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교훈 : 범죄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 때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다섯째날() 선교의 비유들

72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너희는 세상의 빛이라”(5:13~14).

 

선교는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동기는 우리 각자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다. 선교에 그보다 더 심오한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라는 사명을 받고 파송되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우주적 차원의 사명에 대해 40회 이상 언급했다(, 3:17, 12:47). 세상을 구원하도록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1. 5:13~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선교를 위해 사용된 두 개의 비유는 무엇인가? 그것들이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5:13,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 빛과 소금이다. 세상을 밝히고 세상을 부패에서 건지고 생명을 드러내고 희생으로 생명의 성질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기독교가 인류에게 미치는 감화력의 핵심 역할을 설명한다. 소금이 접촉하는 것과 섞여 내부에서 작용하는 반면 빛은 외부에서 작용하여 그것이 미치는 모든 것을 밝혀준다. 소금의 비유에서 말하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섞여야 할 사람들을 일컫는다. 반면 빛의 비유에서 말하는 세상은 어둠에 싸여 광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도덕적 원칙과 건강 법칙에 따라 살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밝고 매력적인 이방의 빛”(49:6)이 되어야 했다. 건강과 번영, 안식일과 다른 계명에 대한 충성의 상태에서 그들의 공동체는 주변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와 구속의 행적을 선포할 것이었다. 그들의 번영을 본 나라들이 그들에게로 와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울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증언의 다른 방식인 소금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들의 감화력으로 부패를 억제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4에 의하면 빛은 생명이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나는 생명이라는 말씀은 같은 말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세상의 빛이 된다. 중세기 동안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교회가 빛이 아니고 흑암이었다는 뜻이다. 교회가 흑암이라는 말은 교회를 흑암의 세력인 사단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세상을 밝힐 뿐만 아니라 생명의 기별을 전하여 세상을 생명이신 예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것을 생명의 향기라고 했다.(고후2:16) 아담 안에서 죽어서 흑암의 왕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전도이고 빛을 비취는 것이다. 그들이 빛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을 보여야 한다. 소금이라는 말이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소금의 기능을 나타내지 못한다. 소금은 필요한 곳에 섞여서 녹으므로 부패를 막고 맛을 낸다. 녹지 않는 소금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

 

교훈 : 예수님이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보냄을 받았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선한 감화를 끼칠 뿐 아니라 구원의 기별을 전해야 한다.

 

 

여섯째날()

73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적 본성에 대해 몇 가지 측면을 다루었다.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계획이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깊다. 그분의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과 선교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길을 닦으셨다. 그분의 제자요 선교사로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 즉 그분이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선교 사업을 위하여 조직되었으며 주님께서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진리의 기별을 들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교회가 고안해 내기를 바라신다. 모든 사람이 몸소 외방 선교에 참여하라는 소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들의 기도와 선교 사업에 도움이 되는 헌금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교회증언 6, 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기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왜 기원이 중요합니까? 기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자기의 기원을 모르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자기를 바르게 알 때에 자기의 가치와 존재 목적을 알게 된다. 사람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기원을 바르게 알 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세상에 자유의지, 사랑,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만약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피조물(그분의 완전한 사랑을 닮은)을 창조하기 원하신다면 그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을 야기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하셔야 한다. 사랑과 자유의 역학 관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자유를 통해 사랑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자유 범위를 허용하시도록 요구한다. 자유로운 존재들로 하여금 사랑에 어긋나는 행위를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대책은 사랑할 수 있는 피조물의 창조를 철저하게 억제하는 길뿐이다.” - Robert J. Spitzer, New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Contributions of Contemporary Physics and Philosophy, Kindle Edition (Eerdmans Publishing Co., 2010), p. 233.

앞에 어느 날 부가설명에서 말했듯이 나는 자유의지를 별로 신봉하지 않는다. 특별이 생명과 존재에 대하여 그렇다. 우리 생명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다. 만일 선택을 이야기한다면 부모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부모가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유와 선택은 창조주에게 있고 우리는 창조주가 창조로 선택해 주신 범위 안에서 취하고 버리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창조주를 떠나서 자유를 논하는 것은 사망에 있으면서 스스로 생명을 얻으려는 노력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생명이신 하나님과 비로소 사랑의 교재를 나누고 다른 피조물과도 사랑의 교재를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거의 이천 년 전 광활한 로마 제국의 한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이 행위는 모든 인류에게 영원토록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행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말과 생활로 전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전파하는 사람이 없으면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했다.(10: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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