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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71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52)

 

연구 범위: 10:34~39, 12:13~21, 2:5~8, 22:14~30, 23:1~13

 

기억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3:16).

 

아스펜(Aspen)나무는 15~30미터까지 자라는 매우 아름다운 나무이다. 이 나무는 여름에도 기온이 많이 올라가지 않는 추운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 나무에서 나온 목재는 가구나 성냥 또는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아스펜 나무는 식물 중에서도 뿌리가 가장 멀리, 가장 넓게 퍼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서 수많은 순()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가서 넓은 지역에 퍼지게 된다. 아스펜 나무는 평균 150년 정도를 사는데 땅속에 있는 이 나무와 연결된 유기체들은 수천 년을 살 수 있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들에 대해 공부해 보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너무나 분명해서 굳이 관심을 갖고 찾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는 한편, 마치 땅속에 감추어진 아스펜 나무의 뿌리처럼 감추어져 있으므로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것들임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행동들과 태도도 있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참된 쉼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에는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

느끼기

우리가 일상에서 가볍게 생각하고 쉽게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행하기

참된 쉼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기 위해 날마다 결심하고 실천한다.

 

 

2.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신앙의 모습은 무엇일까요?(10:34~39)

올바른 선택으로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3.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한 하늘의 원칙은 무엇일까요?(2:5~8)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4.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이 깨닫기 바라셨던 진리는 무엇이었나요?(18:3)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5.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위선자들의 특징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23:1~13)

성경을 읽어보라. 수요일 공부를 찾아보라.

6. 참된 쉼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3:22)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근본적인 원인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우선순위, 이기심, 야망, 위선.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한 우리는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런 것들을 버리고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711() “검을 주러 왔노라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조화와 평화를 간절히 원한다. 교회와 기관들에서는 화해하는 법그리고 갈등 해결 방법과 같은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한다.

 

10:34~39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평강의 왕”(9:6)이라고 소개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선악간의 대쟁투에 관계된 말씀이다. 진리와 오류가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바른 선택을 위한 투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10:34~39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는 말씀이다. 위엄 있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연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셨던 구주께서, 이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이 분열과 갈등을 가져온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제자들과 청중들은 지금 우리처럼 당황스러워하며 궁금해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10:35~39은 사실 충성에 관한 말씀이다. 7:6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청중들에게 영원을 위한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모세가 산 위에서 받은 법이 명시하고 있는 의무였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였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랑이 예수님을 향한 헌신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때는 매우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었다. 부모는 마땅히 그들의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자녀를 향한 사랑이 예수님을 향한 헌신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 또한 매우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선택해야 함을 기억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세 개의 문장을 제시하심으로 이 선택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합당함은 높은 도덕적 표준이나 심지어 죄를 극복하는 능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합당함은 우리가 예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근거한다.

부모나 자식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한 것으로 선택할 때 우리는 가치 있는 자들이 된다.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나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는 순수한 신앙의 정신으로 감동된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바람은 없다. 원칙의 지배를 받고, 순결과 의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젊은 제자들이여, 앞으로 전진하라. 그대들의 구주께서는 그대들의 재능에 가장 적합한 위치로 그대들을 인도하시고 그대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교회증언 5, 87).

 

<묵상>

10:39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헌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영생을 얻기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포기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세상이 그분을 대하는 태도와 결정으로 구원을 받기도 하고 정죄에 이르는 심판을 받기도 한다(3:17~21).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사망의 세상이 되었고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생명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환자들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지 않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하러 오신 의사가 되심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이런 병을 앓는 환자라는 자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병으로 죽게 된다. 그래서 환자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과 절대로 환자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 사이에는 긴장과 투쟁이 생기게 된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검을 주신 셈이 된다. 가족 중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안에 평안과 쉼이 사라지게 된다. 사망과 생명의 투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항복해야 검을 내려놓게 된다. 불행하게도 생명이 항복하게 되면 종국에는 다 사망의 검에 죽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복을 주기 위하여 오셨으나 그분이 상대하는 사람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고 생활하는 세상은 사망의 세상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진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투쟁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여 영생의 생명을 얻는 사람은 쉼이 있을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둠으로 영원을 위한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712() 이기심

 

땅속에 넓게 퍼져있는 뿌리를 가진 아스펜 나무의 경우와 같이, 이기심은 예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쉼을 방해하는 라고 불리는 거대한 지하 시스템의 일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기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12:13~21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주신 비유 가운데 어떤 문제가 강조되었는지 설명해 보라.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무시하는 행동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은 무엇인가?

[12:13~21]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이 비유는 재물에 대한 욕심, 이기심을 경고한 말씀이다. 그 재물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 함께 자기와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첫째로 섬기는 정신을 가지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청중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신 것이었다. 유산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형제 사이에서 결정권자의 역할을 취하기를 거절하시며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시기보다는 그 질문 안에 감추어진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였던 이기심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선택하셨다. 각 개인의 행동을 주관하는 마음속 깊은 곳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신 것이다.

 

이기심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배우자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성도들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2:5~8에서 어떤 답을 발견할 수 있는가?

[2:5~8]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기심은 동정심과 이해심을 갉아먹고 무엇이든지 자기 위주로 판단하고 자기 중심으로 챙기려고 한다. 자기가 우상이 된다.

 

예수님께서 주신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필요와 야망에 집중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원칙을 간과하였다.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많이 갖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원칙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기로 결심하신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보여 준다.

2:5~8은 이기심 없음과 겸손과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준다. 만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선택과 우선순위를 주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 땅 위에 우리 자신을 위한 창고를 짓게 될 것이며 하늘에는 보물을 쌓아 두지 못할 것이다(6:20).

 

<묵상>

부와 물질에 집착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얼마를 가지고 있든지와 상관없이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갖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사람에게는 만족하고자 하는 갈증이 있다. 이 갈증은 사망의 존재에게 나타나는 생리적 본성인 것 같다.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 인류를 죄에 빠지게 했던 사탄은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이기심과 욕심을 심어 두어 나를 위해 쌓아 두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의 완전한 모본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가설명> 전도서에는 이렇게 계시하였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1:8). 사망이 되어버린 인간은 그 질병이 낫기 전에는 만족함이 없어진다. 그래서 눈이나 귀나 다 항상 채우려고 한다. 그것이 욕심이다. 희한한 것은 그들이 목숨을 영원히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이 사실도 지적하셨다. 오늘 밤에 네 생명을 거두면 네가 예비하는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반드시 죽는 존재인데 욕심은 끝이 없다. 이것이 사탄이 가져다 준 사망의 존재가 된 사람의 이기심이다.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4:7,8). 우리는 자아를 과감히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굴복해야 한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사람의 여유이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기를 간구한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인간의 이기심을 언급하시면서 겸손과 사랑이 주관하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따라 살도록 교훈하셨다.

 

 

713() 야망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내셨던 마지막 주간을 공부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용기와 감동을 준다. 또한 그 기간을 살펴보는 것은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힌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무분별한 말과 행동을 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22:14~30을 읽고 그 엄숙한 식사의 자리에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하여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지 생각해 보라(22:24). 제자들은 왜 이 소중한 시간에 곁길로 빠져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에 집중하게 되었는가?

[22:14~30]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 예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는 섬기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들은 유월절 후에 예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것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이 문제가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8:1은 제자들이 이 문제를 좀 더 추상적으로 포장하여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실물교훈으로 답하신다. 어린아이를 부르신 후에, 그 아이를 군중들 가운데 세우셨다.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예수님의 그 행동은 설명이 필요한 듯 보였고 마 18:3에서 예수님께서는 답을 주신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회심을 경험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경험하는 것의 시발점이다. 회심을 경험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불현듯 결코 나 자신을 의지할 수 없으며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우리의 가치와 야망이 변화된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아이와 같이 나를 믿고 나에게 의지하거라. 참된 위대함은 너희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이 교훈을 깨닫지 못한 듯 보인다. 결코,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완벽한 교제의 시간이 그들의 다툼으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사역을 하고, 그분의 발아래서 배웠음에도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해 얼마나 망가졌는지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변치 않고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제자들의 이런 처참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묵상>

죄로 인해 우리 모두가 빠져 있는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부가설명> 사람들은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권력없는 자들을 부리고 착취하고 압박하는 것을 보고 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하층민이었다. 이제 예수라는 능력이 큰 선생을 따라다녔고 그분이 왕이 되면 신분이 바뀔 것이다. 그런데 12명이나 되니 그들 중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될 것인지 거기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 참석하면서 곧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있어서 누가 높으냐는 암투가 벌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며칠 전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건도 있었고 그들 마음 기대가 어땠을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공관복음에는 빠졌지만 요한복음에 발씻긴 사실을 기록하여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야망은 사람에게서 쉼을 빼앗아간다. 낮은 데 있을 줄 알 때 쉼이 있다. 요한 번연은 낮은 데 있어야 한다는 시를 썼다. 그러면 떨어질 염려가 없다. 예수님도 잔치에 초대받거든 상좌에 앉지 말라고 권고하셨다. 역시 쉼이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높은 자리에 대한 야망이 있거나 부에 대한 욕심이 있거나. 기타 이런 것이 마음을 차지하면 쉼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아가 죽을 때 쉼이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교회에서 낮은 자세로 섬기는 쉼을 누리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십자가 사건을 눈앞에 둔 예수님과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다투고 있는 불쌍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714() 위선

 

위선자란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런 체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시는 말씀을 주실 때 일곱 번 사용되었다(23:13, 14, 15, 23, 25, 27, 29). 복음서들은 간음한 자들, 세리들, 기생들, 그리고 심지어 살인자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에게만큼은 인내하지 않으셨다(참조, 6:2, 5, 16, 7:5, 15:7~9, 22:18).

 

23:1~13을 읽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위선자들의 특징 네 가지를 기록해 보라.

[23:1~13]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1,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 2. 남에게는 시키고 자신은 하지 않는다. 3.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럴듯한 일을 한다(칭찬받기를 좋아한다). 4. 천국 문을 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한다. 그러면서 열심히 전도한다. (반생들이 스스로 찾아보기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네 가지 특징들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신다. 서기 1년 유대교의 스펙트럼 가운데, 바리새인들은 보수적인 종교인들을 대표했다. 그들은 기록되어 전해지거나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율법에 관심이 많았고 종교적 의식의 순결성을 강조했다. 이와는 정반대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유한 지도 계층에 속해 있었고 당시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제사장 그룹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상당히 헬라화된 자들이었고(헬라어를 사용했고 헬라 철학에 능통했음) 심판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진보주의자들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이 두 계층 모두 위선으로 가득한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도 우리가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위선자들이 된다.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므로 종교를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종교적 열정을 사람들이 칭찬해 주기를 기대하며, 하늘 아버지께 속한 영예와 인정을 본인 스스로가 받으려 한다면 그것 또한 우리가 위선자임을 드러낸다.

그분의 말씀이 비록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위선자라고 부르셨던 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했다.

<묵상>

23:1~12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며 나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여 보십시오. 오늘 나는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사람입니까?

 

: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각각 답을 해보자.

 

예수께서 성전과 청중들에게 미련이 있는 듯한 시선을 던지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얼굴에는 거룩한 동정의 표가 나타났다. 마음의 깊은 고민과 쓰라린 눈물 때문에 목메인 음성으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셨다”(시대의 소망, 620).

 

<부가설명> 건강강의 하는 분이 사람의 건강을 망치는 삼식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과식, 간식, 외식이라고 했다. 그런데 외식을 집에서 나가서 식당에서 식사하는 외식이 아니고 외식(外飾)이다. 즉 겉다르고 속다른 것을 뜻하는 말로 표현했다. 진심을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보이려면 얼마나 긴장하겠는가? 요즘 말로하면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다. 스트레스는 모든 질병의 근원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세리의 기도처럼 죄인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잘한 것을 주님 앞에 늘어놓으려면 얼마나 긴장하겠는가? 신앙에 기쁨 대신에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긴장을 풀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육체의 마음과 사상으로 아무렇게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꽃봉오리가 피어날 때까지 자연스럽게 벌어져야 아름답다. 그것을 일찍 피게 하려고 꽃잎을 억지로 펴면 아름다울까?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하나님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쉼이 있고 진정한 경건이 된다. 바리새인들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쉼이 있었겠는가? 환자가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려면 얼마나 꾸미고 아닌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요 병을 더욱 악화시킨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날카롭고 직설적인 말로 종교적 위선에 빠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셨다.

 

 

715() 참된 쉼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14:1~6을 읽어 보라. 참된 쉼을 얻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분열과 이기심과 야망과 위선을 극복하고 참된 쉼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자아가 예수님 안에서 죽어야 한다.

 

참된 쉼을 찾는 일은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분이 길이고 진리며 생명이시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가득 찬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분만이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알고 계신다. 거룩한 입법자로서 그분은 사람으로 나타나신 진리이셨으며, 그분의 영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16:13). 우리가 상처 입고, 지치고, 아프고, 낙담하고 있을 때, 그분은 우리의 참된 생명이 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다(10:10). 이 약속은 장차 다가올 영원한 집과 영원한 생명을 포함하지만, 더불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 또한 보증한다. 창조주께서는 미래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실 수 있으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슴 벅찬 기대를 가지고 살라는 예수님의 초청이다. 우리가 낙담하고 있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으시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 죄와 투쟁하고 있을 때,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1:6).

이 땅에서의 상황이 얼마나 나쁘게 돌아가는지와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약속들을 바라보라. 그분께서는 모든 아픔과, 쉼 없는 삶과, 고통이 영원히 사라질 거처를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이다. 우리가 누구이건 간에, 우리의 배경이 어떻건 간에,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삶을 살아왔든지와 상관없이 그 소망은 우리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든지, 얼마나 상처 입고, 얼마나 망가졌고, 얼마나 비참한 형편에 놓여 있든지와 상관없이,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받아 주실 줄로 믿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간절히 구하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이유이다.

<묵상>

3:22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고치시고 완치하신다. 그때 쉼이 있다.

 

<부가설명>

 

김명호

 

환자는

누워있어도

쉼이 없다

 

환자는

그 병이 완쾌되기 전에는

결코 쉼이 없다

 

쉼은

자아가

예수님 안에서 죽을 때

누리는 복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여호와 하나님은 종신토록 수고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된 사람의 상태를 한마디로 지적하신 것이다. 종신(終身)하면 쉼이 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주 안에서 죽을 때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된다. 이것이 참된 쉼이다. 정말 이런 쉼을 쉬어보자.

 

<교훈>

우리로 하여금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붙잡고 사는 것이다.

 

 

716()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생애에는 자라나는 일도 없고 열매 맺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그대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해 주고 그분의 인자하심을 이야기해 주라. 그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의무를 다하라. 마음속에 영혼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을 힘써 행하라. 그대가 그리스도의 정신 곧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의 정신과 그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신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자라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품성에 무르익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그대의 신념이 더욱 확고해져서 그대의 사랑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67, 68).

 

편을 나누어 몇 시간이고 질질 끌며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그들 양편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부드러워져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들의 말을 다 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만일 교만과 이기심만 버린다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5분 내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초기문집, 1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에 대하여 토의해 보라. 함께 나눈 대화가 실제 삶에서 실천되도록 어떻게 서로를 도울 수 있겠는가?

말씀과 기도로 서로 격려하는 일은 할만하다.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 자아가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자.

 

2. 우리는 대부분 우리 안에 있는 야망과 위선과 이기심과 질투를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든지 겉으로는 상냥한 척할 수 있다. 하지만 아스펜 나무의 거대한 뿌리처럼 부정적인 특징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낼 기회를 기다리며 숨어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품성의 변화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쉼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자아가 굴복되는 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자아가 죽어야 한다. 야망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자.

 

3. 재림의 중요성에 관한 목요일 교과의 마지막 질문을 더 깊이 묵상해 보라. 재림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재림의 소망이 없다면 예수님의 초림인들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되겠는가?

재림이 없으면 초림은 의미가 없다. 재림이 없으면 부활이 없다. 그러면 인간은 육체가 죽을 때 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는 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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