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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19

 

기억절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연구 범위 : 10, 53:6, 3:10~20, 15:14~16, 1:18~20, 6:34

 

알제리 태생의 작가 알베르 까뮈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로 고뇌했다. 그는 소설 <페스트>에서 인간의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를 전염병에 비유했다. 그는 역병에 시달리는 소년이 끔찍하게 죽는 장면을 묘사했다. 소년의 죽음을 목격한 한 사제는 그 자리에 있던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끔찍하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사랑해야 할지 모른다오.” 화가 난 의사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아니요, 신부님. 사랑에 대한 제 소견은 아주 다릅니다. 어린 애들을 고문하여 죽게 하는 그런 종류의 섭리라면 저는 죽는 날까지 사랑하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위의 장면은 욥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등을 토닥이는 듯한 어설픈 대답이 주어졌다. 위의 의사처럼 욥은 그러한 대답들이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에 대해서 이치에 맞는 대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번 주 교과는 계속 그 해답을 추적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인간에게 있는 죄의 본성과 그것이 고통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느끼기 : 불의와 죄,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과 인간의 절망감을 느낀다.

행하기 :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닌 믿음을 강화시키는 측면에서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A.

그대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성경의 진리와 조화롭게 설명하겠습니까?

죄와 사망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11장에 따르면 진실을 모두 알지 못할지라도 믿음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할 때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견디며 믿음의 대열에 설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자기 명철을 버리고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철저히 신뢰할 때 그렇게 된다.

 

B.

그러한 사망 사고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그러므로 호흡이 있을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한다. 이미 사망한 사람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하게 대우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6:34에서 매일 괴로움이 도사리는 삶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떤 조언을 주셨습니까?

한날의 괴로움을 그날에 끝내라고 한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괴로움과 불행이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야 할까요?

예수 안에서 해결된 생명으로 충성해야 할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고통을 봅니다. 매체를 통해 수많은 비극을 보면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죄한 고통이 전혀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에 의해 파괴되고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이 죄악 세상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 너머로 하나님의 회복을 바라보게 합니다.

 

 

첫째 날() 1113일 욥의 항변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10:1).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요점은 하나님이 악을 벌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요점이 욥의 상황에는 맞지 않았다. 욥의 고통은 보응의 형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라, 다단, 아비람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욥의 죄 때문에 그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모습을 자주 보지만 욥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신다(1:8 참고). 욥은 그가 당하는 고통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욥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항의가 그토록 거셀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1. 욥기 10장을 읽어 보라. 그는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에 그의 말이 매우 타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5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8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것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 치는 것 같으니이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 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 욥은 자기가 이런 재앙을 받을 이유를 모른다고 항변하고 있다. 욥기 시작부분부터 여기까지 읽으면 욥의 항변을 이해할만 하다.

 

욥은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에 상황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10:7).

친구들의 지적과 달리 욥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욥기는 정반대의 사실을 알려준다. ‘욥은 너무 신실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욥기 1~2장이 그 사실을 가리킨다. 욥은 이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만약 알았다면 그의 괴로움과 좌절감은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욥의 상황이 독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의 보편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욥기의 문제 역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우리가 행한 죄악 이상의 고통이 가해지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단순히 속도를 위반한 사람과 속도위반 과정에서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부가설명> 욥은 선하고 의로웠다.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께 복을 주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참소했다. 사단은 욥과 하나님의 관계를 신상필벌의 관계로 몰아가도록 시도했다. 이것은 사단이 이 세상 사망이 된 사람들을 속이는 사상이다. 사단은 세상을 도덕적 사고방식으로 통치하고 있다. 물론 도덕의 근원은 성경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사단은 사망을 세상에 가지고 들어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도덕성을 사망의 세상에 상벌 개념으로 이해시킨 것이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사후에 천국이나 극락에서 영생하고 도덕적으로 악하게 살면 사후에 지옥에 가서 고통 중에 영생한다고 이해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였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사망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사단의 도덕적 거래 주의에 속지 않아야 한다. 욥의 친구들은 이 사단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고 욥도 이 사상에 물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상을 깨뜨리기를 원하신다. 욥이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토로한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불평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욥에게 노리는 함정이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욥의 사상은 바로 신상필벌 사상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교훈 :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움을 거침없이 토로하였다.

 

 

둘째 날() 1114일 무죄한 피?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59:7).

 

우리는 종종 무죄한고통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성경도 부당하게 당한 폭행 또는 살인에 관한 문맥에서 무죄한 피라는 문구를 사용한다(59:7, 22:17, 3:19).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무죄한 피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인간의 죄성과 부패의 실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죄함의 문제에 정당한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면 과연 누가 진실로 무죄하다는 것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대의 출생증명서는 그대의 유죄 증명서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수 세기 동안 여러 신학자들이 인간과 죄 사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논쟁했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인간의 죄성이라는 개념은 신약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신약의 주제는 구약에 기록된 진리를 기초로 확장되었다.

 

1. 우리는 다음의 성경절들을 통해 죄의 실상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왕상 8:46, 51:5, 20:9, 53:6, 3:10~20)

[왕상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20: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3:10~2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의 무죄한 피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의 분명한 증언 외에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그분의 선함과 거룩함을 엿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죄성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에 누가 과연 무죄한사람이겠는가? (일단 아기와 유아의 문제는 유보한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욥은 죄인이었다. 그는 무죄하지 않았다. 그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와 그의 자녀들이 그러한 고난을 당할 만한 죄를 저질렀다는 말인가? 이것이 고통에 관하여 인류가 제기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아닌가? “토성(土城)”을 방어하는 것과 같은 친구들과 달리(13:12 참고) 욥은 자신이 그런 고통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수 세기 동안 여러 신학자들이 인간과 죄 사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논쟁했다.”고 말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유감이다. 그는 또 성경의 분명한 증언 외에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그분의 선함과 거룩함을 엿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죄성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에 누가 과연 무죄한사람이겠는가? (일단 아기와 유아의 문제는 유보한다.)”고 적었다. 성경은 사람들의 다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었지만 왜 그렇게 말하는지 분명한 문장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창세기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인 이류를 사건으로 자세히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고 계시하였다.(17:26) 그 한 혈통은 아담의 혈통이다. 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생명을 잃고 사망이 되었다. 그 후로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존재가 되었다.(고전15:22) 아담의 후손들은 죽은 존재로 태어난다. 이것을 성경은 썩어질 씨라고 한다.(벧전1:23)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유전 받았다. 결과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4:22)이 된 것이다. 이 썩어져가는 구습이 바로 죽은 행실이다.(6:1) 이것이 다윗이 말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죄와 죄성을 도덕성에서 찾고 있는 한 결코 올바른 답을 얻지 못한다. 죄와 죄성은 인간의 존재와 생명에서 찾아야 한다. 죄는 사망이고 죄성은 사망성이다. 갓난아이도 이미 아담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을 받아 출생한다. 그래서 죄인이다. 그것이 죄성이고 거기서 나오는 것이 모든 도덕적 악인데 사실은 도덕적으로 엄청난 선을 행한다고 해도 여전히 썩어져가는 구습이요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의 죽은 행실이다. 이것이 죄요 죄성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는 무죄한 피가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무죄한 피가 없다. 모든 인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2:3)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도덕적으로 죄 문제를 논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세상에 노린 함정이다. 우리 모두는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속히 나와야 한다. 그래서 구원도 바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교훈 : 죄와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욥에게 가해진 고통이 그의 죄과에 비례하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셋째 날() 1115일 부당한 불행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15:14).

 

1. 15:14~16을 읽어 보라. 엘리바스는 욥에게 어떤 진리를 제시하는가?

[15:14~16]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엘리바스가 다시 욥에게 진리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모든 인류의 죄성에 대해 말한다. 죄는 지상의 존재하는 삶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고통도 보편적이다. 알다시피 인류의 모든 고통은 죄에서 비롯된다. 또한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난의 풀무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순금에서 찌꺼기가 제거되는 것은 풀무의 열을 통해서이다”(부조와 선지자, 129).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가 고통을 통해서 아무 유익을 얻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갑자기 죽어서 품성의 순금에서 찌꺼기를 제거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무엇인가? 단지 고통 때문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예들을 지나칠 수도, 단순한 공식에 대입시킬 수도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욥을 고발하는 친구들과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말 것이다.

산불이 나서 산 채로 죽어가는 동물들의 최후를 보고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겠는가? 또 자연재해로 죽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전쟁으로 죽는 수많은 시민들은 어떠한가? 또 그들과 함께 사라진 가족들은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겠는가? 욥의 열 자녀뿐 아니라 칼날에 죽고(1:15, 17), 하나님의 불에 산 채로 타버린(1:16) 욥의 종들에 대해서도 온당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교훈을 얻었고, 욥의 신실함으로 사탄이 패배했다지만, 그 외의 인물들이 당한 운명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정당하지도, 의롭지도, 바르지도 않다.

우리도 오늘날 비슷한 도전을 받는다. 6살짜리의 소아암 사망이 온당한가? 20살 여대생이 차에서 끌려나와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 온당한가? 세 아이를 둔 35세의 어머니의 자동차 사망이 온당한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죽은 19,000여 명의 일본인은 어떠한가? 19,000명 전부가 이런 벌을 받을 죄를 지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죽음도 온당하지 않다. 정말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부가설명> 위에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것도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부가설명을 잘 읽으면 기초적인 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3:17)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사망이 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겪을 재난에 대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재난은 옛 뱀 곧 사담으로 인하여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재난들을 창조주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사단의 책략이고 사망이 되어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사단의 책략에 완전히 속아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리고 사람이 당하는 재난들을 도덕적으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라고 속고 있다. 그것은 땅이 저주받은 결과들이다. 요한복은 9장에는 나면서 소경된 사람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9:2) 이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또 교인들 사이에 엉터리로 전달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깜짝 놀랄 일이다. 사단은 이렇게 사람들을 미혹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씀의 배경은 그가 나면서 소경이 된 것은 사단이 해 놓은 일이라는 암시가 있다. 세상의 모든 불행과 재난은 다 사단이 해 놓은 일이다. 하나님은 사단의 일을 멸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사망의 세력과 그 존재를 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셨다.(2:14) 그러나 마귀의 때가 끝날 때까지 이 사망의 세상에는 재난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12:12) 이 때가 끝나는 날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요 이 세상이 사망의 땅에서 생명의 땅이 되는 때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그때까지 이 세상은 재난이 연속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생명의 때에 생명의 땅에 살 수 있도록 하라고 간절히 호소하신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자체가 피투성이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16:6)고 호소하신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은 재림하실 때 현실이 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성경의 신앙을 믿는 것이고 진짜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교훈 : 불행은 이 세상의 보편적인 특성이며 때로 교훈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불행은 때로 교훈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아 보인다.

 

 

넷째 날() 1116일 그날로 족하니라

 

1. 다음 성경절을 읽고 그 속에 묘사된 이들의 즉각적인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리고 삶이 그들을 어떻게 공정하게 다루었는지 자문해 보라.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1:18~20).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4:8).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것을 다 치시매”(12:29~30).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삼하 11:17).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38:6).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14:10). “또 어떤 이들은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11:35~38).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요일에서 화요일까지 부가설명에 다 했다. 사단이 만들어놓은 땅에 임한 저주와 사람이 썩어질 씨가 되어서 죽은 행실을 하는 것이 이유라는 것을 성경은 충분히 대답을 했다.

 

성경은 이 타락한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반사한다. 악과 고통은 실재한다. 성경 전체 중 일부 성경절만을 가지고 이 세상의 삶이 공평하고 의로우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고통이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얄팍하게 이해한 것이다. 신실함은 분명 큰 보상을 받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고통을 막는 절대적인 장벽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훌륭한 교훈을 주셨다. 예수님은 천연계에서 실물교훈을 찾아 왜 우리가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하는지 설명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34).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예수님은 매일의 삶에 존재하는 괴로움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정반대셨다. 그분은 매일의 삶에 존재하는 악의 만연을 인식하셨다. 그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신다. 우리도 경험상 그런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이 세상이 죄의 세상이고 사망의 땅이며 사망이 된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으면서 죽는 시간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잘 아신다. 사람들은 순간마다 사망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내일이 보장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 우리는 수 십 년을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 호흡이 있는 순간만을 삶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보다 이런 사실을 더 잘 아시는 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은 오늘만 산다고 한 것이다.(3:13 참고) 기도할 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신 것이나 만나를 하루치만 주신 것이 다 이런 이유이다. 사람에게 최대로 허락된 시간이 오늘이라는 하루라는 것을 가르치신 계시적 교훈이다. 그 하루를 비록 괴롭더라도 하루니까 올바르게 믿음으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이라는 하루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르게 살면 각 개인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는 날, 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 영원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일을 완전히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재창조되는 그때 죄의 세상이 완전히 멸하고 영원한 생명이 확정되는 날 우리는 이 죄의 세상을 지나는 동안 괴로웠던 나날에 대하여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는 날 동안 가장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그때 온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교훈 : 성경은 신실한 자에게 약속된 평안과 상반되는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도 매일의 삶에 존재하는 괴로움을 시인하셨다.

 

 

다섯째 날() 1117일 보이지 않는 것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3:5).

 

1. 위의 말씀을 읽어 보라.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는 맥락에서 본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중요한 기별은 무엇인가?

 

: 하나님은 가장 선한 길로 인생을 이끄신다는 것을 신뢰하라는 기별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라는 사랑의 권고이다.

 

욥의 경우는 극단적인 측면이 있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을 보기 위해 굳이 욥의 이야기 또는 성경의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그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런 현실에 둘러싸여 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14:1~2).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고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씨름한다. 납득하기 어렵고 무죄한 피를 부르는 그런 종류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탄이 실존하며 그의 존재가 수많은 고통의 직간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욥기 1~2장을 포함하여 성경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제2과에서 본 것처럼 대쟁투라는 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성을 다루는 데 요긴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왜 일어났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간혹 또는 자주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이다. 아직 해답이 명확하지 않고, 우리 주변의 죄와 고통에서 아무 유익도 발견할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부가설명> 죄와 고통의 장본인이 사단이라는 것은 성경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렇더라도 욥 같이 의인이요 선한 사람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왜 지켜주지 않는지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42:3)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42:10) 하나님은 저주 받은 땅에 일시 동안 생존하는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하여 말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아담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그리고 사망이 되어 썩어져가는 구습에 매인 옛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구원사실을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라고 하신다. 호흡이 있고 맑은 정신이 있는 동안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사단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오히려 비난하면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잘못하면 무섭게 형벌하는 분이라고 속이는 것이다. 성경이 계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속임수에 속아서 하나님이 계시면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런 의아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썩어져가는 삶의 상태가 경우에 따라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세상에 있는 재난들은 죄의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이런 것들을 그래도 억제하시기 때문에 이만한 것임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3:5)

 

교훈 :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이다.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날() 11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번 교과의 서론은 알베르 까뮈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는 고통의 문제뿐 아니라 일반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그의 고뇌를 여러 책으로 저술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고통은 삶의 의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그도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처럼 많은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명언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심각하고 철학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살이다.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것과 같다.”The Myth of Sisyphus and Other Essays (New York: Vintage Books, 1955), p. 3. 확실히 고통의 문제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욥기는 실상을 가리는 베일을 벗기고 우리의 가시범위를 초월하는 큰 그림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욥기를 다 읽을지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있다.

하나님 없이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과 그것을 신앙 안에서 찾으려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맞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때에 고통의 문제는 더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죄와 고통 그리고 하나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까뮈 같은 무신론자에게 없는 것이 있다. 즉 언젠가는 해답과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까뮈는 나중에 침례를 받기 원했지만 그 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증언이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21:4)가리라는 소망이 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세상의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개념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증거를 사용했습니다. “세상에 쾌락이 고통을 능가한다는 말이 있다. 아니면 적어도 그 둘이 균형을 이룬다고 한다. 독자들이 이러한 진술이 참인지 아닌지 그냥 보기를 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있을 때 두 동물의 느낌을 비교하게 하라.” 그대는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룬다는 개념에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도덕적 선과 악은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 세상은 바탕 자체가 악이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12:45)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11:29)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1:4)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악은 이미 있는 것이고 선은 이 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세상은 도덕적으로 보아 도덕적 선악의 개념으로 인류를 이해하고 세상을 판단하려는 것은 헛수고이다. 그렇게 판단하려는 사람 자체가 이미 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선악을 도덕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생명과 사망으로 계시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은 생명이고 악은 사망이다. 이 세상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순간부터 사망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 악한 사망에서 사람과 세상을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진력하신다.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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