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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일 안식일

일몰오후 757

 

기억절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

 

연구 범위 : 27:11~26, 3:19, 59:2, 27:45~46, 27:49~54, 8:1~6, 28:1~20

 

영국의 한 잡지에 자신의 신체를 연구 목적으로 기증할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를 통해서 사후에 시신을 기증할 불치병 환자들을 찾는 자들은 오랫동안 이집트 미라를 연구해 온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집트인들의 비법을 찾았으며 기증된 시신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보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시신을 보존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나은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고전 15:20)신 예수님은 우리의 시신이 애굽의 바로처럼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영원히 살 몸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으셨다.

우리는 이번 주에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들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진리와 그 두 사건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소망에 대해 연구하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부활의 필요성을 온전히 이해한다.

느끼기 : 그리스도의 대속을 깊이 감사하게 여기고 부활의 능력을 갈망한다.

행하기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복음 사명을 내게 주신 명령으로 수용한다.

 

A.

우리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못 박고 바라바 예수풀어주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우리도 그렇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묶어두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망의 주장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어떤 다양한 이해가 존재합니까? 그 중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이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활을 신화라고 하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하거나 한다. 우리는 참으로 실제적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오늘날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증언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부활의 생명의 실현이 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B.

어떤 마음이 있어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감내하면서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을 때 나도 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할 때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 왜 복음전파 사업을 연약한 인간들에게 맡기셨을까요?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를 믿으면 같은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부활을 경험하는 것은 사망에 처해 있다가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것이다. 천사는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의 복음은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자들만이 참으로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한낱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의 생명을 경험적으로 누리는가?

 

결론 :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의 심령을 허물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지를 강화시킵니다.

 

 

첫째날() 예수님과 바라바

619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27:17).

 

1. 27:11~26을 읽어 보라. 백성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와 그들이 결정한 선택의 심오한 의미는 무엇인가?

[27:11~26]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15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바라바를 선택하므로 그들이 국가적으로 구주를 거절하였다. 그것으로 그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권고하는 기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야 할 사람은 살인자 바라바였다. 양편에 달린 죄수들은 그의 동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가족명이었다. 바요나 시몬이 요나의 아들 시몬이고 바돌로메오가 돌로메오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바라바는 아바스의 아들 즉,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의 여러 초기 사본들은 바라바의 이름을 예수아’(즉 바라바 예수)라고 적었다. 당시에 예수아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평범한 이름이었다. 따라서 바라바의 이름에는 아버지의 아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따라붙었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 사람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물에 대한 다른 질서를 세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악마적인 착각 아래 도둑질과 강도질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탄의 역사를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으며 백성들 중에서 추종자를 얻어 로마 정부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다. 그는 종교적 열성의 가면을 쓰고 반역과 잔인한 일을 감행하는 무정하고 절망적인 악인이었다. 빌라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 사람과 무죄하신 구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함으로 그들에게서 정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주장과 반대로 예수께서 백성들의 동정을 얻기를 바랐다”(시대의 소망, 733).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곳의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의 음성이 없다면 사람들은 영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최후에 우리도 그리스도와 바라바, 그리스도와 타락한 세계, 생명과 사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성경을 외웠다. 그랬으니 그 말씀을 알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13:27) 이 구절에서 외우는 바라고 번역한 말은 아나기노스코인데 읽는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다. 글자는 알았으나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런 현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들이 성경을 읽고 외우고 했지만 그 진정한 뜻을 몰랐기 때문에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으나 그를 죽였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셨다. 결과적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셨고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 우리도 안식일에 예배당에 모여서 성경공부하고 설교 듣는다. 집에서 성경을 읽고 듣는다. 그러면서 생활의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팔고 세상을 사는 삶을 하지 않는지 심히 두렵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붙잡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순간마다 내 삶에는 오직 예수, 성경이 계시한 바로 그대로의 예수님을 굳게 따르는 믿음으로 살도록 자신을 말씀에 굴복하고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여 듣도록 하자.

 

교훈 : 예수님과 바라바는 같은 이름을 사용했지만 전혀 다른 두 명의 메시아를 대변한다. 역사적으로 인류의 선택은 항상 바라바 쪽으로 기울어진다.

 

 

둘째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대속주

620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27:46~47).

 

1. 이 절규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구원의 계획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삼위 여호와 중의 한 위이신 말씀하나님께서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른 여호와 하나님과 분리되는 절규이다. 이것은 생명이 사망이 되고 의가 죄 자체가 되는 아픔의 절규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 자체가 되신 것을 드러내는 부르짖음이었다.

 

마태는 신학자들이 포기의 절규라고 부르는 내용을 기록했다. 이 말은 홀로 또는 절박한 상황에 남겨짐 또는 버려짐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아버지께 버림받은 예수님의 감정을 볼 수 있다. 그 시각 땅을 뒤덮은 암흑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했으며(13:9~16, 5:18~20, 13:16) 예수님은 죄의 끔찍한 결과와 아버지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경험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당해야 했던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를 대신하여 감당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 고후 5:21 참고). 예수님은 시 22:1의 말씀을 빌려오셨다. 그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경험을 특별한 방법으로 경험하고 계셨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59:2).

이는 눈속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진실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짊어지셨다. 우리의 범죄로 인한 형벌을 그분이 당하셨다. 죄의 무게를 짊어지실 때에 그분의 심령은 경악과 공포로 가득 찼다. 하나님의 시선에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었으면 신격의 한 분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죄의 형벌로 고통을 당하셔야 했겠는가?

그러나 이런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을 수 있으셨다. 그분에게 닥친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믿음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분은 아버지께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고수하기 원하셨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아담을 대신하여 사망이 되셔야 하셨다. 대속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과 아담 안에서 죽은 그의 모든 후손들의 사망을 처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망이 되신다는 것은 죄 자체가 된다는 뜻이다. 고후 5:21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계시하였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은 당신이 죄 자체가 되셨다는 절규였다. 이것은 시편 221절에 있는 말씀인데 예수님의 이 장면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정도가 아니라 죄 자체가 되셨다.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거품이 이는 파도 위를 걸으셨으며 귀신들로 떨게 하시고 질병이 물러가게 하셨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던 그분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 위에 바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 (DA 755.1) 예수께서 죄 자체가 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의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우리 각자는 다 죄 자체이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의 절규는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의 깊이를 보여준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의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분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셨다.

 

 

셋째날() 찢어진 휘장과 갈라진 바위

62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27:51~52).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다양한 관점에서 예수님에 관한 기사들을 전했지만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유독 마태만 찢어진 휘장과 열린 무덤에 대해 기록했다.

 

1. 27:49~54을 읽어 보라. 이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우리를 위해 어떤 소망을 제시하는가?

[27:49~54]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또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많이 부활해서 사람들에게 보였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할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폭도들이 예수님의 본뜻을 무시하고 엘리야가 내려와 구원하나 보자며 그분을 조롱한 직후에 주님은 숨을 거두셨다. 그들의 조롱은 예수님의 친백성들이 어떻게 그분을 오해했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마태는 그다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기록한다. 그 상징성은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됐다. 오랜 세월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 존재했던 제사제도는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오래된 지상의 표상이 이제는 그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으로 대체되었다.

 

2. 8:1~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지상 성소 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무엇이 그것을 대체하였는가?

[8:1~6]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셔서 하늘에 들어가셔서 성소봉사를 하시는 것으로 지상성소 제도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마태는 휘장이 찢어진 현상뿐 아니라 바위가 깨지고, 무덤이 열리며, 죽은 자들이 일어난 사실들도 기록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주로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것들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옛 제도가 자체적으로 야기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10:4). 물론 예수님만 죄를 없애실 수 있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심으로 이르러온 위대한 결과와 약속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다.

그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5:13~14, 19 참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과 약속을 보게 된다.

 

<부가설명> 휘장은 두꺼웠다. 사람이 찢는 데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였다. 휘장이 걸린 성정 기둥은 높았다. 사다리를 높게 걸지 않으면 휘장 꼭대기에 손이 닿을 수도 없었다.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찢어졌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였다.(10:20) 제사장이 매일의 속죄 봉사에서 희생의 피를 휘장 앞에 뿌렸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께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죄 자체가 되셔서 죄를 처리한 것을 나타낸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기 된다. 이제는 예수께서 친히 하늘에 들어가셔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면서 당신의 보혈을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뿌려(벧전1:2, 12:24) 사죄의 호소를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간구로 그를 믿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고하신다.(3:30, 8:33,34) 그래서 지상성소를 통하여 가르쳐주셨던 속죄의 진실이 예수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가되었기 때문에 의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재창조된 것이다.

 

교훈 : 찢어진 휘장, 열린 무덤과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를 보여주는 소망의 증표였다.

 

 

넷째날() 부활하신 그리스도

622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28:6).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뿐 아니라 그분의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비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세상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사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다. 예수님이 계셨던 시대에서 오래지 않은 때로부터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몇 가지 역사적인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일례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들 수 있다. “네로는대중들로부터기독교도라고 불리는 혐오스러운 부류에 가장 모진 고문을 가했다. 그 명칭의 기원이 된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 재임기에 우리가 파견한 총독 중 하나였던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하여 극형에 처해졌다.”Tacitus, a.d. 57-117 (www.causeofjesusdeath.com/jesus-in-secular-history).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유죄 선고를 받고 십자형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다.

까다로운 부분은 금요일 오후에 죽은 나사렛 예수가 일요일 새벽에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사상이다. 수많은 사람이 씨름하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유대 땅에서 로마인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에 부활한 유대인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소유했다고 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4, 19)고 했다. 예수님의 죽음 다음에는 그분의 부활이 와야 했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도 보증을 받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사를 대할 때에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는 이 기사를 예수를 따르는 소수의 추종자들이 그분에 대한 기억을 살리기 위해 기록한 감정적인 선동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오늘날 유명 인사가 사망하면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둘째는 부활의 기사가 비범한 사건에 대한 문자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이후 모든 인류를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해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부가설명>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엄청 강조한다. 표상으로 여기저기 십자가를 달아놓고 걸어놓았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는 의미가 없다. 십자가가 속죄와 구원의 의미를 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십자가 이상으로 강조하고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증거 행전이다. 사도행전에 십자가라는 말은 두 번 나온다. 그런데 부활은 열 번 나온다. 한 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표현이다. 초기 교회에 예수님의 부활 증거가 전도의 중심이었다. 그만큼 부활이 증거의 능력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분명하게 증거해야 한다. 이것은 또 우리가 그날에 확실히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고백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교훈 : 나사렛 예수의 죽음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이 거의 없다. 단지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 두 견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고 있을 뿐이다.

 

 

다섯째날() 대사명 위임

623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

 

예수님이 하신 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그분이 승천하시면서 복음 사역을 인간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분과 우리 자신을 실망시키는가. 복음서를 보면 초기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역을 위탁하신 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1. 28:16~18을 읽어 보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28:18)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단 7:13~14을 비교해 보라. 이 말씀들은 어떻게 서로 연관이 있는가?

[28:16~18]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다니엘 7장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시는 사건을 예언적으로 기록하였고 마태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므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이 권세로 신자들에게 대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2. 28:19~2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은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신자들이 수행해야 할 대 사명을 주셨고 우리는 이 사명을 수행할 특권을 행사해야 한다.

 

엘렌 G. 화잇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감람산에 약 오백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고 말했다(고전 15:6 참고). 그분의 사명 위임은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영혼 구원 사업이 안수 받은 목사에게만 의존된다는 생각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하늘의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 사업이 위탁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저희 동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이 사업을 위하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그리고 이 신성한 맹세에 스스로 가담한 자들은 모두 그때부터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된다”(시대의 소망, 822).

 

<부가설명>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죄의 사유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부활하시므로 죄가 온전히 사유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전15:17,18)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이 죄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증명이다. 사망은 죄는 사망의 세력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사망의 세력에게 정복당한 것을 나타낸다. 거기서 끝났다면 사망은 영원히 승리하고 온 우주는 황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은 사망에 매어 있을 분이 아니었다. 그는 부활하시므로 사망을 폐하셨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온전히 드러내셨다.(딤후1:10) 부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증명이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생명을 증거하게 하셨는데 침례는 바로 이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의 예식이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킬 수 있는 능력은 부활의 생명을 받았을 때이다. 이것이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생명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의 핵심은 부활과 생명이다. 사망을 이긴 생명의 능력이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받으라고 증거한다. 신자들이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하고 이 생명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부활의 생명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사들에게 복음을 맡기지 않고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천사들은 부활의 생명의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의 복음을 전파할 자격이 없다. 복음은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지만 사도행전은 부활증거 행전이다. 오늘도 여전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아멘.

 

교훈 : 예수님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거룩한 사업에 초청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여섯째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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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마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기록했다. 반면 동료 기자들처럼 부활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인 의미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그 사건을 묘사할 뿐 우리에게 그것의 신학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가장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바울은 또한 우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2:12)다고 적었다. 베드로도 이 중심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이 왜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부활에 대한 기록의 진실성을 밝혀주는 증거로 간주한다. 어쨌든 그 사건이 있은 지 수십 년 뒤에 기록했을 텐데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도록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할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만약 그것이 사기나 속임수였다면, 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그 사건 자체가 의미하는 것에 어떤 신학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그 사건을 꾸미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예수님이 지금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심리에 못질을 하면서 하늘성소 봉사를 부인하는 주장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봉사야말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게 하는 봉사이다.(8:33,34) 얼마나 복된 봉사인가!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의 작용이 신앙생활로 드러나야 하면 부활의 생명으로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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