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탕자의 새 옷
기억절: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아들이야기가 있다.
실지로 눅 15장은 세 가지 이야기로 다 공통점이 있다.
잃어버렸으나 찾은 아름다운 이야기.
그 중에 탕자로 알려진 이 아들의 이야기는 큰 감동이 있다.
유대풍습에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의 재산을 탐한 악한
아들이었다. 살아계시는데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한 당돌한
그의 주장은 “아버지는 빨리 돌아가셔야 제가 재산을 갖습니다.”
라는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못된 청을 다 들어주었다.
이 땅의 부모는 강제 하여서라도 아이들을 훈육한다.
전통적으로 매를 들기도 하고, 훈계하며, 또 어떨 때는
아들/딸의 의사와 반 하여, 아버지의 의사대로 일을 처리한다.
아버지 (부모님)은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또 강제하여서라도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다르다.
전폭적인 자유의사에 맡긴다. 그리고 전적인 책임은 그 결정한
사람의 몫이다.
만약에 하늘아버지가 이 땅의 아버지와같이 그렇게 아이들을
훈육하였다면, 아마도 죄를 짓는 무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죄로 향하는 무리들을 가로막고, 그 길로 못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루즈벨의 반역을 소위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애당초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것일까?
근본적으로 죄를 못 짓게 한다면 말이다.
이 땅의 부모들은 ‘마약’에 아이들이 손을 댄다면,
적극적으로 그 일을 못하도록 도모할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죄악을 범하였을 때에라도
그 책임을 죄인에게 묻지 않으시고,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점이다. 놀라운 복음이다.
탕자의 경우 그가 비록 나중에 결심하고 (이것도 자유의지)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에게 새 옷을 입혀주신다.
신분을 회복시켜주신다. 그리고 당당히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신다.
이것은 은혜의 옷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와 같이 오늘도 죄인들을 부르신다.
그런데, 억지로 손을 비틀며 ‘나에게 오라’ 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그 아들 딸 들을 오늘도 환영하며
새 옷을 입혀주신다.
우리는 언제 다시 돌아가려하는가?