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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일 안식일

일몰오후 544

 

연구범위 : 5:1~4, 고전 2:10~11, 63:10~14, 3:4~6, 8:11, 벧전 1:2

 

기억절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성경 전체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은 당연시된다. ·구약성경이 모두 이런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분의 신성은 말씀 속에 계시된 수많은 진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진리이다. 예수님의 신성도 성경의 여러 곳에서, 특별히 신약의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에서 확증된다.

그러나 성령의 신성은 약간 미묘한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간접적인 진술들을 통해서 그것을 유추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에 대하여 말씀 속에 계시한 바를 조심스럽게 연구하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서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성경이 진술하는 것보다 못한 수준에서 진리를 주장해서도 안 되며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고전 4:6)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배우겠다는 겸손한 태도로 이 주제에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고를 성령에 대한 이해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물론 어떤 개념들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성경이 확증하는 것을 수용하고 증언해야 한다.

 

핵심요지

깨닫기 :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존재임을 이해한다.

느끼기 : 우리를 거룩한 형상으로 재창조하시고 그리스도처럼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역할에 감사한다.

행하기 :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우리의 삶을 성령께 맡기기로 결심한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은 어떤 면에서 큰 잘못이었습니까?

성령을 속이는 정신으로 자기들의 명성을 얻으려고 했다.

성경에서 무엇을 보면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사실이 있다. 영원성, 전지성, 전능성 등등.

성령은 신적인 영역에서 어떤 사역을 펼치십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창조와 섭리와 구원에 함께 하신다.

성령이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일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중생, 기도를 대신하심,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심.

우리가 변화된 성품을 가지고 거듭난 생애를 살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성령께 맡겨야 할까요?

말씀과 기도로 진리를 깨닫고 깨달은 진리가 생활이 되도록 성령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결론 : 신격의 제3위이신 성령의 역할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사역을 인식하며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올 긍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그분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신성을 깨달으면 그분의 존재에 대해 감사한 마음과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기를 소원하는 갈망이 생깁니다.

 

 

첫째 날() 성령과 하나님

115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성경은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성경의 기자들이 성령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성령이 행하신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1. 5:1~4을 읽어 보라.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한 말 속에서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5:1~4]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성령을 속인 것이 바로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만약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베드로는 매우 부주의하고 치명적인 오류를 말한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성령을 동등한 수준에 두었다. 3절에서 그는 아나니아에게 왜 성령을 속였는지 묻는다. 그리고 4절에서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요점은 아나니아가 사도들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했다는 것이다. 성령에게 한 거짓말은 하나님에게 한 거짓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요점은 매우 분명하다.

 

2.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잘못에 대해 왜 그렇게 가혹한 형벌이 주어졌을까?

 

: 답은 아래 설명에 있다. 아나니아 부부는 초기 교회 많은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으로 교회 안에 칭송이 자자하자 그것을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땅을 바치기로 소문을 내고 속으로는 자기 실속을 챙기려고 하여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저해하고 자기들의 명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한마음과 한 뜻”(4:32)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연합은 성령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자원하여 아낌없이 나누었다. 나눔에 관하여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공동체의 연합을 부정하는 것이요 그러한 연합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하시는 성령을 저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이 어떻게 초기 교회 공동체 속에 임하신 성령의 거룩한 사역을 배신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에 대한 그 같은 부정직은 파괴적이며 신자들의 삶 속에 효과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훼방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을 섬기기 바라신다. 그 새로운 신앙 공동체는 중요한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극단의 조치를 통해서 새로운 교회가 연합과 진실함으로 서로 봉사하며 기꺼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하셨다.

 

<부가설명> 교회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2:7,11,17,29, 3:6,13,22) 그런데 이들 부부는 교회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배반하였다. 초기 성도로서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절한 것이 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교회를 주장하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것을 거역하면 생명을 잃는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생명의 성령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에 생명을 잃은 것이다. 당시에는 현실적으로 생명을 잃고 사망이 되었지만 지금은 영적으로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호흡이 있는 동안 연명하겠지만 부활의 아침에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령을 거역하는 교인들의 실상을 드러내어 교인들이 올바른 믿음으로 생명의 성령의 지도를 따라 생명을 누리도록 경고하신 것이다. 지금은 교인들이라고 하면서 성령과 아무 상관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결국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될 것이다. 시간이 현재냐 미래냐 하는 차이 외에 차이가 없다.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르게 반응하는 교인이 되어서 교인뿐만 아니라 진정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직함은 초기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방해할 만큼 파괴적이었다.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속였다고 결론지었다.

 

 

둘째 날() 성령의 신적인 속성들

116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경의 여러 곳에서 성령은 신적인 속성을 가진 것처럼 묘사된다.

 

1. 다음의 성경절에서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성령의 것이라고 열거되어 있는 속성과 활동들은 무엇인가?(고전 2:10~11, 40:13~14, 139:7, 9:14, 딤전 6:16, 1:35, 15:19, 104:30)

[고전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40:13,14]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 인용된 성경구절들은 성령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령의 전지성이나 하나님의 전지성이 동일하고 성령의 영원성이 하나님의 영원성과 동일하고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이가 동일하고 성령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복음 사업이 편만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 것과 같은 속성이고 창조에도 함께 하신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탐구하면서 이런 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이 성령이라고 주장했다. ‘현자는 현자를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아본다.’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전 2:10~11).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만큼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을 그 내면에서부터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외부의 존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이야말로 전지(全知)하시다.

성령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없는 곳을 찾아 달아날 수도 없다. 성령은 진실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139:7과 비교).

성령은 영원하시다(9:14). 성경에 영원하다고 일컬어진 존재가 얼마나 되겠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딤전 6:16). 그래서 성령이 영원한 분이라고 일컬어진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성령은 또한 전능(全能)하시다. 1:35에서 성령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라는 구절은 같은 의미이다. 이 말들은 처녀 수태라는 초대형 기적을 언급하면서 나온다. 15:19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이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한다. 참으로 성령은 신적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12:31~32, 3:28~29).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중 가장 놀라운 능력은 아마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능력일 것이다. 영적인 거듭남을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3:5~8). 그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침례는 예수를 믿고 죽은 행실을 회개하여(6:1)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예식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하나님과 우주 앞에 신고하는 예식이다. 이 예식은 아버지고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행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삼위가 함께 하셨다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에 삼위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라고 하신 것이다. 성령은 자기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 그와 같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다 아신다.(8:26,27, 고전2:10) 성경은 성령께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올바르게 성경을 읽고 깨달아서 사실이 아닌 것을 주장하는 소리를 바르게 분별하고 듣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성경에서는 여러 신적인 요소가 성령의 속성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분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신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셋째 날() 성경적인 암시들

117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63:10).

 

성경에는 하나님으로 바꾸어 말해도 무방한 성령에 대한 언급들이 많다.

 

1. 63:10~14을 읽고 민 14:11, 32:12과 비교해 보라. 성경의 기자는 누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이는 성령의 신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63:10~14]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12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32: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 성령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성령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계시한다.

 

63:10을 보면 사람들이 반역하여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민 14:11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그리고 신 32:12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32:12). 명확하게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과 성령을 서로 동등하게 보았다.

삼하 23:2을 보면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라고 했는데 3절에서는 다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라고 했다. 이러한 성경적인 유사성에 따라 결론을 내리자면 성령은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간주되고 있다.(간주라는 말은 별로 합당치 않다. 계시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데 저자가 왜 간주라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교과 공부한 사람의 견해)

 

2. 고전 3:16~17을 고전 6:19~20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고전 12:11을 고전 12:28과 비교해 보라. 이 말씀 속에서 성령하나님이란 말은 얼마나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가? 하나님에게 속한 어떤 특성이 성령의 특성과 같은가?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12:11, 28]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 이 구절들은 성령과 하나님은 동등하신 존재임을 잘 계시하고 있다.

 

고전 3:16~17에서 바울은 고전 6:19~20의 언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을 안에 모시는 것은 하나님을 안에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을 성령의 전이라는 말과 동일시함으로써 바울은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가리킨다.

고전 12:11에서 바울은 각 신자에게 영적인 은사를 나눠주는 분은 성령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몇 절 뒤에서 그렇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했다(고전 12:28). 골자는 분명하다. 성령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동일한 일을 하신다.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성령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 위에 기록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기록하였다. 이런 말씀들은 성령께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한 위이심을 계시하는데 적절한 방법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태초부터 창조주로서 함께 일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말씀하나님의 역사가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다. 해석자들은 가라사대라고 하신 말씀을 말씀하나님의 역사라고 설명하기를 좋아하지만 창세기 1장의 기록은 반드시 그렇게 이해하도록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으로 말씀하신 사실로 이해하는 것이 기록된 표현상으로 더 합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경 다른 곳에 특히 신약성경에 말씀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창조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창세기 12절에는 성령께서 창조 현장에 활동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지면을 펴는 일에 친히 일하신 것을 시편 104:30에 기록하였다. 이런 계시로 인하여 우리는 창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오직 한 이름 여호와이시다. 삼위는 동일하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교훈 : 성경에는 성령이 하신 말씀이나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이나 행위로 번갈아가며 묘사한 부분이 많다. 이는 성령과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는 증거이다.

 

 

넷째 날() 성령의 신적인 사역

11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4~5).

 

성령은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간주되는 특별한 사역들을 행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도 적극적이셨을 뿐 아니라 죄인들을 재창조하는 사역에도 적극적이시다.

 

1. 3:4~6을 읽어 보라. 바울은 재창조 과정에서 성령의 개입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신다고 설명함.

 

성령은 중생의 씻음과 우리의 영적인 갱신이라는 문맥 속(3:5)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3:4)과 나란히 언급된다. 그분은 거듭남을 일으키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신다. 그분은 생명의 성령이시다(8:2). 그분은 죄인을 성화시키시며 그들의 성품을 변화시키신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를 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도우신다. 오직 신적인 존재만이 그같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다.

 

2 6:8~10을 행 28:25~27과 비교해 보라. 성경 기자들은 거룩한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하는가?

[6:8~10]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28:25~27]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 이사야가 들은 여호와의 음성은 곧 성령의 음성이었다고 가르친다.

 

성경을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그다음에는 성령이 말씀하셨다고 하는 경우들이 몇 가지 있다.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을 전해주신 분은 성령이시다(벧후 1:21).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설명한다(딤후 3:16). 말씀을 주시는 행위는 성령의 또 하나의 신적인 사역이다.

 

3. 우리는 롬 8:11에서 성령의 신성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성령께서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다고 했다.

 

성경은 성령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고 우리도 일으키실 것이라고 천명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킬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부가설명> 교회가 시작된 초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심했다. 특별히 아리우스라는 교부는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당시 교회에 아주 합리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널리 퍼져나갔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에 교회 총회를 소집하고 친히 주관하여 회의를 했다. 이때 대부분의 대표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본질인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적으로 증거해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확정되었다. 현대에 와서 어떤 교단(여호와의 증이)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성경의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 또는 감화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개체성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성령도 역시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친히 마태 28:19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셋이기 때문에 복수이다. 그런데 이름은 단수이다. 즉 아버지, , 성령은 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바로 여호와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다 여호와시라는 말이다. 모두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스가랴는 그 이름이 오직 하나라고 하였다.(14:9) 성령은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삼위 중에 한 위이시다. 그래서 창조와 구원에 삼위가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교훈 : 성령의 신적인 사역은 창조뿐 아니라 인류의 재창조 사역 즉 중생에도 미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의 부활까지 보증한다.

 

 

다섯째 날() 성령의 신성이 중요한 이유

1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만약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 만약 성령이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구원과 예배의 의미는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은 신자들을 활성화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 그분은 신자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충만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성품을 변화시키신다. 그분에게는 부활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신다. 그런데 만약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이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방법으로 그런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1. 벧전 1:2, 고후 13:13, 28:18~19을 읽어 보라. 침례 선언과 축도의 끝에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란히 언급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찬양에서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벧전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28:18,19]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삼위일명 하나님께서 함께 경배를 받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진정으로 어떤 분인지를 인정하는 올바른 방식으로 그분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성령의 신성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영성의 전제조건이다. 신약성경은 주저 없이 성령을 다른 두 신격과 나란히 언급한다. 침례 의식 속에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지니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침례는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심오한 예배 의식이다. 침례 의식에 나타난 이 같은 진실은 사도적 축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하는 기원문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찬양을 받는다. 신성의 3위는 나란히 언급됨으로 동등하게 인정을 받는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적합한 예배의 대상으로 인정을 받는다. 침례 예식과 사도적 축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그분께 의지해야 하며 우리의 교사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존재이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필요성에서도 그렇다.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매우 중요하다. 그분이 정말 어떤 존재인지를 알며 그분의 신성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역을 귀중히 여기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성장과 성화를 위해서 그분께 의지할 것이다.

 

<부가설명> 성령을 신성의 제3위라고 하는 것은 신학이 만든 서열이다. 성경에는 삼위의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다. 신학이 삼위의 서열을 매긴 것은 소위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사상을 기초로 하여 그렇게 하였다. 신자들은 어떤 경로로 그런 서열적 표현이 되었는지 모르고 그냥 신학적 표현이 일반화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마태 28:19에 아버지 아들 성령, 이렇게 차례로 기록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삼위의 차례는 반드시 이 차례로 기록하지 않는다. 고후 13:13은 예수, 아버지, 성령의 순서이고, 고전 12장에 은사에 대하여서 기록할 때에는 성령, 예수, 하나님의 순서이다.(고전12:4~6) 에베소서에 삼위의 차례도 성령, 예수, 하나님이다.(4:4~6) 그러므로 신학이나 우리의 관념에 1, 23위라는 구분은 성경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엘렌 화잇도 신학적 용어가 일반화된 그것을 그냥 사용한 것일 뿐이다. 고후 13:13은 구약 민수기6:24~26을 신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민수기에는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기록하였다. 복을 주시는 여호와, 은혜 베푸시는 여호와, 평강 주시는 여호와, 이렇게 축복하였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받은 축복 기도이다. 이 세 번 여호와라고 부른 것이 삼위일명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한 위이심이 확실한 것이다.

 

교훈 : 침례 선언과 사도적 축도에서 성령은 신성의 다른 두 위격과 나란히 언급된다. 그분은 경배의 대상이며 우리가 의지해야 할 신적인 존재이시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20

 

<복음전도>, 613~617 “신성에 대한 곡해를 읽어 보라.

 

이번 주에 보았듯이 성령의 신성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기억하라. 성령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다루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본질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 진리는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특히 하나님의 본성을 다루는 진리일 때는 더욱 그렇다.

한편 성령의 신성에 대한 믿음은 삼위일체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버지에 의해 위임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들을 통해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의존과 확신을 포함한다. “성령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성령의 본질은 오묘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주께서 인간들에게 성령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성경절을 모아 거기에 인간적인 해석을 가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고 하여 교회가 튼튼해지지는 않는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이러한 오묘에 관하여는 침묵이 금이다”(사도행적, 51~5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논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넘겨야 한다.” 물론 엘렌 G. 화잇이 말했던 문맥과 아주 다르지만 원칙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영감을 통해 계시되지 않은 영적인 진리 또는 하나님의 특성들에 대해서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그 진실을 충분히 올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에 관해서는 다음의 질문을 심사숙고해 보십시오. “성령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 것인가?”

중생과 구원을 잃게 된다. 구원을 중생한 사람들의 결과를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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